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여행길 13 - 뜨겁게 뛰는 애국지사의 심장을 찾아

이산저산구름 2015. 1. 27. 10:46

 

애국지사 숨결을 따라 떠나기 전, ‘만약 내가’로 시작하는 몇 가지 가정을 세워 본다. 만약 내가 일제강점기를 살았더라면 어떤 생각으로 어떻게 행동했을까. 일본을 대하는 태도는 어땠을까. 잠깐의 아첨으로, 나와 내 가족이 편안하게 살 수 있다면, 그 길을 선택하지는 않았을지…. 가정을 더 좁혀 본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기 전, 3·1운동을 함께하자는 제안을 받는다면? 그런데 3·1운동에 참여해 나와 내 가족이 위험해질지도 모른다면 어떠한 결정을 내릴 것인가? 이런 가정으로 시작한 여행은 감사함으로 끝이 난다. 특별한 경관이 마음을 사로잡는 여행길은 아니지만, 그 어느 곳보다 가슴 뭉클해지는 여정이다.

 


- 예산 윤봉길 의사 유적
윤봉길 의사의 시계는 아직도 멈추지 않았다

 

 

한 손에는 폭탄을, 한 손에는 권총을 들고 가슴에는 1932년 4월 26일 한인애국단에 입단할 때 쓴 선언문을 품고, 태극기 앞에서 웃고 있는 한 청년의 모습. 어떻게 보면 무표정인 듯하지만 자세히 보면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1932년 4월 29일, 중국 상하이 훙커우 공원에서는 일본 천왕의 생일연과 상하이 점령 전승 기념행사가 있었다. 물통과 도시락으로 위장한 폭탄을 들고 기념행사에 참여한 윤봉길 의사는 물통 폭탄을 힘껏 던져 축하식장을 폭파했다. 도시락 폭탄으로 자결하려던 계획은 실행하지 못하고 일본 경찰에 체포돼 그해 스물다섯 나이로 순국했다. 스물다섯 윤봉길 의사가 짊어진 짐은 얼마나 무거운 것이었을까.
윤봉길 의사의 흔적을 더듬어 예산 윤봉길 의사 유적(사적 제229호)을 찾았다. 먼저 윤봉길 의사 기념관으로 향한다. 기념관에 들어가면서부터 질문을 하나 받는다. ‘당신의 심장은 무엇을 위해 뛰고 있습니까?’ 윤봉길 의사의 삶은 나 자신을 위해, 혹은 가족을 위해, 혹은 주위 사람을 위해 사는 삶보다 더 넓고 깊은 것이었다. 나라와 겨레를 위한 삶. 윤봉길 의사가 추구하는 삶 속에 나와 내 가족, 주위사람을 위하는 마음이 모두 있었다.

