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내내 햇볕을 잔뜩 머금은 나뭇잎은 시원하게 부는 바람에 사라락 소리를 내며 흔들린다. 유난히 뜨거웠던 여름에게 잘 가라는 인사를 하는 것인지 조금도 쉬지 않고 잎이 흔들린다. 푸르렀던 여름 나무 잎사귀가 흔들리며 점점 노랗게, 붉게, 가을을 입는다. 그렇게 흔들리다 앙상한 가지만 남겨 놓은 채 나무는 겨울을 맞이한다. 다시 봄이 오면 조금씩 잎을 피우고 여름이 오면 푸르른 잎으로 다시 시원한 그늘을 드리운다. 세월이 가도 변하지 않는 것, 그건 분명히 나무일 것이다.
변하지 않고 한 자리에 뿌리를 내린 채 계속 삶을 이어가는 나무는 인간에게 겸손함이 무엇인지를 가르친다. 아무런 말없이 매년 4계절을 지내며 인간 삶을 목도하는 나무 아래서 함부로 말하기란 쉽잖다. 오랜 세월, 세상을 내려다보며 서 있는 나무를 찾아 떠나는 여행은 그래서 특별하다. 문득, 한없이 넓은 품이 그리울 때 나무를 껴안아보기 위해 떠나는 여행이‘노거수 찾아 떠나는’여행이다.
- 대전 괴곡동 느티나무
넓고 푸른 그늘 아래
기찻길 너머 유난히 큰 나무 한 그루가 눈에 들어온다. 반듯하게 다듬은 시골길 중간에 느티나무가 홀로 우뚝 서 있다. 680살이 훌쩍 넘은 대전 괴곡동 느티나무(천연기념물 제545호)다. 2013년 7월 천연기념물이 된 괴곡동 느티나무는 마을 사람들이 매년 칠월칠석에 나무 앞에 모여 칠석제를 올리는 수호목이기도 하다.
대전에서 가장 오래된 괴곡동 느티나무는 높이 26m에 수형이 굉장히 멋있는 나무다. 수관 폭(가지가 벌려 있는 정도)도 무척 넓다. 이 느티나무를 카메라에 담으려고 한참 뒷걸음질했다.
천연기념물이라는 화려한 수식어가 붙었지만 괴곡동 느티나무는 여전히 가지를 넓게 늘어뜨리고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 사람들을 맞이하고 있다. 나뭇가지마다 가득 자란 잎사귀는 햇빛 한 점 나무 안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괴곡동 느티나무의 매력이 가장 잘 드러나는 순간은 사람들이 나무 밑으로 찾아올 때다. 나무 아래에 있는 넓은 평상에 마을 사람들이 찾아와 앉는다.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던 사람도 잠시 나무 아래 평상에서 휴식을 취한다.
“여름이면 만날 여기(평상) 와서 앉아 있어. 시원하니까. 여름에 여기보다 좋은 곳은 없지.”
마을에 오래 산 아주머니 말처럼 나무의 넓고 푸른 그늘은 참으로 아름다운 피서지다.
느티나무는 오랫동안 큰 나무로 잘 자라는 나무다. 어느 지역에서나 잘 자라는 나무이지만, 공해에 약해서 도시에서는 자라기 어렵다고 한다. 다행히 괴곡동 느티나무 주변은 자연이 가진 향기와 푸름, 상쾌함이 가득하다. 괴곡동 느티나무는 최적의 장소에서 잘 자라고 있는 중이다.
- 연기 세종리 은행나무
나를 잊지 말아요
같은 날 같이 심은 나무지만 생김새는 전혀 다르다. 이란성 쌍둥이 나무다. 한 그루는 줄기가 몸을 꽈 몸통을 더 튼튼히 조였다면, 다른 한 그루는 곧게 줄기를 뻗어 자랐다. 자란 모습이 다르니 풍기는 느낌도 전혀 다르다. 올곧게 자란 나무보다 몸을 배배 꽈 자란 나무가 가지를 더 넓게 뻗쳐내 더 기세등등한 모습이다.
