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여행길 12 - 문학 향기 따라가는 발자국

이산저산구름 2015. 1. 13. 10:42

 

삶이 여행이고, 여행이 삶이라는 말이 있다. 삶이 그만큼 특별하고 그 특별함이 일상이라는 뜻이다. 여기 이 의미를 그들의 언어로 들려주는 이들이 있다. 우리는 이들을 시인이라고 부른다. 이들의 시어는 우리가 쓰는 일상어와 크게 다를 것이 없다. 일상어에 특별함을 얹었을 뿐이다. 시인은 언어에 박동을 불어넣고, 언어 속에 뜻을 묘하게 숨겨 넣었다. 이렇게 특별함을 입은 시는 시인의 펜끝을 떠나는 순간, 스스로 생명을 지녀 우리에게 다가온다. 시를 읽으면 왠지 모를 감동에 휩싸인다. 하지만 그 뜻을 일상어로 풀면 또 별것 아닌 것이 되기도 한다. 말을 조금 더 바꿔 보자. 시가 일상이고, 일상이 시다. 그리고 시가 여행이고 여행이 시다.

 


- 옥천 정지용 생가와 문학관
시인의 고향을 향수하는 곳

 

정지용 문학관 앞에서 만난 이에게 정지용의 시 <향수>를 아느냐고 물었다. 그이는 <향수>를 모르는 사람이 있느냐며 <향수>로 노랫말을 붙인 가곡을 불러 보인다. “이 앞에 흐르는 물이 <향수>에 나오는 실개천이에요.”
정지용 시인이 <향수>에서 ‘실개천’으로 지칭한 곳이 이곳인지는 알 수 없다. 그저, 정지용 시인 마음속에 포근함을 주는 냇물 이미지를 ‘실개천’이라고 표현했을지도 모른다. 어찌 됐든 정지용 시인이 나고 자란 옥천에 사는 사람들은 정지용 문학관, 정지용 시인 생가 앞에 흐르는 냇물을 시 에 등장한 ‘실개천’이라고 믿는다. 이렇게 이들은 자신의 고향에 정지용 시인을 겹쳐 그린다.
물이 거의 바닥을 드러냈고 천변에 주택들이 늘어섰다. 정지용 시인이 살았던 때와 비교해 그 모습이 많이 변했겠지만, 지금 풍경으로도 정지용 시인이 <향수>에서 그린 고향을 떠올리는 것이 그리 어렵지는 않다.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 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 정지용 <향수> 中 -

 

정지용 문학관에 들어가자마자 바로, 실물 크기인 듯한 정지용 시인 밀랍인형이 의자에 앉아 있다. 여느 문학관과 다름없이 정지용 문학관에도 여러 전시품과 함께 시인의 생애가 펼쳐져 있다. 또 여느 문학관과 다름없이, 시인의 초판본 시집들이 주요 전시품이다. 한 가지, 정지용 문학관이 흥미로운 점은 오락적 요소를 지녔다는 점이다. 정지용 시인의 시를 단순히 이해하는 데 그치지 않고, 체험할 수 있어 재미있다. 특히 시낭송실에서 특별한 체험을 할 수 있다. 마치 노래방 같은 시낭송실에서, 배경음악과 함께 영상으로 시를 보며 마이크를 사용해 낭송하면 된다. 낭송한 시는 테이프에 녹음해 가져갈 수 있다.
정지용 시인은 1902년 충북 옥천군 옥천읍 하계리에서 태어났다. 정지용 시인 생가지에 소담스러운 초가집을 복원했다. 약상을 경영한 아버지 덕분에 경제적으로 여유롭게 지내다, 어느 여름 홍수로 집과 재산을 잃고 어려운 생활을 했다고 전한다.
정지용 시인이 처음 발표한 작품은 1919년에 발표한 소설 <3인>이다. 그리고 이 작품은 정지용 시인의 유일한 소설이 되었다. 1930년, 정지용 시인은 시문학 동인으로 활동하며 시단에서 중요한 위치에 선다. <호수1>과 <유리창1>은 <향수>와 함께 정지용 시인의 대표작이다. 정지용 시인은 특히 시어 구사에 탁월한 감각을 지녔다. 같은 시대에 활동한 김기림 시인이 정지용 시인을 두고 “한국의 현대시가 지용에서 비롯되었다.”라고 말할 정도였다.
광복 이후 정지용 시인은 거의 시를 쓰지 못했다. 좌·우익의 대립으로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정지용 시인은 방황했다. 그리고 6·25전쟁 중 납북된 정지용 시인은 북한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가 언제, 어디서, 어떻게 눈을 감았는지는 확인할 수 없다.
순수서정시, 가톨릭 신앙에 바탕을 둔 시, 산수시 등 정지용 시인의 시 세계를 설명하는 낱말은 다양하지만, 그가 나고 자란 옥천에서 <향수>를 먼저 떠올리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옥천은 향수 어린 정지용 시인의 고향이었다. 그리고 그 고향에 사는 사람들 역시 <향수>를 품고 있다. 옥천 곳곳에 정지용 시인을 추억하는 흔적이 남았다. 식당을 홍보하는 현수막이나, 가게 벽면에 걸린 정지용 시인의 시를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 보은 오장환 문학관
전통과 낡은 관습을 거부한 생애

