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여행길 15 - 석양빛에 물든 자연유산을 따라

이산저산구름 2015. 2. 10. 08:59

 

삼면이 바다에 맞닿아 있는 태안. 이 지역은 한반도의 대표적인 해식지형으로 발길 닿는곳마다 수려한 자연경관을 뽐낸다. 또 1월 평균기온 4℃의 등온선이 지나 식물의 남북한 계선이 형성되어 독특한 식물분포를 나타낸다. 뿐만 아니라 간만의 차가 심하고 수심이 얕아 주변 해안에 넓은 간석지를 형성한다. 이 덕에 해안 곳곳에 만리포, 연포, 몽산포 등 10여 개의 해수욕장과 항구도 조성돼 있다. 태안은 지리적 특성 때문에 예로부터 왜구의 침략이 잦았는데, 이를 막기 위해 축조했던 산성이 많이 남아 있다.
이처럼 태안은 아름답고 신비한 자연유산과 역사적으로 가치 있는 문화유산이 곳곳에 자리한다. 이러한 천혜의 조건으로 최근에는 서해안 해변을 따라 걷는 ‘태안해변길’이 각광받고 있다. 학암포에서 출발해 영목항에 이르는 총 97km 7개 구간은 그 구간마다 색다른 멋을 자아낸다.
특히 아름다운 일몰 광경이 일품인 안면도 꽃지 할미 할아비 바위를 비롯해 안면도 방포해변을 따라 드넓게 펼쳐진 모감주나무군락, 바람을 타고 이동한 모래언덕 태안 신두리해안사구 등은 그 자체로 자연이 빚어낸 신비함을 여실히 느낄 수 있다. 바다가 준 선물, 석양빛에 물든 그곳에서 자연을 즐겨본다.

 

 

- 안면도 꽃지 할미 할아비 바위
천년의 사랑을 간직한

 

 

약 1200년 전 통일신라. 장보고는 안면도에 전략적 전진기지를 설치하고 이곳에 승언장군을 파견한다. 승언장군에겐 ‘미도’라는 부인이 있었는데, 두 사람은 금슬이 좋았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장보고의 명령으로 승언장군은 군선을 이끌고 북쪽으로 진군한다. 그 후 여러 달이 지나도 아무런 소식이 없자 미도부인은 바닷가 높은 바위에 올라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남편 승언장군을 애타게 기다린다. 그러기를 수십 년, 승언장군은 끝끝내 돌아오지 않고, 결국 미도부인은 이 바위에서 죽고 만다. 이후 어느 날 밤 갑자기 폭풍우가 휘몰아치고 천둥소리가 들리더니 미도부인이 죽은 바위 옆에 큰 바위가 우뚝 솟았다고 한다. 이때부터 미도부인이 죽은 바위를 할미 바위, 그 옆에 우뚝 솟은 바위를 할아비 바위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안면도 꽃지 할미 할아비 바위 전설

 

 