전시는 연보 순으로 진행된다. 천천히 걷다 보면 윤봉길 의사 생애를 느낄 수 있다. 윤봉길 의사는 우리에게 훙커우 공원에서의 의거로 친숙하지만, 중국으로 건너가기 전, 농민운동에 힘썼다. 그러다 중국으로 망명한 것이 1931년이다. 윤봉길 의사는 백범 김구 선생을 찾아가 독립운동에 헌신하고자 하는 마음을 밝혔다. 기념관 한쪽에 놓인 백범 김구 선생과 윤봉길 의사의 밀랍인형이 그 시절을 떠오르게 한다. 기념관에서 가장 오래 머무르게 되는 곳은 윤봉길 의사 유품(보물 제568호)을 전시한 곳이다. 윤봉길 의사가 몸에 지녔던 물품들에서 결의가 엿보인다. 회중시계(보물 제568-3호)는 1932년 4월 29일 백범 김구 선생과 작별할 때 정표로 바꾸어 가진 것으로, 윤봉길 의사 순국 후에 일본 정부가 보내왔다. 백범 김구 선생은 《백범일지》에서 회중시계를 나누어 가진 때를 <윤군은 자기 시계를 꺼내어 나를 주며 내 시계와 상환하기를 요하면서 ‘자기 시계는 작일 선서식 후에 선생 말씀에 의하여 6원을 주고 매입한 것인데 선생님 시계는 2원짜리인즉 나에게는 1시간밖에 소용이 없습니다.’ 나는 기념품으로 받고 내 시계를 주었다.>라고 기록했다. 누렇게 바랜 피 묻은 손수건(보물 568-6호)은 윤봉길 의사가 순국할 때까지 사용한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감동적인 손수건 한장이다.
기념관에서 나와 충의사(사적 제229호)로 향한다. 충의사는 사당으로, 윤봉길 의사의 영정을 봉안한 곳이다. 이곳에 걸린 영정은 길 건너편 쪽을 향한다. 길 건너에는 1908년 윤봉길 의사가 태어나 네 살 때까지 성장한 광현당, 농촌부흥운동을 위해 만든 부흥원(사적 제229호), 네 살 때부터 중국으로 망명할 때까지 민족운동을 하던 저한당이 있다.
걸음을 바삐 해 길을 건너 저한당으로 향한다. 저한당 가기 전, 주먹을 쥐어 올린 윤봉길 의사의 동상이 눈길을 끈다. 태극기 앞에서 찍은 사진처럼, 담담하고도 힘 있는 모습이다. 저한당(狙韓堂)은 어려운 한국을 건져낼 집이란 뜻이다. 이름에 독립을 향한 의지가 담겼다. 내를 건너 도착한 광현당, 부흥원은 윤봉길 의사가 후에 도중도(島中島)라고 이름 지은 곳에 있다. 사방이 내로 둘러싸인 이곳에서 윤봉길 선생이 태어났고, 농촌부흥운동을 했다. 일제의 손길이 닿지 않는 곳에서, 윤봉길 의사는 다가올 조국의 미래를 준비했다. 저한당, 광현당, 부흥원 모두 크기가 크지 않은 초가집이다. 복원한 것이라 옛 느낌을 찾을 수는 없지만, 윤봉길 의사가 나고 자란 곳이라는 사실만으로 특별한 기운이 감돈다.

 


- 김좌진장군생가지
청산리대첩의 기개 곳곳에

 

 

청산리대첩을 이끈 김좌진 장군. 장군이라는 말이 벅차다. 1920년, 김좌진 장군은 북로 군정서의 2500명 독립군을 이끌고, 만주 청산리에서 5만명의 일본군을 대파했다. 임시정부의 기록에 따르면 일본군 전사자가 1200여 명, 부상자가 2100여 명이었고 독립군 전사자는 130여 명, 부상자는 220여 명이었다고 한다. 이후 김좌진 장군은 1925년 북만주 지역 독립운동단체를 통합한 신민부의 군사부위원장을 맡았고 1927년에는 중앙집행위원장이 되어 신민부의 군정파를 이끌었다. 1929년, 영안현에서 한족총연합회를 조직해 중앙집행위원장으로 활동하다, 1930년 공산주의자 박상실에게 목숨을 잃었다. 죽기 전에 “할 일이… 할 일이 너무도 많은 이때에 내가 죽어야 하다니. 그게 한스러워서….”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김좌진 장군은 어린 시절부터 장군답게 호방했다. 열여섯 되는 해, 집안의 노비문서를 태우고 노비들을 해방한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김좌진장군생가지(충청남도 기념물 제76호)에서 김좌진 장군의 어린 시절을 유추해 본다. 김좌진 장군은 1889년, 충남 홍성군 갈산면 행산리에서 태어났다. 집안의 노비가 서른 명이었고, 넓은 기와집에서 불편함 없이 자랐다. 복원한 생가 곳곳에 유복하게 자란 김좌진 장군의 어린 시절이 묻어난다. 마당 한쪽에는 우물이 있고, 장독대가 있다. 담벼락 한 편에 멍석을 걸어 두어, 보는 재미가 있다. 부엌 옆에는 장작까지 두었다. 밖에는 마구간이 있는데, 마구간에 서 있는 흰 말을 보고는 잠깐 움찔하게 된다.
김좌진 장군 기념관에 들어서자마자 김좌진 장군 동상이 반긴다. 가만히 있어도 표정으로 적을 제압했을 것 같은 카리스마가 느껴진다. 기념관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것도 김좌진 장군의 얼굴, 청산리대첩에서 승리한 후에 찍은 사진이다. 한쪽 다리를 올리고 의자에 앉은 모습에서 전쟁에서 승리한 장
군의 호연지기가 엿보인다. 전시된 총과 칼은 독립군이 썼던 것으로, 가만히 들여다보면 청산리 대첩이 머릿속에 생생하게 그려진다.
김좌진장군생가지 근처에서 시간을 보내기 가장 좋은 곳은 백야공원이다. 김좌진 장군의 아호를 따서 만든 이름이 다. 작은 담장처럼 늘어선 구조물들에 김좌진 장군의 생애를 전시했다. 백야공원은 어린아이들이 뛰어 놀기 좋다.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잠시 여유로운 시간을 보낼 수 있다. 벤치에 잠깐 누워 봐도 괜찮다. 김좌진 장군이 바라봤던 하늘과 다르지 않을 하늘이다.
사당으로 가는 길에 김좌진 장군의 동상들이 보인다. 어린 시절 모습에서부터 장군의 모습까지 다양하게 꾸몄다. 김좌진 장군의 사당에 향을 피우고 짧게 묵념한다. 사당을 나와 삼문에 잠시 선다. 시원하게 불어오는 바람이 반갑다. 긴 바람 한 줄기에 김좌진 장군의 숨결이 실린 듯하다.

