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하늘빛과 물빛이 어우러진 남해의 가을마중 - 남해 물건리 방조어부림

이산저산구름 2015. 10. 27. 10:48

 

땅 끝의 가을

떠나기 전 찾아본 물건리 방조어부림. 바닷길을 따라 초승달 모양으로 1500m 이어지는 이 숲은 상공에서 찍은 사진으로 보면 흡사 바다를 안은 모양새다. 이름이 특이하기도 하고 바다를 둘러싼 숲길이 이색적이어서 이곳을 여행의 시작점으로 삼기로 한다. 해변의 부서지는 파도소리를 들으며 상쾌한 숲길을 걷는 황홀한 상상을 하면서 말이다.

물건리 해변에 도착하니 너른 주차장이 관광객을 맞는다. 아, 좋아. 비릿한 바다냄새가 이곳이 남쪽 끝임을 말해주는 것 같다. 조금 이른 가을이라서 일까? 생각보다 사람은 얼마 없다. 몽돌 해변으로 내려서니 조그맣고 귀여운 몽돌들이 넓게 깔려있다. 방파제에 막혀서인지 파도도 잔잔, 어린아이 등을 토닥이듯 밀려왔다 밀려간다. 물 맑은 남해 해변을 따라 조금 올라가니 방조어부림의 시작점. 숲 사이로 난 데크 산책로로 발을 내딛는다. 순간 공간은 숲으로 변한다. 무성한 활엽수림, 나뭇잎들이 햇빛과 바람에 부딪쳐 숲의 공기와 내음, 소리를 만들어낸다.

01. 바닷길을 따라 초승달 모양으로 1500m 이어지는 남해 물건리 방조어부림(천연기념물 제150호). 해안을 따라 펼쳐진 숲은 우리 자연을 이용해 삶을 일궜던 조상의 지혜를 보여준다. ⓒ김병구

 

인간이 만들어낸숲

물건리 방조어부림은 100% 사람들이 조성한 숲이다. 바다바람을 막아내기 위해, 염해나 밀물, 해일 등 바다의 위험에서 마을을 지켜내기 위해. 이렇게 조성된 숲이 300여 년 흘렀다. 그 세월 동안 나무들은 키를 키웠고 숲을 키웠고 마을을 키웠다. 숲이 파괴되면 마을도 큰 해를 입는다. 때문에 마을 사람들은 300년 이 넘는 시간 마을을 돌보듯 숲을 가꿔왔으리라. 그 보살핌을 받고 크고도 울창하게 삼림들이 자라나 숲을 이루었으리라. 바다에 맞닿아 살면서 자연을 이용하여 마을을 지켜낸 선조들의 지혜가 나무 한 그루 한 그루에서 엿보이는 듯하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이 숲은 물고기 떼를 불러들이는 어부림魚符林역할을 하기도 한다. 숲의 푸른빛에 이끌려 물고기들이 몰려오기 때문. 산책로를 걸으니 과연 물고기들이 반할만 하다. 높이 10~15m정도의 팽나무, 느티나무, 이팝나무, 상수리나무 등 활엽수림과 청미래덩굴, 청가시덩굴, 개머루, 마삭줄 등의 덩굴식물류가 한데 어우러져 근사한 경치를 선사하고 있다. 이 푸른 빛이 저 먼 바다의 물고기들까지 불러들인다 생각하니 신기하기만 하다.

 

남해 속 독일마을

바다 반대 방향을 바라보니 같은 생김새의 예쁜 집들이 오밀조밀 붙어있다. 아! 저곳이 그 유명한 남해 독일마을이로군. 길을 서둘러 언덕위를 오른다. 마을 초입에서 맞이해주는 정직한 글씨의 독일마을. 한 눈에도 척! 유럽형 건축물들이 조르라니 서있다. 잠시 시공간을 옮겨 온것 같은 착각에 빠진다.

남해 속의 독일이라니, 무언가 색다른 스토리가 있을 법하다. 이 마을은 1960년대 가난한 조국을 위해 독일 광산노동자와 간호사로 떠났던 사람들이 다시 돌아와 정착한 곳이란다. 추억을 잊지 못해 독일식, 뾰족하고 붉은 지붕을 얹은 집들을 짓고 정착한 사람들. 작년 9월에 문을 연 남해파독전시관에 들어서면 가난한 조국의 가족들을 위해 이역만리 독일로 가 1200m 지하탄광으로 내려갔던 광부의 이야기도, 외롭고 고된 타국 생활을 견뎌내야 했던 간호사의 이야기도 생생하게 느낄 수 있다.

02. 독일 교포들의 정착과 관광지개발을 위해 조성된 독일마을. 독일 교포들이 직접지은 전통적인 독일 양식 주택들이 남해의 아름다운 경관과 어우러져 있다. ⓒ김병구

 

가슴 벅찬 남해파독전시관

전시관의 시작은 공항의 이별로부터 시작된다. ‘하고 싶은말들이 쌓였는데도…’로 시작되는 문주란의 공항의 이별 가사는 세대가 바뀌었어도 그대로 가슴을 울린다. 전시관을 따라가자 그때 일자리를 찾아 파독되었던 사람들의 떠나는 모습, 그 사람들이 보내온 돈으로 준공한 경부고속도로, 역사의 한 컷 한 컷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그리고 ‘살아서 돌아오라’라고 쓰여진 무시무시한 포스터와 1200m 지하로 내려가는 길을 재현해놓은 좁은 갱도. 광부들의 두려움, 삶의 무거움이 갑자기 엄습해오는 것 같다. 전시실에서 발견한 손 편지에 참고 있 던 마음이 다시 한 번 울컥 한다. 편지를 보낼 당시 상황을 상상해보니 영화 국제시장을 보았을 때와 비슷하게 아릿한 기분이 든다.

 

물미해안도로를 달리며

독일마을에 대한 사진, 연혁 등을 둘러보고 나오니 다시 탁트인 광장. 서둘러 다시 길을 물미해안도로로 잡는다. 물미해안도로는 삼동면 물건리에서 송정리 초전삼거리까지 이어지는 19번 국도로 최고의 해변 드라이브 코스이다. 굽이굽이 바다를 따라 나있는 길을 달리면 삶의 무게쯤은 얼마든지 날려버릴 수 있는 힘이 생기는 것 같다. 창문을 크게 열어 바람을 들이고 머리카락은 아무렇게나 흩어지게 둔다. 하기야 하늘을 나는 듯 아름다운 바닷길을 달리는데 머리카락이야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남해에는 있었다. 인간과 자연이 어우러져 한 폭의 풍경화를 만들어내고 있는 방조어부림이. 떠나는 자의 슬픔과 돌아온 사람들의 자부심이 한 편의 드라마를 만들어내고 있는 독일 마을이. 하늘인지, 바다인지 구별할 수조차 없는 푸른 빛 사이로 지친 마음조차 스르르 날려버릴 수 있는 해변 드라이브 코스가.

물론 두 개의 큰 섬으로 나뉘어져 있는 남해엔 더 많은 보물들이 숨어있을 것이다. 금산? 다랭이논? 이것저것 따져보다 문득 시장기가 밀려든다. 시계를 보니 때를 놓치긴 한참 놓쳤다. 가만 있자. 남해에는 미조항 멸치쌈밥이 그렇게 별미라지? 19번 해안도로 종착지, 미조항을 향해 열심히 페달을 밟는다.

 

글. 신지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