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시인 윌리엄스(W.C Williams)는 “강은 어디에선가 시작되어야 한다. 강의 시작은 모든곳의 시작을 의미한다.”라고 말했다. 어느 나라든 인간은 강가에 모여 살았으며, 도시는 강에 기대어 형성됐고, 유지됐다. 인간이 만든 역사는 끊임없이 변화했다. 세월의 흐름은 모든 것을 바꾸었지만, 강은 인간이 물길을 막지 않는 이상 늘 변함없이 흘렀다.
강 주변엔 사람이 모였고, 모인 사람은 강 건너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다리가 만들어지기 전, 강 건너는 언제나 신비의 세계였다. 멈출 줄 모르는 물줄기를 하염없이 바라보며 사람들은 강을 건널 방법을 하나씩 생각해 냈을 것이다. 얕은 강을 찾아 건너다가, 강 위에 쉽게 움직일 수 있는 돌을 놓아 건너기도 하다가 누군가 묘안을 발견했고, 그것이 다리였을 것이다. 지금도 그 다리는 계속 진화중이다. 다리는 ‘건넌다.’라는 본래 목적에 충실하면서도 도시 경관 전체를 좌우하는 중요한 예술적 가치를 지닌 상징물로 대접받는다.
다리를 놓는 일이 지금처럼 그리 쉽지 않았을 때, 다리는 절실함이 만들어낸 결과물이었을 것이다. 자연에서 찾아낸 돌을 잘 다듬거나 잘 쌓아올린 그 다리가 수백 년의 시간을 뛰어넘어 지금도 남아 있다. 엄청난 크기와 갖은 장식으로 조형미를 뽐내려는 지금 다리와는 전혀 다른 느낌으로 말이다. 아주 오래 전 그 다리를 지금 마주한다.
- 강경 미내다리
강과 함께 하다가 강을 바라보기만 한다
닿을 수 없었던 강 건너 경계를 닿게 하는 것, 불가에서는 다리 놓는 것을 복의 씨를 뿌리는 여덟 가지 밭(福田) 가운데 하나로 친다. 강경 미내다리(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11호)는 조선 영조 4년(1728) 강경촌에 살던 송만운이라는 사람이 중심이 되어 황산의 유부업, 여산의 강명달·강지평이 재물을 모아 지은 것이다. 당시 미내다리는 충청도와 전라도를 연결하는 가장 큰 돌다리였다. 길이는 30m, 폭 2.8m, 높이 4.5m이며 석재는 화강암이다. 세 칸 무지개 모양으로 물이 흐르는 길을 만들고 그 위에 가지런하게 돌을 깔아 다리를 완성했다. 가운데 칸이 가장 커서 다리 상단 부분은 가운데가 볼록하게 올라왔으나 그 오름이 만든 경사가 그리 급하지 않고 겸손하다.
경상도, 충청도, 전라도 삼남 중 최고의 곡창이 전라도였다. 충청도는 삼남지방 가운데 서울과 가장 가까워 전라도의 물산이 충청도를 거쳐 서울로 올라가야 했기에 미내다리에는 수많은 사람이 지났을 것이다. 전라도에서 한양으로 과거시험을 치르러 먼 길 떠나던 선비도, 당시 명성을 떨치던 강경시장에 물건을 사러 오던 상인도 모두 이 다리를 건넜을 것이다.
일제강점기 수로정비에 따라 물길이 바뀌기 전까지 미내다리를 건너는 수많은 사람의 사연이 차곡차곡 쌓였다. 물길이 바뀐 후, 미내다리는 강경천을 마주 보고 있다. 강이 있어야 제 역할을 할 다리는 쓸모를 잃었다.
이후 제 모습을 잃고 남겨졌던 미내다리는 2003년 원래 있던 자리에 복원해 옛 모습을 찾았다.
다리가 놓였던 하천의 옛 이름을 ‘미하’라고 부른 데서 미내다리라고 불렀다는 전설과, ‘미내’라는 승려가 시주를 받아서 만들었다는 데서 그 이름이 연유하였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해만 바라보는 해바라기처럼 강경천 맞은편에 서서 흐르는 강줄기를 바라보는 미내다리가 쓸쓸함을 더한다.