슬픈 사랑이야기를 간직한 안면도 꽃지 할미 할아비 바위(명승 제69호). 이 바위섬은 안면도 꽃지해변 앞바다에 두둥실 떠있다. 왼쪽에 비교적 작은 것이 할미 바위, 오른쪽이 할아비 바위다.
닿을 듯 말 듯 해변에서 가까운 할미 할아비 바위는 물이 빠졌을 때 육지로 변한다. 이때는 바로 앞까지 걸어갈 수 있다. 이 걸어가는 길에는 이색적인 광경도 볼 수 있다. 길을 따라 늘어선 해산물 좌판이 그것이다. 좌판에서는 할머니들이 산낙지와 해삼, 개불, 멍게 등을 판매하는데, 즉석에서 먹기 좋게 손질해준다. 목욕탕 의자에 쪼그리고 앉아 꿈틀꿈틀 살아 움직이는 산낙지를 초장에 찍어 먹어본다. 할미 할아비 바위의 멋진 풍경에 더해 이곳만의 특별한 맛이 입안을 감싼다.
좌판을 지나면 먼저 할미 바위가 보인다. 깎아내린 짙은 황갈색 절벽, 그 절벽에 드문드문 솟아 있는 소나무 몇 그루. 소나무는 어떻게 저 단단하고 척박한 바위를 뚫고 나와 자란 걸까. 그저 신기할 따름이다. 할아비 바위는 할미 바위보다 두세 배가량 크다. 또 할미 바위와 달리 소나무가 빼곡하다. 할미 바위가 비움의 소박함이라면 할아비 바위는 채움의 웅장함이 느껴진다.
해가 어슴푸레 질 무렵이면, 멀리 나갔던 바닷물이 서서히 들어온다. 할미 할아비 바위를 구경 온 사람과, 그 사람들에게 해산물 팔던 할머니들은 바닷물에 밀려 뭍으로 나온다. 육지로나마 이어졌던 할미 할아비 바위는 다시 떨어지게 되고, 활기차던 공간엔 어느새 쓸쓸함만 남는다.
태양이 바다와 가까워질 때쯤, 따사로이 빛나던 할미 할아비 바위는 모든 색을 잃는다. 그 주변은 온통 붉은 노을로 물든다. 붉게 물든 바다와 그 바다에 외롭게 떠있는 검은 바위섬 두덩이. 바위섬 사이로 갈매기 몇 마리가 ‘푸드덕’ 날아오른다.

 


- 태안 안면도 모감주나무군락
걷는 길 사이사이 싱그러움 가득

 

 

꽃지해변에서‘꽃다리’를 건너면 바로 한적하고 조용한 항구가 보인다. 방포항이다. 이 방포항에서 나오는 수산물은 뒤편에 있는 방포수산시장에서 유통된다. 방포수산시장에서는 안면도 특산물인 싱싱한 대하와 꽃게 등을 맛볼 수 있다. 배불리 먹고 방포수산시장 뒤로 나오면 빼곡한 나무숲에 놀라게 된다. 이곳이 바로 태안 안면도 모감주나무군락(천연기념물 제138호)이다.
중국에서 바닷물을 타고 밀려와 싹이 튼 것이라고도 하고, 중국 어부가 고기잡이 나왔다가 심었다고도 하는 안면도 모감주나무군락. 지리적으로 바다와 마을 사이에 위치한 이 나무숲은 예로부터 바람막이 역할을 했다고 한다.
이것이 가능했던 건 그 규모 덕분이다. 안면도 모감주나무군락은 길이 120m, 중간부분 너비 약 15m로, 그 면적이 9567㎡에 달한다. 이곳에 자라는 모감주나무만 무려 400~500그루다. 이 때문에 안면도 모감주나무군락은 학술적인 자료로도 그 가치를 높게 인정받는다. 경기도나 경상도 일부에서도 모감주나무가 분포하고는 있으나, 이곳처럼 넓은 면적에 군락을 형성한 곳은 없다고 한다.
모감주나무 따라 걷는 길은 연인이나 가족과 함께하는 산책코스로도 제격이다. 특히 노란 꽃이 흐드러지게 피는 7월에는 걷는 길 사이사이 싱그러움이 가득하다. 또 가을에는 노랗게 물든 잎이 진풍경인데, 흔히 보는 은행나무 가로수 길과는 또 다른 매력이다.
모감주나무군락 끝자락에서 조금만 더 걸으면 방포 방파제에 다다른다. 이왕 산책길에 나섰다면 방포 방파제를 따라 끝까지 걸어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방파제 끝에 서면 저 멀리 외로이 선 등대와 끝없이 펼쳐진 바다가 보인다. 그 바다 건너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제법 시원하다. 넋을 잃을 것 같은 자연의 위대함, 바닷바람에 잠시 몸을 맡겨본다.