 


- 한용운선생생가지
‘님’에 바친 생애의 흔적

 

 

‘님은 갔습니다. 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한용운 선생의 <님의 침묵> 한 구절을 읊지 못하는 이가 있을까. 학교 수업 시간에 <님의 침묵>에서 ‘님’의 상징에 대해 귀에 딱지가 앉을 만큼 들었을 것이다. 한용운 선생의 생을 살펴봤을때 ‘님’은 연인을 넘어, 절대자, 조국 등으로 해석된다. 한용운선생생가지(충청남도 기념물 제75호)에서는 ‘님’의 상징을 모두 찾을 수 있다. 독립운동가이자 승려이며 시인인 한용운 선생의 흔적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1879년, 한용운 선생은 충남 홍성군 결성면 성곡리에서 태어났다. 김좌진장군생가지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다. 한용운 선생이 김좌진 장군보다 10년 먼저 태어났다. 좁은 지역에 이름난 독립운동가가 둘이나 난것을 보면, 홍성에 무언가 특별하게 서린 기운이 있나 싶다. 한용운 선생 생가지를 조금 벗어난 곳에, 넓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리 좁지도 않은 들판이 펼쳐져 있다. 아마도 한용운 선생은 그곳을 맘속에 담으며 꿈을 키웠을 것이다.

한용운 선생은 어린 시절부터 신동 소리를 듣고 자랐다. 만해문학체험관에서 영상으로 어린시절 한용운 선생을 짐작한다. 영상은 화면 앞 의자에 앉기만 하면 저절로 재생된다. 만해문학체험관 곳곳에 선생에 관한 이해를 돕는 영상이 있다. 한용운 선생 인형, 시, 발간한 책 등 전시품들 사이에 《님의 침묵》 초판본이 눈에 띈다. 초판본은 1926년에 발행됐다. 우리에게 친숙한 <님의 침묵>이지만, 초판본을 직접 보니 감회가 새롭다.
한용운선생생가지에 복원한 생가는 단출한 초가집이다. 복원한 초가집에 남은 옛 모습은 없지만, 주변의 꽃나무들과 어울려 소박하니 멋스럽다. 단출한 초가집에서 태어난 한용운 선생은 큰 뜻을 품어 우리 근대사에 한 획을 그었다. 그 여정은 집을 나서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한용운 선생은 동학농민혁명과 의병운동을 지켜보다 1896년에 집을 나섰고 1905년, 백담사에 들어갔다. 승려가 된 후, 불교계 혁신을 주장했다. 1918년에 창간한 불교잡지 《유심》에 한용운 선생의 사상이 잘 드러난다. 한용운 선생은 《유심》으로 불교 대중화를 꾀했고, 우리 민족에게 민족정통성을 심어주고자 했다. 만해문학체험관에서 《유심》 창간호를 볼 수 있다. 1919년 3·1운동에 주도적으로 참여해 유죄판결을 받고 감옥에서 나온 후에도 한용운 선생은 독립을 위해 목소리 내는 것에 거리낌이 없었다. 1921년 출옥해, 오세암에 들어가 <님의 침묵>을 탈고한 때가 1925년이다.
한용운 선생의 생애를 따라, 만해문학체험관에서 생가지로 발걸음을 옮겼다가 다시 향하는 곳은 만해사라고 하는 사당이다. 한용운 선생의 조국을, 민족을 위했던 발자취가 후세에 길이 남았다. 그토록 바라던 조국의 독립을 목전에 두고 1944년 한용운 선생은 눈을 감는다. 그 안타까운 마음을 담아 한용운 선생 영정 밑에 바치는 향이 끊이지 않기를 소망해 본다.
한용운선생생가지를 기점으로 왼편에 만해사가, 오른편에는 민족시비공원이 있다. 민족시비공원에는 한용운선생을 비롯해 민족시인 20인의 시비가 산책길을 따라 서 있다. 시를 읽으며 산책하기 좋다.