연기 세종리 은행나무(세종특별자치시 기념물 제8호) 두 그루는 고려 말 탐라정벌에 공을 세우고 공조전서를 지낸 임난수(1342~1407) 장군이 멸망한 고려를 생각하는 마음으로 심은 것으로 전한다. 임난수는 고려의 충신으로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자 한 하늘 아래 두 임금을 모실 수 없다며 벼슬을 버리고 공주 금강변 삼기촌(현 양화리)에 터를 잡는다. 이성계가 여러 번 벼슬을 주어 불렀으나 끝까지 응하지 않고 고려에 대한절의를 지켰다.
이때 심은 암수 한 쌍의 은행나무가 바로 이 나무다. 60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 무성한 잎을 자랑하며 잘 자라고 있어 충절의 상징으로 여겨지고 있다. 은행나무는 나라에 큰 변이 생길 때마다 울었다고 한다. 일한강제병합과 6·25전쟁 발발 때 울었고,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이 이 나무를 베려고 하였으나 나무에서 소리가 나 베지 못했다고 한다.
은행나무가 있던 마을은 원래 연기군이었으나 2012년 7월 1일 세종시라는 새 이름으로 새 출발해 도시로 변해가고 있다.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마을처럼, 살던 이도 변화의 흐름대로 하나 둘 떠나기 시작한다. 은행나무 바로 옆에, 뒤에 살던 이들도 모두 떠났다. 150여 가구가 살았던 마을이 이제는 다섯 가구만 남았다. 남은 다섯 가구도 올 12월이 되기 전에 모두 떠나야 한다고 마을 이장은 말한다.
“내가 여기서 나고 자랐는데 쉽게 떠나지 못하지. 그래도 별 수 있겠어. 나도 가야지.”
이장마저 마을을 떠나고 나면 텅 빈 마을엔 은행나무 두 그루만 남는다. 충절의 상징답게 은행나무는 새로운 마을 사람들이 올 때까지 그 자리를 잘 지키고 있을 것이다. 당분간은 아주 쓸쓸하더라도.
- 공주 신촌 느티나무
두 그루가 하나로 합해져
마을 입구에 들어서 마을 사람에게 나무 위치를 확인했는데도 느티나무를 지나치고 말았다. 돌아온 길을 다시 되돌아가니 작은 푯말이 보인다. 공주 신촌 느티나무다. 신촌 느티나무는 나이가 600년이 넘었고 정월 대보름날에는 마을 주민들이 제사를 지낸다.
마을 대대로 전해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조선개국 당시 고려의 왕족인 개성 왕씨가 이곳 신촌 마을에 숨어들어와 심은 것이라 한다. 개성 왕씨는 조선 조정의 박해를 피해 목숨을 구하고자 피신처를 찾던 중 마을 남쪽에 있는 왕대골 골짜기에 숨어 살기 시작했다. 이후 박해가 약해지자 조금 더 넓은 개울 건너 동쪽 산기슭으로 이주해 새롭게 마을을 이루고 살았는데 새로 생긴 마을이란 뜻에서 느티나무가 있는 마을을 신촌이라 불렀다고 한다.
나무는 처음에 두 그루를 심었는데 세월이 흐르면서 두 그루의 나무가 하나로 합해져 지금처럼 되었다. 느티나무는 나라에 큰 일이 있을 때마다 울음소리를 내 마을 사람들에게 알려주는 신통함도 있었다. 또한 마을 주민들은 이 나무에 잎이 피는 것을 보고 그해 농사의 풍흉을 알 수 있었는데, 잎이 위에서부터 피면 비가 많이 와서 홍수가 나고 중간부터 피면 비가 적당하여 풍년이 되고, 아래에서부터 피면 비가 부족하여 가뭄이 든다고 한다.
