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 단양 구담봉 ■, ■ 단양 사인암 ■

이산저산구름 2016. 3. 15. 08:20

 

■ 단양 구담봉 ■

 

 

 

지정번호 명승 제46호
소 재 지 충청북도 단양군 단성면 장회리 산32 외
지정면적 159,667㎡
지 정 일 2008년 9월 9일


단양 구담봉은 충청북도 단양군 단양읍 단성면 및 제천시 수산면에 걸쳐 있는 산이다. 단양팔경 중 하나에 속하는 산으로 물속에 비친 바위가 거북 무늬를 띠고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충주시에서 단양읍을 향해 가다보면 거북 한 마리가 뭍으로 올라가는 듯한 형상의 산이 보인다. 제비봉과 금수산, 멀리는 월악산이 감싸고 있어 충주호 수운관광의 최절정지로 손꼽히고 있다. 높이 330m의 구담봉은 아담한 규모의 부챗살처럼 펼쳐진 바위능선이 설악을 닮은 듯하고 능선 좌우의 기암절벽이 금강에서 옮겨 놓은 것 같은 형상을 하고 있다. 구담봉은 중생대 백악기에 관입한 화강암이 오랜 세월에 걸쳐 융기·풍화·침식작용을 받으면서 지표에 노출된 것이다. 구담봉은 육로로는 접근할 수 없어 충주호의 장회나루, 혹은 신단양나루에서 배를 타고 접근하여 충주호 수면위에서 조망할 수 있으며, 또한 계란재에서 등산으로 오를 수는 있는데 정상에 오르면 충주호의 아름다운 전경이 한눈에 펼쳐져 구담봉은 충주호를 내려다 보는 조망지점으로서도 가치를 지니고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의「단양군 산천조」에 의하면‘구담은 군 서쪽 20리에 있다’하였다. 또한『택리지』의「복거총론 산수편」사군산수에는‘구담은 청풍에 있는데 양쪽 언덕에 석벽이 하늘 높이 솟아 해를 가리었고 그 사이로 강물이 쏟아져 내린다. 석벽이 겹겹이 서로 막혀 문같이 되었는데, 좌우로 강선대·채운봉·옥순봉이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단양 구담봉은 절벽 위의 바위가 거북이를 닮아‘구담봉龜潭峰’이라 한다고 전한다. 구담봉 장회나루 쪽으로는 퇴계 이황을 사모하던 기녀 두향의 묘가 있으며, 조선 인종 때 백의재상이라 불리던 이지번(?~1575)이 벼슬을 버리고 이곳에 은거했는데, 푸른 소를 타고 강산을 청유하며 칡덩굴을 구담봉의 양쪽 봉우리에 매고 비학을 만들어 타고 왕래하니 사람들이 이를 보고 신선이라 불렀다는 이야기도 전해져 오는 등 이야기가 많은 명승지이다. 구담봉은 남한강 물줄기를 따라 펼쳐지는 깎아지른 듯한 장엄한 기암절벽이 제비봉과 금수산, 멀리는 월악산에 감싸여 있어 예로부터 이황·이이·김만중 등 수 많은 학자와 시인묵객이 그 절경을 찬미한 바 있으며, 특히 이황은 구담봉의 장관을 보고‘중국의 소상팔경이 이보다 나을 수는 없을 것’이라고 극찬했다고 한다. 이황은 구담봉의 모습을 바라보며 그 여유로움을 표현한 시 한 수를 남겼는데 이는 구담봉에 집을 짓고 기거하던 은자隱者이이성을 생각하며 지은 시라고 알려져 있다.


효과구담월재산(曉過龜潭月在山)
고거상상유무간(高居想像有無間)
주인금작타산은(主人今作他山隱)
학원원제운자한(鶴怨猿啼雲自閒)

 

새벽에 구담을 지나노라니 달은 산마루에 걸려있네
높이 웅크린 구담봉은 무슨 생각 저리 깊을까?
예 살던 신선은 이미 다른 산으로 숨었으리라.
다만 학과 원숭이 울고 구름만 한가로이 흘러갈 뿐.