 


- 안면도 조각공원
인간과 자연이 공존하는

 

안면도 조각공원은 ‘2002 안면도 국제꽃박람회’ 개최를 기념하며 조성했다. 입구에 들어설 때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건 전병삼 작가의 ‘꿈꾸는 시내버스-꼬마 J의 꿈’이다. 이 작품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수직으로 세운 오래된 버스 꼭대기에 ‘꼬마 J’가 앉아 있다. 오래된 버스는 담쟁이덩굴이 감싸고 있는데, 이 덕에 작품은 계절에 따라 다른 느낌을 준다. 여름에는 푸르른 담쟁이덩굴이 버스를 휘감아 싱그러운 분위기를 내뿜고, 가을, 겨울에는 앙상한 가지만 남아 쓸쓸한 느낌을 준다. 인간이 만들어 낸 버스와, 그 버스를 감싸는 담쟁이덩굴, 그리고 그버스에 올라타 있는 ‘꼬마 J’. 인간과 자연과 문명이 공존하는 이 작품은 우리 사회를 축소해 보여주는 듯하다. 버스 꼭대기에서 어딘가를 바라
보는 ‘꼬마 J’는 어떤 꿈을 꾸고 있을까? 이처럼 조각공원에 있는 작품은 인간에 관한 성찰을 담고 있다. 작품을 살피며 천천히 공원을 걷다보면 자연히 사색에 잠긴다.
조각 작품을 둘러본 후에는 지그재그 산책길을 따라 조각공원 정상에 오른다. 5분 정도면 바로 정상에 다다르는데, 그곳에 서면 안면도 서편 전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산줄기를 따라 오밀조밀 모여 있는 집, 마치 동화 속 한 장면 같다. 날씨가 좋을 때는 저 멀리 방포 앞바다에 떠 있는 등대도 어렴풋이 보인다. 안면도의 아름다운 자연과 예술을 동시에 느낄 수 있는 조각공원, 그곳에서 잠시 쉼표를 찍어본다.

 

 


- 태안 소근진성
산성에서 바라본 바닷가 마을

 

태안은 고려 말부터 왜구의 침탈이 심했다. 견디다 못한 고려는 공민왕 22년(1373) 결국 태안군을 폐군한다. 이후 세종 21년(1439) 조선 시대에 들어와서야 태안군수가 부임하고 새 객사를 짓는다. 그리고 중종 9년(1514) 왜구의 침입을 막고자 바닷가에 성을 쌓는다. 이때 쌓은 성이 바로 소근진성(충청남도 기념물 제93호)이다.
작고 조용한 바닷가 마을 소근리. 마을을 질러 조금만 걸으면 산길이 이어진다. 마을 뒷산에 오르는 길이다. 산은 그리 높지 않다. 천천히 걸어도 10분이면 정상이 보인다. 소근진성은 이 뒷산 정상 능선을 따라 길게 이어진 평산성(平山城)이다. 서벽은 성 내부가 서해에 면하고 있어 비교적 평탄하다. 동·남·북벽은 성외벽이 가파른 비탈이어서 자연지형을 이용해 해발 40~50m 능선 위에 축조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처음 소근진성을 축조할 당시 성 둘레는 2165척(약 670m)이고 높이는 11척(3.3m)이었다고 한다. 서해 방비에 전략적 요충지였던 소근진성은 이후 1894년 동학농민혁명 때 폐허가 됐다. 현재는 성벽 일부와 동문지 부근 110m가 남아 있다.
성벽에 올라 서쪽을 바라보면, 걸어왔던 소근리 마을과 바다가 보인다. 간조에는 드넓게 펼쳐진 갯벌이 한눈에 들어온다. 갯벌 위에 노니는 갈매기 떼도 보인다.
왔던 길을 되짚어 다시 소근리 마을로 내려온다.
간조에는 갯벌 가운데로 한 줄기 바닷물이 흐른다. 마을 주민들은 이 물줄기를 ‘바닷골’이라고 부른다. 물이 완전히 빠져도 이 바닷골은 마르지 않는다. 주민들은 바닷골에 배를 띄워 망둥어를 낚는다.
“예전에는 여기가 황금갯벌이었어. 해산물이 얼마나 풍부했다고. 그러다가 저기를 제방으로 막으면서 수확량이 확 줄었지. 그때부터는 그냥 근근이 먹고 사는 거야.”
갯벌을 바라보던 어르신이 다시 망둥어 잡이 배 위에 올라탄다. 작고 평온하게만 보였던 소근리 마을. 간간히 한숨이 섞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