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월 청령포 ■
지정번호 명승 제50호
소 재 지 강원도 영월군 남면 광천리 산67-1 외
지정면적 204,241㎡
지 정 일 2008년 12월 26일
영월 청령포는 영월읍에서 남서쪽 4㎞ 이격되어 흐르고 있는, 남한강의 지류인 서강西江이 휘돌아 흘러가는 지점에 위치하고 있는 포인트 바(Point Bar)에 해당한다. 청령포의 서쪽은 육육봉의 험준한 층암절벽이 솟아 있고 그 주위에는 삼면이 강으로 둘러싸여 마치 섬과 같은 형태를 이루고 있는 곳이다. 청령포 일대에는 고생대 오르도비스기에 퇴적된 퇴적암이 분포하는데, 주로 석회암이 분포한 지역을 서강이 감입곡류하고 있어 석회암의 하식애가 발달하여 자연경관이 우수하다. 살아 있는 임금으로서 폐위된 단종의 애처로운 모습을 보고, 오열을 들었다고 해서 이름 지어진‘관음송’(천연기념물 제349호)이 오랜 세월을 머금은 모습으로 소나무 숲 속에 위치하고 있다. 또한 관음송을 비롯하여 단종의 어가 주변에 조성된 크고 울창한 소나무림이 있으며, 이 송림은 육육봉을 휘돌아 흐르는 서강과 어우러져 매우 아름다운 수변경관을 이루고 있다. 청령포에는 단종어가·단묘유지비·금표비·노산대·망향탑 등 단종과 관련된 장소와 시설이 위치하고 있으며, 청령포 강 건너 나루 옆에는 단종의 유배 길과 사형 길에 금부도사로 왔던 왕방연의 시비가 있다.
- 단종어가 : 단종이 유배되어 살던 집으로, 2004년 4월,『승정원일기』의 기록에 따라 기와집으로 당시의 모습을 재현하여 건립되었다. 어가에는 당시 단종이 머물던 본채와 궁녀 및 관노들이 기거하던 사랑채가 있으며, 밀납인형으로 당시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 단묘유지비 : 1673년(영조 39)에 영조 임금의 친필을 각자하여 세운 비석으로서, 단종이 청령포에 살았음을 증명해 주는 비석이다. 높이 162cm의 크기로 1단의 화강석비좌 위에 오석으로 된 비신을 세웠다. 전면에는‘단묘재본부시유지端廟在本府時遺址’라 새겨 있고, 후면에는‘황명숭정무진기원후삼계미계추읍체경서皇命崇禎戊辰紀元後三癸未季秋泣涕敬書영원영수석令原營樹石’이라 기록되어 있다.
- 금표비 : 1726년(영조 2)에 세운 비석으로서, 이 비석에는‘동서삼백척東西三百尺남북사백구십척南北四百九十尺차후니생역재당금此後泥生亦在當禁’이라는 기록이 있다. 금표는 소나무의 벌목을 금하거나 일반인의 출입을 금할 목적으로 세우는 것으로서, 청령포의 동서 삼백척, 남북 사백 구십척 안에서의 금송에 관한 내용을 담은 비석이다.
- 망향탑 : 청령포 뒷산 층암절벽에 있는 탑으로 단종이 한양에 두고 온 왕비 송씨를 생각하며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돌을 쌓아 만든 탑이라고 한다.
1457년(세조 3) 6월 조선 제6대 임금인 단종이 세조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유배되었는데, 그해 여름, 홍수로 서강이 범람하여 청령포가 물에 잠겼다. 단종은 강 건너 영월부의 객사인 관풍헌觀風軒으로 처소를 옮기기 전까지 두어 달간 이곳에서 생활하였다. 워낙 지세가 험하고 강으로 둘러싸여 있어서 단종이 이곳을‘육지고도陸地孤島’라고 표현했다고 전한다. 단종은 1547년 10월 관풍헌에서 사약을 받고 숨졌다. 단종을 유배지로 인도하는 임무를 맡았으나 세조의 처사를 못 마땅해 여겼던 의금부도사 왕방연은 청령포의 서강을 바라보며 다음과 같은 시조를 지었다.
“천만리 머나먼 길에 고운 님 여의옵고 내 마음 둘 데 없어 냇가에 앉았더니 저 물도 내 안 같아야 울어 밤길 예놋다.”
■ 예천 초간정 원림 ■
지정번호 명승 제51호
소 재 지 경상북도 예천군 용문면 죽림리 350 외
지정면적 12,979㎡
지 정 일 2008년 12월 26일
예천군 용문면 면소재지인 상금곡리에서 928번 지방도로를 따라 약 5㎞ 정도를 올라가면 길 우측으로 깊게 패인 계곡이 위치한다. 이 계곡에는 하천이 암반 지역을 굽이쳐 흐르는데 하천이 굽이도는 위치에 초간정이 자리하고 있다. 용문면 원류마을 앞의 바위를 휘돌아 계곡을 흐르는 계류는 암반 위에 세워진 정자와 잘 어우러져 있으며, 암반 아래 형성된 계곡의 바위와 사면위로 조성된 송림이 함께 하나의 아름다운 문화경관을 이루고 있는 경승지이다. 예천 초간정 원림은 초간정을 비롯하여 계류·암석·송림을 포함하여 명승으로 지정한 것으로서, 조선시대 우리나라 고유의 별서정원이라 할 수 있다.
초간정은 절벽 위에 돌을 쌓아 만든 축대 위에 세워졌으며,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에 팔작집의 정자이며, 특히 정자 후면의 마루 끝에 설치된 계자난간에 앉으면 암반 위를 흐르는 계류의 모습과 함께 송림 숲을 볼수 있어 정자 주변의 경관을 감상하는 주요 조망지점이 되고 있다.
초간정은 우리나라 최초의 백과사전이라 할 수 있는『대동운부군옥』을 저술한 조선 선조 때 학자인 초간 권문해(1534~1591)가 1582년 지은 정자이다.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1612년(광해군 4) 재건했다가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 때 다시 붕괴되었으나, 권문해의 현손이 다시 세운 것이다.
조선시대 선비들은 출사의 의무를 다하고 나면 고향으로 낙향하거나 심산 계곡으로 들어와 남은 삶 동안 제자를 기르고 자연과 벗하며 삶을 마치고자 했다. 특히 성리학을 추종했던 조선시대 유학자들은 성리학의 창시자인 주자를 흠모했는데, 주자는 관직을 그만 두고 무이武夷로 돌아와 무이정사武夷精舍를 짓고 은거하였다. 그러므로 조선시대 성리학자들은 주자의 영향을 받아 은퇴 이후 산야에 집을 지어 은거하기도 하였다. 초간정은 초간 권문해가 소유했던 별서정원으로서, 별서는 본제를 지니고 있는 사람이 제2의 주택으로 소유했던 오늘날의 별장이라고 할 수 있다. 조선시대 선비들은 자연 속에 정자 하나 짓기를 소원했으며, 낙향한 선비들이 유유자적한 생활을 즐기었던 우리나라의 산야, 특히 영남·호남지방에는 별서생활의 은거지로서 정자가 건립된 사례가 매우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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