신촌 느티나무가 있는 마을을 도담골 호반마을이라 부르는데, 최근 농촌체험 휴양마을로 지정됐다. 그 덕에 느티나무 주변에 운동기구와 벤치를 들여놓은 작은 공원이 들어섰다. “나무도 혼자 있는 것보다 누군가 옆에 있는 게 낫지 않겄어? 사람들이 왔다갔다 허면 나무도 좋지 뭐. 안 그래?”
마을 도로 변에서 포도를 파는 아저씨 말을 들으니 작은 공원에 가려 잘 보이지 않았던 느티나무가 다시 보인다.
- 금산 보석사 은행나무
천년 세월 무병장수
“가을에 멋있어요. 은행 나뭇잎이 노랗게 물들 때가 정말 좋죠.”
보석사 스님은 매년 보는 모습이지만 은행나무가 가을을 입는 모습에 매번 감탄한다고 말했다. 여름날 마주한 금산 보석사 은행나무(천연기념물 제365호)는 초록 잎이 무성한 나무였지만, 잎이 노랗게 물든 모습을 상상하니 스님의 그 말이 이해가 간다.
금산 보석사 은행나무는 높고 줄기가 곧다. 뿌리가 100평에 걸쳐 땅 속에 퍼져 있고 나이가 1000년이 넘었다. 충남에서 세 번째로 나이가 많은 나무다. 외형은 장엄하기까지 하다. 높이 34m, 둘레 10.72m로 아주 다부진 나무다.
땅 밑으로 넓게 퍼진 나무뿌리에서 새로운 은행나무가 자란다. 전문가 말로는 오래된 나무인 만큼 가진 영양분이 많은데 그 영양분을 골고루 나눠 주려고 뿌리에서 새로운 나무를 자라게 하는 것이라고 한다. 1000년이 넘었는데도 영양분을 나눠줄 정도니 무병장수라는 말이 이토록 잘 어울리는 나무가 또 있을까 싶다.
조구대사가 보석사 창건(886년) 무렵 제자와 함께 심었다고 전해지는 보석사 은행나무는 1945년 광복 때와 1950년 6·25전쟁 때, 1992년 극심한 가뭄 때 소리 내어 울었다고 전해진다.
지금도 매년 음력 2월 15일엔 보석사 신도들이 은행나무 앞에서 대신제를 지낸다. 예나 지금이나 나무를 위하는 사람들의 마음에 변화는 없다.
- 금산 요광리 은행나무
은행나무 아래 정자 하나
500년 전 이 마을에서 살던 오씨(吳氏)의 조상이 전라감사로 있을 때 나무 밑에 정자를 지었다. 은행나무 정자라는 뜻으로 행정(杏亭)이라고 불렀다. 지금 나무 옆에는 그 정자가 아닌 행정헌(杏亭軒)이라는 육각정자가 있다.
금산 요광리 은행나무(천연기념물 제84호)는 율곡 이이 선생의 문집에도 나오는 오래된 나무이다. 나이가 약 1000살 정도로 높이 24m, 가슴높이둘레 12.93m이다. 줄기가 썩어서 동굴처럼 비어 그 안을 채웠다. 사방으로 자란 가지 중 남쪽과 동쪽을 향한 가지가 부러졌는데 그 가지로 3년 동안 밥상을 만들고 관 37개를 만들어 마을 주민이 나누어 가졌다고 한다.
전설에 의하면 머리가 둔한 아이를 밤중에 이 나무 밑에 한 시간쯤 세워두면 머리가 좋아진다고 한다. 또, 잎을 삶아서 먹으면 노인의 해소병(폐질환)이 없어지고, 나무에 정성 들여 빌면 아들을 낳는다는 이야기도 있다. 나라와 마을에 무슨 일이 생기면 소리를 내어 알려준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이와 같은 전설을 믿는 사람들은 음력 정월 초사흗날 자정, 나무 밑에 모여 새해의 행운을 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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