막힌 언로를 열다 ‘상소문’
상소문의 문체는 어떻게 출발하였을까? 원시 국가가 형성되면서 부터 인간은 정치를 떠나서 살 수 없었고 황제와 제후, 재상과 신하가 있게 되면서 보고와 찬양을 위한 위대한 문장도 있게 되었다. 중국 고전문학의 대표적인 비평서인 유협의 『문심조룡(文心雕龍)』에서 “요(堯) 임금은 사악(四岳)의 제후에게 소통을 구했고, 순(舜) 임금은 8명의 제후에게 명을 내렸다. 중국 고대 제후는 천자에게 정치 상황을 보고하였으며 이것이 상소문의 시작이다”라고 하였다.
상소문은 임금과 신하 사이의 막힌 언로를 소통하면서 출발한다. 정치 상황의 진술은 시대마다 없을 수 없었고, 천자에게 올리는 문장이니만큼 품격과 형식을 갖춰야 했다. 상소문은 소통의 미학이다.
조선 시대에는 간관(諫官) 등이 주로 임금에게 정사를 간하기 위해 올리던 글을 상소(上疏)라 하고 의견서나 품의서는 상주(上奏)라 하여 소(疏)와 주(奏)를 구분하였다. 『동문선』에서는 주의(奏議)와 차자(箚子)를 구분했다. 주의(奏議)는 김후직(金后稷)의 『상진평왕서(上眞平王書)』, 설총(薛聰)의 『풍왕서(諷王書)』 등에서 출발하여 33편이 실려 있으며, 그 명칭은 상서(上書), 서(書), 진서(陳書), 계서(戒書), 청소(請疏), 청장(請狀), 청서(請書) 등으로 쓰이고 있고, 차자(箚子)는 12편이 실려 있는 데 모두 제목 끝에 차자(箚子)라고 되어 있다. 따라서 임금에게 올리는 주의류(奏議類)는 모두 상소문이라고 통칭하여도 큰 잘못은 없다고 생각된다.
미학을 추구하는 관료의 글쓰기
우리의 조선왕조실록이나 개인 문집 중에서 상소문의 형식으로된 글이 차지하고 있는 양은 간과할 수 없을 만큼 많다. 상소문은 임금과 소통하는 문장의 정수로서, 관각문학의 꽃이라는 위상을 가지고 동양사 속에 거대하게 자리 잡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소문은 왕조 시대 임금에게 올린 정치적인 글로서 볼만한 것이 못 된다는 편견 때문에 주목을 받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상소문 중에는 이사의 『축객서』, 제갈량의 『출사표』, 이밀의 『진정표』 등과 같이 아름답고 감동적인 글들도 상당량 존재하며, 이 글들은 『고문진보』에 편집되어 있으며 명문장으로서 후대 독자들에게 오랜 시간 동안 사랑을 받아온 명작이다. 한유의 『불골표』를 비롯하여 구양수와 육지 등의 상소문은 당송 고문의 전범으로 우리나라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 왕에 대한 설득과 감동이라는 문학적인 특성을 지닌 상소문은 문장에 대한 구성 논리와 설득을 위한 비유, 당대 사회에 대한 현실 인식 등 문예적인 내용들이 들어있다. 상소문은 오랜 역사를 두고 계승·발전되어 온 장르로 장중하고, 사실적이며 전아한 문체를 구사해야 한다는 문예미학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다.
고전 산문 중에 현실 인식과 정치적인 ‘문장 강화’의 정수를 볼 수있는 글이 상소문이다. 상소문의 문예미학적인 특징을 종합 정리해 보면 장중하고 웅혼하며, 전아하고 청징하며, 분명하고 명쾌하며, 성실하고 간절하며, 풍만하고 유창하며, 사리에 적절하고, 대구가 많이 쓰였고, 화려한 수사의 꾸밈을 피하며, 핵심을 찌르면서도 소략해서는 안 되고, 분명하면서도 천박해서는 안 된다는 것 등이다. 상소문은 미학을 추구하는 관료의 글쓰기로 최고 품격의 문예종합예술이었다.
이것은 조광조가 언급한 것으로 선비정신의 정의라고 할 수 있다. 조선의 선비들은 나라의 기강을 세우고 임금의 마음을 바로잡기 위해 도끼를 매고, 멍석을 짊어지고, 죽음을 각오하는 상소를 올려 충정을 표출하였다.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하려고 궁궐 앞에 이마를 찧어가며 상소를 올려 왕도를 펼쳤고, 임금에게 관료 선비들의 충정은 의로운 길을 열었고 언로가 막히면 목숨을 걸고 상소를 올려 길을 열었다. 이욕(利慾)에 눈이 멀어 백성의 재물을 수탈·착취하고 백성의 고혈을 짜는 탐관오리들을 내쫓기 위해 임금에게 눈물을 흘리며 간곡한 어조로 상소를 올려 백성들을 보호하였다. 상소는 정의의 문학이자 칼보다 무서운 글발이었으며 관각문학의 정수였다.
조선 시대 선비들의 상소문에는 우국애민(憂國愛民)의 열정이 살아 있다. 임금의 잘못을 바로잡고 나라의 장래를 진심으로 걱정하고 우리의 백성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선비들의 진실한 마음과 우국애민 정신. 선비들은 임금에 대한 한 치 불의도 용서하지 않고 조금의 비리와 방심도 묵과하지 않았다. 오직 나라와 백성을 걱정하며 올바른 다스림의 길을 가기 위해 목숨도 아끼지 않았던 선비들의 정의를 위한 행진곡, 상소. 이것은 우리 역사에 길이 남는 선비 정신의 지조와 절개, 그리고 의리의 서슬 퍼런 담론이다. 상소문은 우리 문화유산 중에 가장 자랑할 만한 선비 정신이다. 상소문의 정신을 잘 이해하고 계승하여 현대사회에서 상실되어 가는 정의와 용기를 되살려 청렴한 국가를 건설하는 기반이 되길 기원한다.
글‧신두환(안동대학교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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