- 논산 원목다리
남겨진 다리는 기록이 된다
다리는 그렇게 놓였다가 남겨진다. 남겨진 다리는 쓸모없는 것으로 되었다가 다시, 당시를 연구하는 자료가 된다. 원목다리는 미내다리에서 자동차로 17분 정도가 걸린다.
지금 가는 곳이 길인가 싶을 정도로 좁은 농로를 따라가면, 호남선 철길이 보인다. 그곳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철길 아래 놓인 다리가 보인다. 이 다리가 당시 전라도와 충청도의 경계 역할을 하던 원목다리다.
논산 원목다리(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10호)는 전체 길이 16m, 너비 2.4m, 높이 2.8m로 화강암 석재를 깎아 만들었다. 미내다리와 비슷한 모양으로 세 칸의 무지개 모양 홍예가 줄지어 섰다. 하늘로 오르지 못한 세 개의 무지개가 강가에 엮였다. 붙잡아 둔 것은 무지개만이 아니었다. 맨 꼭대기 종석 양 끝에 새긴 것은 용의 머리다. 승천하여 하늘에 닿고자 하는 마음을 담았다. 용과 무지개 모양이니 다리를 건너는 걸음걸음도 조심스러웠을 것이다. 무엇 하나라도 소중히 여기고, 신성시하며 아꼈던 그때의 지혜가 엿보인다.
원목다리는 한자로 ‘원향교(院項橋)’라 쓴다. 전라도와 충청도를 잇는 지리적 여건과 원향교의 ‘원(院)’이라는 한자의 쓰임 때문에 다리 근처에 길손이 쉬어가던 주막이 있었을 것으로 추측하기도 한다.
조선 시대 만든 다리로 정확히 그 시기가 언제인지는 기록에 없으나 강경 미내다리와 비슷한 시기에 생겼을 것으로 추측된다.
다리 앞에 놓인 대리석제의 원향교개건비문에는 광무 4년(1900)에 홍수로 파괴된 다리를 승려 4인이 기금을 내고, 민간인이 협조하여 다시 놓았다고 적혀 있다.
철길 아래 놓여 그 이질감이 원목다리 보는 재미를 더한다. 기찻길을 지나는 기차가 소리 내며 지나갈 때마다 원목다리 맨 꼭대기에 새긴 용머리가 부르르 떠는 것 같다. 환상의 동물이라던 용조차도 바로 눈앞에 기찻길이 생길 줄은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 옥천 청석교
‘고향’을 잃고 떠돌던 다리도 있다
기찻길 때문에 자리를 옮긴 다리도 있었다. 옥천 청석교(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21호)는 신라 문무왕(660년) 때 지금 군북면 증약리 경부선 철도가 지나는 지점에 놓았다. 일제강점기에 경부선 철도 가설공사가 한창일 때, 증약마을 입구로 옮겼다. 이후 계속된 수해피해로 2001년 4월, 장계국민관광단지로 이전했다.
청석교는 투박함이 가득했다. 커다란 돌을 하나씩 턱턱 올려놓은 듯 보이는데 위로 올라가 몇 번을 뛰어 봐도 흔들림 하나 없다. 물론 옮기면서도 이전처럼 튼튼하게 자리잡을 수 있도록 아귀를 맞춘 덕일 것이다.
다리의 높이 1.75m, 너비 2.2m, 길이 9.83m이다. 증약리 마을 사람들은 “어릴 적 이곳에서 잠을 자기도 했다.”라고 말한다. 양쪽 개울가를 돌로 쌓고, 개울 바닥에 널찍한 돌을 깐 후 사각형 돌기둥을 2개씩 세워 그 위에 넓고 긴 널돌을 얹어 바닥을 만든 구조다. 청석교를 누가 만들었는지 어떻게 세웠는지는 기록이 남은 것이 없지만, 전설처럼 내려오는 이야기는 하나 있다. 고려 시대 강감찬 장군이 경주 부윤으로 부임하는 길에 옥천을 지나다 날이 저물어 이곳에 머물렀다. 저문 달빛을 받으며 걸음걸음 옥천을 거닐던 장군에게 주민이 달려와 고한다.
