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 부여 구드래 일원 ■, ■ 지리산 화엄사 일원 ■

이산저산구름 2016. 5. 10. 15:22

 

■ 부여 구드래 일원 ■

 

 

 

지정번호 명승 제63호
소 재 지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쌍북리 산1
지정면적 2,159,062.67㎡
지 정 일 2009년 12월 9일(사적 및 명승 제6호 부여 구두래 일원/사적 및 명승 재분류)


부여 구드래 일원은 부소산 서쪽 기슭의 백마강가에 있는 나루터 일대의 구드래 지역과 낙화암을 포함한 부소산 일대의 지역에 지정되어 있다. 구드래 지역과 낙화암, 부소산 등은 백마강과 어울려 마치 한 폭의 그림을 연상하게 하는 빼어난 경치를 나타내고 있다. 부소산은 해발 106m의 높지 않은 산으로서, 백마강 기슭에 있다. 그러나 이 산은 평지에 두드러진 구릉을 이루고 있으며, 백마강 방향은 단애를 형성하여 가파른 지형을 지니고 있다. 부소산은 예로부터 부여의 배후에 위치하고 있는 산이다. 산꼭대기를 중심으로 부소산성터·군창지·영일대터·송월대터 등 백제 때의 유적이 남아 있고, 조선 후기에 건립한 사비루·영일루·반월루·백화정 등이 있다. 백화정 바로 밑에 삼천 궁녀가 푸른 강물에 몸을 날린 낙화암이 있고, 강기슭 가까이에 고란초로 이름난 고란사가 있다. 백마강 방향에서 조망되는‘부여 구드래 일원’의 경치는 매우 아름다운 승경을 이룬다.


‘구드래’는‘구들돌’이라는 말에서 연유했다고 한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백제왕이 왕흥사에 예불을 드리러 가다 사비수 언덕 바위에 올라 부처님을 향해 절을 하자, 바위가 저절로 따뜻해져서 이곳을‘자온대’라 부르게 되었고, 그 이름에서 구들돌, 그리고 다시 구드래로 변하여 구드래라는 이름이 유래되었다는 설화가 있다. 또 다른 설화로는 백제를 오가는 왜의 배들이 구드래 나루터를 통해 백제의 수도인 사비에 들어 왔는데, 왜에서 백제를 부를 때‘구다라’라고 부른 것은‘구드래’와 관련된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부소산은 예로부터 고도 부여의 진산이 되어 온 산이다. 부소산의 낙화암과 고란사는 부여 구드래 일원의 의미를 높여 주고 있는 문화경관 요소이다. 낙화암(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110호)은 660년(의자왕 20) 백제가 나당연합군의 침공으로 함락되자 궁녀 3,000여 명이 이 바위 위에서 백마강으로 투신하여 죽었다고 하는 전설을 지닌 바위다. 이 바위를 후세 사람들이 낙화암이라고 불렀는데, 이 위에 1929년 군수 홍한표가 백화정을 지었다. 절벽 아래에는‘낙화암落花岩’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구드래 나루를 건너 울성산 남쪽 기슭에는 600년(법왕 2)에 세운 왕흥사가 있고, 옛 문헌에‘사비의 강’으로 기록된 백마강이 부소산 기슭을 따라 흐르고 있다. 백마강 양쪽에는 왕흥사와 호암리 절터, 부소산성을 비롯한 당시의 유적들이 많이 분포되어 있는데,‘ 부여구드래일원’은 아름다운 자연경관과 문화유산이 조화를 이루고 있는 곳이다. 백마강은 옛 문헌에 사비강·사비하·사자강·백강·백촌강으로 기록된 강으로 오늘의 금강의 한 부분이다. 부소산 건너 동편 천정대 앞 범바위에서 부여읍의 남쪽 현북리 파진산까지 약 16㎞ 정도를 말한다. 부여의 옛 지명이 소부리·사비로서, 백마강의 옛 이름들도‘소부리의 강’,‘ 사비의 강’,‘ 서울의 강’으로 풀이될 수 있다. 이 강은 부여 북쪽·서쪽·남쪽을 감돌아서 그 모양 때문에 부여의 성을 반월성이라 부르기도 하였다.