 

 

“조용하고 말이 없는 소년.”
1927년, 동네에서 오장환 시인과 함께 학교에 다녔던 최영성 할아버지는 시인을 그렇게 표현했다. 보은 오장환 문학관에는 어린 시절 잠깐 동네에 살았던 시인에 관한 묘사와 이야기를 곳곳에서 볼 수 있다. 임선빈 오장환 문학관 문화해설사가 보여준 그의 어린 시절 기록 중에는 초등학교 성적표도 있었다. “시인인데…, 국어 점수가 별로 좋지는 않네요?”라고 묻자 하나씩 설명한다.
“당시에는 조선어와 일본어로 국어가 나뉘었어요. 조선어 점수가 일본어보다는 좋네요. 그런데 찬찬히 살펴보면, 공부를 썩 잘하신 편은 아니었네요? (웃음)”
오장환 시인은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동네에서는 오장환 시인의 집을 ‘오부자집’으로 불렀다. 오부자집 셋째 아들은 보통학교 3학년에 안성으로 전학해 이후 휘문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한다. 이 학교에서 오장환 시인은 정지용 시인을 만난다. 정지용 시인은 휘문고등보통학교 출신의 졸업시기를 물을 때 반드시 오장환을 중심으로 전후를 가릴 정도로 오장환 시인을 특별히 아꼈다.
오장환 시인은 정지용 시인의 영향을 많이 받았으며, 시에도 여러 군데 스승에게 배운 어휘나 기법이 나타난다.

오장환 시인은 정지용 시인에게 시를 배우며 문예반 활동으로 교지를 만든다. 문예반에서 만든 교지 《휘문》은 1933년 2월 22일에 처음 발간했는데, 임시호에 오장환 시인의 첫 작품인 <아침>과 <화염>이라는 시 두 편이 실렸다. 데뷔 초기엔 동시를 많이 발표했다. 조선일보에 동시를 연속 게재하는가 하면, 방정환이 창간한 《어린이》에도 동시를 발표하곤 했다. 동시에서 순수하고 밝은 모습을 보여준 오장환 시인은 산문이나 시에서 전통 및 낡은 관습에 관한 거부반응을 여실히 드러냈다. <헌사>, <매음부>, <성벽> 등이 그것이다. 이후 오장환 시인은 활발한 문학운동을 하다 1946년에 월북한다.
오장환 시인은 서정주 시인, 이용악 시인과 함께 1930년대 시단의 3대 천재로 인정받았으나 월북 작가라는 꼬리표 때문에 널리 알려지지 못했다. 이후 1988년 월북 문인 해금조치가 이루어진 후부터 오장환의 문학 세계와 그의 작품과 관련한 것들이 연구되고 발견되었다. 이후 2006년, 오장환 시인에 관한 자료와 작품으로 오장환 문학관을 열었다. 문학관 바로 옆에는 오장환 시인 생가를 복원해 두었다. 생가 툇마루에 앉아 시인이 바라보았을 하늘을 바라보는 건 가을과 겨울이 좋겠다. 한동안 잊힌 시인이었지만 그 발자취를 충북 보은에서 따라가 볼 수 있다.