“장군님! 장군님 이야기는 익히 들어 잘 알고 있습니다. 장군님 무력으로 이 극성스런 모기떼를 없앨 수는 없으신가요?”
강 장군이 청석교에 가보니 모기들이 극성맞게 떼를 지어 몰려다녔다. 득실대는 모기떼를 향해 강감찬 장군이 소리쳤다.
“이놈들아! 선량한 백성을 괴롭히지 말고, 당장 물러가거라!”
강 장군의 우렁찬 목소리가 마을 일대를 흔들었다. 그의 위상을 모기떼도 알았는지 그로부터 청석교 주변엔 모기 한 마리 볼 수 없었다는 이야기다.
그때는 그러했을지 모르겠지만, 다시 선 청석교에서 다리에 붙은 모기를 몇 마리나 떼어냈는지 모른다. 자리를 옮겨서인지, 강감찬 장군같이 위대한 인물이 없어서인지 올여름 모기떼는 기승을 부렸다.
장계국민관광지
청석교는 장계국민관광지 내에 자리했다. 옥천군 지역의 유물과 유품을 전시한 옥천향토자료전시관에서 각종 부족 유물과 탑신제당, 물레방아 등의 전시물을 구경하고, 향수 30리 길을 걷는다. 산책로에는 정지용 시인의 시를 곳곳에 담아 발길을 멈추게 한다. 눈길 돌리는 곳마다 자연과 어우러진 시인의 시와 나무, 앞으로 펼쳐진 대청호까지, 자연과 지금이 주는 선물이 절묘하게 어우러진 곳이다.
- 진천 농다리
울고 웃고 세월과 함께 숨 쉬던 다리
역사 속 위대한 인물은 세월 따라 흘러갔지만, 위대한 다리는 물 흐르는 곳에 아직 남았다. 진천 농다리(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28호)는 6·25 전쟁이 일어나던 해 큰 능구렁이 같은 울음소리를 내던 다리로 유명하다. 고려 때 축조되었다고 전해지는 돌다리는 당시 100m가 넘는 길이였다고 하나 지금은 길이 93.6m, 너비 3.6m, 두께 1.2m, 교각 사이의 폭 80cm 정도다. 농다리가 놓인 곳은 미호천이다. 1918년에 발간된 <조선지리자료>에는 ‘미호천의 발원지는 충북 음성군 삼성면과 경기 안성의 일죽면이며, 하구는 연기군 동면과 남면 사이로, 길이는 89.2km’라고 기록한다. 동진 또는 작천이었던 이름이 언제 미호천으로 바뀌었는지 정확하지는 않아도 충북 음성군 대소면의 미곡리와 삼호리에서 글자 한 자씩을 따 지은 것으로 보인다.
농다리는 석회를 바르지 않고, 자연석을 그대로 쌓았는데도 견고하여 장마가 져도 물이 다리 위로 넘어가 무사했다. 이러한 구조와 지혜 때문에 장마에 농다리 상판이 뜨면 나라에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날 예고라는 전설도 전해 온다.
진천 농다리가 천 년 세월을 버틴 것은 과학적으로도 완벽한 구조이기 때문이다. 사력 암질의 돌을 물고기 비늘처럼 차곡차곡 들여쌓기 하여 만들었다. 크기가 다른 돌을 적절히 배합해 서로 물리게 해 쌓은 다리는 물의 흐름을 거스르지 않는다. 작은 낙석으로 다리를 쌓은 방법이나 다리가 떠내려가지 않도록 축조한 기술이 전국적으로 유례가 없으며 동양에서 가장 오래되고 긴 다리에 속한다.
자신이 가는 길을 막지 않는 다리를 강은 그대로 품어 주었다. 옛날에는 어른도 서서 다리 밑을 통과할만큼 높았다고 하나 지금은 하천바닥이 많이 높아져 원래 모습을 확인하기 어렵다. 천 년 세월을 강에 ‘놓인’ 것이 아니라 강과 ‘함께’ 한 다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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