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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속리산 법주사 일원 ■, ■ 가야산 해인사 일원 ■

이산저산구름 2016. 5. 3. 10:09

 

 

■ 속리산 법주사 일원

 

 

 

 

지정번호 명승 제61호
소 재 지 충청북도 보은군 속리산면 사내리 산1-1 외
지정면적 18,464,375.92㎡
지 정 일 2009년 12월 9일(사적 및 명승 제4호 속리산 법주사 일원/사적 및 명승 재분류)


속리산 법주사 일원은 법주사를 중심으로 속리산의 천황봉과 관음봉을 연결하는 일대를 의미한다. 속리산의 높이는 해발 1,058m(천왕봉)이며, 태백산맥에서 남서쪽으로 뻗어 나오는 소백산맥 줄기 가운데 솟아 있으며, 자연에 의해 형성된 속리산의 아름다운 산수와 경치, 그리고 법주사 지역에 있는 역사 깊은 문화유산들이 어우러져 뛰어난 가치가 있는 경승지이다. 속리산은 최고봉인 천왕봉을 중심으로 비로봉(1,032m)·문장대(1,054m)·관음봉(982m)·길상봉·문수봉 등 9개의 높은 봉우리로 형성되어 있어 원래는 구봉산이라 불리다가 신라 때부터 속리산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속리산은 한국 팔경 가운데 하나에 속하는 명산으로, 중생대 백악기에 관입한 화강암의 기봉과 울창한 산림으로 뒤덮여 있고, 산중에는 천년 사찰 법주사가 있다. 봄에는 산벚꽃, 여름에는 푸른 소나무, 가을에는 붉게 물든 단풍, 겨울에는 설경이 유명하다. 세 번 오르면 극락에 갈 수 있다는 속설이 전해지는 문장대에 서면 산 절경이 한눈에 펼쳐진다. 하늘 높이 치솟은 바위가 흰 구름과 맞닿는다 하여 문장대를 일명‘운장대雲藏臺’라고도 한다. 이 외에 입석대·신선대·경업대·봉황대·산호대 등 8대와 8석문이 있고, 은폭동계곡·용유동계곡·쌍룡폭포·오송폭포 등 아름다운 경승이 많다.

 


속리산은 우거진 수림과 기암괴석으로 절경을 이루어 예로부터 제2의 금강이라고도 해왔다. 784년(선덕여왕 5)에 진표眞表가 이곳에 이르렀는데, 밭을 갈던 소들이 모두 무릎을 꿇었다고 한다. 이를 본 농부들이 짐승도 저러한데 하물며 사람들이야 오죽하겠느냐며 속세를 버리고 진표를 따라 입산수도하였는데, 여기에서‘속리’라는 이름이 유래되었다고 한다. 속리산은 구봉산 이외에도 광명산·미지산·형제산·소금강산 등의 별칭을 가지고 있다.


법주사를 개창한 스님으로 알려진 의신義信이 일찍이 불법을 구하러 천축국으로 건너가 경전을 얻어 귀국한 후, 속리산으로 들어가 553년(진흥왕 14) 이 절을 창건하였는데, 법이 안주할 수 있는 속세를 떠나 있는 절이라 하여‘법주사’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그러나 법주사의 정신적 지주가 된 미륵신앙이나 법상종의 유식사상唯識思想은 혜공왕 때 이 절의 중흥에 크게 기여한 진표와 그의 제자 영심永深에 의하여 발현된 것이라 한다. 신라 성덕왕 때 중수하였는데, 지금 남아 있는 석물은 모두 이 때 만들어진 것
이다. 그 후 여러 차례 중수를 하였으며, 현존하는 목조건물은 모두 조선 후기에 조성된 것이다. 법주사 경내에는 유명한 법주사 쌍사자석등(국보 제5호)·법주사 팔상전(국보 제55호)·법주사 석련지(국보 제64호)·법주사 사천왕석등(보물 제15호)·법주사 마애여래의상(보물 제216호)·법주사 대웅전(보물 제915호)·법주사 원통보전(보물 제916호)등의 문화재와 비지정문화재를 비롯하여 주위에 크고 작은 사찰이 있어 많은 문화유산을 간직하고 있다. 주변에는 삼년산성(사적 제235호)·정이품송(천연기념물 제103호)·망개나무(천연기념물 제207호) 등이 있다.