 


- 독립기념관, 천안 유관순 열사 유적
천안에서 만나는 독립에의 뜨거운 열망

 

독립을 향한 애국지사들의 열망으로 우리는 나라를 되찾았고 그들의 이야기는 여러 기록으로 남아 유산이 되었다. 1987년 8월 15일 천안에 건립한 독립기념관은, 일본의 역사교과서 왜곡 사건을 계기로 일어난 국민성금 모금과 역사자료 기증 운동을 바탕으로 만든 곳으로, 우리에게 소중한 또 하나의 유산이다.
독립기념관 중앙에 크게 자리한 겨레의 집은 독립기념관의 상징 건물이다. 입구에서부터 곧게 난 큰길을 따라 걸어, 바로 보이는 것이 겨레의 집이다. 겨레의 집은 수덕사 대웅전을 본떠 설계한 한식 맞배지붕 건물로, 동양 최대의 기와집이다.
7개 전시관은 겨레의 집 뒤에 있다. 7개 전시관에 우리 겨레의 5천 년 역사를 담았다. 전시관에서 태극기를 여러 장 볼 수 있는데, 각각 태극기마다 다른 사연이 실렸다. 제4전시관에 전시된 태극기 목판(등록문화재 제385호)은 태극기를 찍어내기 위해 태극기를 목판에 새긴 것으로 일제강점기에 태극기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보여준다. 제5전시관에서는 한국광복군 서명문 태극기(등록문화재 제389호)를 볼 수 있다. 태극기 바탕에 빼곡하게 결의를 다지는 글귀가 적혀 있다. 제6전시관에서도 태극기를 볼수 있는데, 대한민국임시의정원 태극기(등록문화재 제395호)다. 독립기념관 곳곳에 걸린 지금의 태극기와 비교해 보면 재밌다.
태극기를 들고 만세를 외쳤던 유관순 열사의 흔적도 천안에서 찾을 수 있다. 천안 유관순 열사 유적(사적 제230호)이 생가지와 사적지에 남았다. 유관순 열사의 생가는 1919년 4월 1일, 아우내 만세운동 당시 일본관헌들이 불태웠다. 그리고 빈터만 남아 있던 것을 1991년, 복원했다. 복원한 초가집 옆에 유관순 열사가 다녔던 매봉교회가 있다.
매봉교회 역시 1919년 이후 일제의 핍박을 받아 1923년, 폐쇄되었다가 1967년에 다시 세웠고 지금의 건물은 1998년에 새로 지은 것이다.

 


근처의 유관순열사 기념관에서 유관순 열사의 삶을 더 생생히 느낄 수 있다. 유관순열사 기념관에서는 유관순 열사의 사진, 수형자 기록표, 호적등본, 재판기록문 등 관련 전시물, 아우내 만세운동을 재현한 디오라마, 재판과정 매직비전 등을 볼 수 있다. 어린 아이들도 유관순 열사가 어떤 인물인지 알 수 있도록 쉽고 재미있게 구성했다. 서대문형무소 벽관체험코너에서는 좁고 낮은 벽관 속에 직접 들어가 볼 수 있다.
벽관 속에 들어가, 유관순 열사가 그곳에서 어떤 생각을 했을지 생각해 본다. 일본 순사가 앙칼지게 외치는 소리가 귓전을 때린다. 깜짝 놀라 벽관 밖으로 급히 빠져 나온다. 모진 고문에도 굴하지 않았던 유관순 열사의 마음은 아무리 눈을 감고 생각해 봐도 절대 헤아릴 수 없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