 


■ 지리산 화엄사 일원 ■

 

 

지정번호 명승 제64호
소 재 지 전라남도 구례군 마산면 황전리 12 외
지정면적 2,585,252㎡
지 정 일 2009년 12월 9일(사적 및 명승 제7호 지리산 화엄사 일원/사적 및 명승 재분류)


지리산 화엄사 일원은 지리산의 남서쪽에 위치한 구례군 마산면의 계곡 일대에 지정되어 있다. 지리산은 남한 내륙 지역에서 최고의 높이를 가진 천왕봉(1,916.77m)을 주봉으로 하고 있으며, 서쪽 끝의 노고단(1,507m), 서쪽 중앙의 반야봉(1,751m) 등 세 봉우리를 중심으로 하여 동서로 100여 리의 거대한 산악군을 형성하고 있다. 천왕봉에서 노고단에 이르는 주능선을 중심으로 해서 각각 남북으로 큰 강이 흘러내리는데, 하나는 낙동강 지류인 남강의 상류로서 함양·산청을 거쳐 흐르고, 또 하나는 멀리 마이산과 봉황산에서 흘러온 섬진강이 서쪽으로 흐르고 있다. 이 두 강으로 지리산에서 발원하는 화개천·연곡천·동천·경호강·덕천강 등 10여개의 하천이 흘러가며 맑은 물과 아름다운 경치로‘지리산 12동천’을 이루고 있다.


지리산의 지형은 융기작용 및 침식작용에 의해 산간분지와 고원이 형성되었으며, 계곡은 깊은 협곡을 이루고 있다. 천왕봉은 섬록암으로 형성되어 있고 주변은 화강암과 화강편마암이 넓게 분포되어 있으며, 800여종의 식물과 400여 종의 동물 등 동식물상 또한 풍부하다. 지리산은 백두산의 정기가 남으로 흘러 내려오다 다시 솟은 영산으로, 천왕봉·노고단 등 수많은 산봉우리, 웅장한 기암절벽·계곡, 울창한 산림 등이 있어 자연경관이 뛰어나며, 천년 사찰 화엄사와 조화되어 역사문화적 가치가 큰 경승지이다. 화엄사는 지리산의 반야봉과 노고단 자락의 남쪽 기슭에 자리 잡고 있다. 해발 250m의 산간 구릉지대로, 주변의 자연경관이 수려하며 장엄한 모습을 보존하고 있다.


지리산은 신라 5악의 남악으로‘어리석은 사람이 머물면 지혜로운 사람으로 달라진다’하여‘지리산智異山’이라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또한‘멀리 백두대간이 흘러왔다’하여‘두류산頭流山’이라고도 하며, 옛 삼신산三神山의 하나인‘방장산方丈山’으로도 알려져 있다.


화엄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17교구 본사로서, 544년(성왕 22)에 인도에서 온 승려 연기가 창건하였다고 전해진다. 그 뒤 670년(문무왕 10)에 의상대사가 장육전을 건립하고, 사방의 벽면에 화엄경을 새긴 석경으로 두르는 등 큰 도량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신라 말기에 도선이 풍수도참설에 따라 대대적으로 중수하였고, 고려시대에 네 차례의 중수를 거쳤다. 화엄사는 가람8원 81암 규모의 큰 사찰로 이른바 화엄의 불국세계를 구현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임진왜란 때 전소된 바 있으며, 1630년(인조 8)에 벽암선사가 절을 다시 세우기 시작하여 7년만인 1636년(인조 14)에 완성하였다. 장육전을 두르고 있던 석경은 부서져 돌무더기로 쌓여 있다가 지금은 각황전에 일부만이 보관되어 있다. 다른 절과는 달리 대웅전을 중심으로 가람을 배치하지 않고 각황전에 비로자나불을 주불로 모시고 공양하고 있다. 임진왜란 당시에는 왜군이 범종을 가져가려다 배가 전복되어 강에 빠졌다고 하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지정된 문화재는 총 14점으로서, 국보로 지정된 문화재가 화엄사각황전앞석등·화엄사사사자삼층석탑 등 4점이 있고, 보물로는 화엄사동5층석탑·화엄사서5층 석탑·화엄사대웅전·화엄사원통전앞사자탑 등 5점이있으며, 천연기념물로는 화엄사의 올벚나무가 있고, 전라남도 지정문화재로 화엄사보제루 등 2점이, 전라남도 문화재자료인 남악사 등 2점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