 

 


가야산 해인사 일원

 

 

지정번호 명승 제62호
소 재 지 경상남도 합천군 가야면 치인리 산1-1 외
지정면적 20,952,454㎡
지 정 일 2009년 12월 9일(사적 및 명승 제5호 가야산해인사일원/사적 및 명승 재분류)


경남 합천군에 위치한 가야산은 한국 12대 명산의 하나로서 조선 8경에 속하였다. 주봉인 우두봉(상왕봉)을 중심으로 암봉인 두리봉과 남산·비계산·북두산 등 해발고도 1,000m가 넘는 높은 산들이 이어져 있으며, 합천군 쪽으로는 산세가 부드러운 편이지만 성주군 쪽은 가파르고 험하다. 가야산은 높이가 해발 1,430m이며, 우뚝하고 기이한 모습으로 아름다운 명산이다. 가야산의 돌과 물, 소나무 숲은 가야산 특유의 자연경관을 나타내고 있으며, 두리봉·깃대봉·남산 제일봉과 홍류동 계곡 등은 경치가 아름답다. 가야산 해인사 일원은 해인사를 포함한 가야산 일대에 지정되어 있다. 국내 제일의 법보사찰인 해인사는 정연하게 자리하고 있으며, 매우 웅장하게 건립되어 있는 전통적인 옛 사찰이다. 해인사에는 부속암자인 원당암을 비롯하여 홍제암·용탑선원·삼선암·약수암·국일암·지족암·희랑대·청량사 등이 있으며, 이러한 절집들은 가야산의 기암괴석, 소나무 숲과 어우러져 뛰어난 경승을 이루고 있다. 가야산은 소의 머리와 그 모습이 비슷하다고 하여 우두산牛頭山이라고 불렀으며, 상왕산·중향산·지달산·설산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가야산이라는 이름은 이 산이 옛날 가야국이 있던 이 지역에서 가장 높고 훌륭한 산이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가야의 산’이라는 뜻으로 부른 것이라고 전해진다.


해인사는 여러 차례 불이 나서 건물 대부분이 타버렸고, 지금의 건물들은 대부분 조선 후기에 세운 것들이다. 대한불교조계종 제12교구 본사로서, 신라 애장왕(788~809) 때의 고승인 순응順應과 이정利貞이 당나라에서 돌아와 우두산에 초당을 지으면서 유래하였다. 애장왕비가 등창이 났을 때, 선정에 들었던 두 스님이 병을 낫게 해주었는데 이에 감동한 왕은 가야산에 와서 원당을 짓고 정사를 돌보며 해인사의 창건에 착수하게 하였다고 한다. 순응이 절을 짓기 시작하고 이정이 그 뒤를 이었으며, 결언대덕이 이어받아 절의 주지가 되었다. 918년 고려를 건국한 태조는 당시의 주지 희랑希郞이 후백제의 견훤을 뿌리치고 도와준 데 대한 보답으로 이 절을 고려의 국찰로 삼아 해동 제일의 도량이 되게 하였다. 1398년(태조 7)에 강화도 선원사에 있던 고려팔만대장경판을 지천사로 옮겼다가 이듬해 이곳으로 옮겨와 호국신앙과 관련된 가람으로서 법보사찰이 되었다. 그 후 해인사에는 세조가 장경각을 개수하고 확장하였으며, 조선 성종때는 가람을 대대적으로 증축했고, 근세의 해인사는 항일운동의 근거지가 되기도 하였다. 이 사찰은 창건 이후 일곱 차례의 큰 화재를 만나 그때마다 중창되었는데, 현재의 건물들은 대부분 조선 말엽에 중건한 것들로 50여 동에 이른다. 창건 당시의 유물로는 대적광전 앞뜰의 3층 석탑과 석등이 있다. 특히 팔만대장경판(국보 제32호)과 대장경판고(국보 제52호) 및 석조여래입상(보물 264호)은 유명한데, 특별한 것은 몇 차례의 화재를 당하면서도 팔만대장경판과 장경각만은 화를 입지 않고 옛 모습 그대로 보존되고 있다는 것이다. 통도사(불보사찰佛寶寺刹)·송광사(승보사찰僧寶寺刹)와 함께 삼보사찰三寶寺刹가운데 하나인 법보사찰法寶寺刹로 이름 나있고, 불교학원인 해인총림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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