 

 

 

■ 단양 사인암 ■

 

 

지정번호 명승 제47호
소 재 지 충청북도 단양군 대강면 사인암리 산27 외
지정면적 5,950㎡
지 정 일 2008년 9월 9일

 

사인암은 단양 남쪽 8㎞ 지점인 대강면 사인암리에 있으며, 덕절산(780m) 줄기의 남조천(일명 운계천) 강변을 따라 깎아지른 듯이 치솟아 있다. 사인암을 끼고 굽이치는 계곡을 운선구곡이라 하는데 사인암은 그 중 제7곡에 해당되며, 사인암 가까이에는 단양팔경 중의 상선암·중선암·하선암을 잇는 삼선구곡도 위치하고 있다. 고려 공민왕 때 나옹선사가 창건(1373년)했던 청련암이 이곳 인근에 복원되어 있다. 이 청련암은 본래 단양군 대강면 황정리 28번지에 있었으나, 1876년 일본군 침략 때 봉기한 향토군과 접전 시에 불타며 남긴 기둥을 이곳으로 옮겨 1954년 복원한 것이다. 사인암의 절벽 꼭대기에는 아름다운 수형의 소나무들이 우뚝 솟아 있으며, 수직절벽의 바위 틈에도 마치 분재와 같이 소나무가 자라고 있어 사인암의 석벽과 잘 조화를 이루어 아름다운 경관을 연출하고 있다.


사인암은 중생대 백악기에 지하 깊숙이 관입한 불국사 관입암류에 속하는 월악산 화강암체가 지각의 융기와 풍화·침식작용으로 인해 지표에 노출된 것으로서 흑운모 화강암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화강암은 약 8천 8백만 년 전에서 8천 3백만 년 전에 생성된 것으로 판단되고 있다. 이 흑운모 화강암이 지표에 노출되는 동안 수많은 수평절리와 수직절리가 교차되어 발달하고, 소백산맥과 월악산에서 발원하는 남조천의 지속적인 침식작용으로 수직절리면을 따라 하식애가 발달하여 화강암 특유의 수려한 경관을 이루게 되었다. 사인암은 석회암지대에 관입한 화강암이 하천의 반석을 이루고 있는 위에 세워진 병풍 모양의 화강암체로서 수직절리면을 따라 수직절벽이 잘 발달해 있다. 또한 다양한 색깔로 드러난 수직·수평의 절리면이 서로 교차하여 마치 수많은 책을 쌓아 놓은 모습을 하고 있어, 사인암이 옛 선비들의 관심을 불러 일으키고 호감을 사게 된 것으로 보인다. 병풍처럼 넓은 바위가 직벽을 이루며 위엄을 나타내고 있는 곳으로 추사 김정희가 이곳을 두고 하늘에서 내려온 한 폭 그림과 같다고 찬양했을 정도로 그 경관이 특이하고 아름답다.

 


사인암은 단양팔경 중에 대표적 동천경승지이다. 고려시대 역동 우탁(1263~1342)이 정4품 벼슬인 사인舍人재직 시 이곳에서 머물렀다는 사연이 있어, 조선 성종 때 단양 군수였던 임재광이‘사인암’이라 명명했다고 한다. 경사에 정통하고 역학에 해박했던 우탁은 성리학이 처음 들어 왔을 때 아무도 이를 아는 사람이 없자 한 달 동안 연구하고 해독하여, 비로소 성리학에 능통했다고 한다. 이렇게 되자 중국의 학자들이 중국의 역이 동으로 옮겨가게 되었다고 하여 우탁을‘역동’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사인암의 암벽에는 우탁이 당시의 감회를 적은 글이 새겨져 있고 개울가 바위에는 수 많은 시인과 묵객의 이름이 있는데 특히 언제 만들어졌는지 알 수는 없으나 순장바둑(우리 고유의 재래식 바둑)판이 새겨져 있으며,‘청산의 눈 녹인 바람을 빌어다가 귀 밑의 해묵은 서리를 녹여 볼까 하노라’하는 그의「탄로가嘆老歌」2수를 적은 시비가 세워져 있다. 또한 사인암의 암벽에는‘뛰어난 것은 무리에 비유할 것이며, 확실하게 빼지 못한다. 혼자서도 두려운 것이 없으며, 세상에 은둔해도 근심함이 없다’라는 우탁의 친필각자가 있으며, 인근에는 1977년 지방의 유림들이 건립한‘역동우탁기적비’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