 


- 오장환 시인을 따라 걷는 보은 문화재 여행
보은 회인 사직단(충청북도 기념물 제157호) ▶ 보은 회인동헌 내아(충청북도 문화재자료 제71호) ▶ 보은 회인 인산객사(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16호) ▶ 느티나무 보호수

 

오장환 시인의 생가인 충북 보은군 회인면은 피반령이 둘러싼 동네였다. 피반령은 보은군 회인면 오동리에서 청원군 가덕면으로 넘어가는 고개다. 해발 360m에 지나지 않지만, 험준한 고개로 알려졌다. 2007년 12월 고개 밑에 터널을 뚫고 상주~청원을 잇는 고속도로가 개통되었다.
오장환 문학관 앞으로는 피반령 고개, 뒤로는 사직단이 놓였다. 오장환 문학관 오른쪽에 있는 마을회관 쪽으로 오르면, 아직도 정월 초사흗날이면 제를 지내는 커다란 사직단이 있다. 중앙 2구 윤정식 이장은 “마을의 지금 이름은 회인면 중앙 2구지만, 마을 사람끼리는 사직골, 사동마을이라고 부른다.”라고 말한다. 마을에 있는 사직단 때문에 이름이 붙은 것이다. 마을 사람 모두 신성시하며 함부로 오르지 못했을 사직단이지만, 호기심 많은 어린 소년이었다면 오르내리며 범상치 않은 기운을 받았을지도 모른다. 사직단으로 오르는 길은 시인의 생가 바로 뒤에 있다. 시인이 올랐을 길이라 생각하며 하나둘 계단을 밟았다.
계단을 내려와 오장환 시인이 3학년까지 다녔다는 회인초등학교로 걸음을 돌린다. 회인초등학교는 1906년 4월에 김두석을 중심으로 한 유지의 발기로 사립 진명학교로 설립됐다. 백 년 역사를 자랑하는 학교는 옛 모습은 남아 있지 않지만, 학교 담장 너머로 진기한 구경을 할 수 있다.

빼꼼 고개를 내밀고 바라보면 보은 회인동헌 내아(충청북도 문화재자료 제71호)를 볼 수 있다. 회인 지역은 조선 태종 13년(1413)에 현으로 삼고 현감이 부임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그래서 이때부터 내아가 있었을 것으로 추측하지만, 정확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동헌은 수령이 정무를 수행하는 공적 공간이라면 내아는 사적인 공간이기에 일반적으로 관아 입구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곳에 있다. 고을 수령 등이 정무를 집행하던 건물은 현재 교회 자리에 있었으나 1952년 경에 교회가 매각해 철거되었다. 그래도 내아는 남았다. 내아는 소유자가 거주하는 과정에서 부분적인 수리를 했으나 내부가구와 지붕 등에 사용된 원 부재가 남았다.
현을 다스리는 현감의 집을 둘러본 후에 손님이 오면 내주던 객사로 향한다. 보은 회인 인산객사(충청북도 유형문화제 제116호)는 조선 시대 중앙 관리가 파견되거나 외국에서 사신이 올 때 잠시 머물 수 있도록 시설해 놓은 곳이다. 1983년에 수리하였는데 이때 발견된 문서에는 효종 6년(1655)에 새로 지어지고, 순조 3년(1803)에 고쳤다는 기록과 ‘인산객사’라는 이름이 보인다.
인산객사까지 둘러본 후 마을을 지키는 느티나무 아래 앉았다. 380년 동안 이 자리에 있던 느티나무는 오장환 시인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까, 답 없을 물음을 던지며 걸음걸음 둘러본 보은군 회인면을 찬찬히 되짚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