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여행길 4 - 사찰 따라가는 충청 기행

이산저산구름 2014. 11. 11. 10:26

 

 

 

- 논산 관촉사
키도 크고 머리도 큰 은진미륵

 

커다란 버드나무가 먼저 손님을 맞는다. 관촉사 주차장으로 조성한 이곳엔 백 년도 넘게 마을을 지킨 버드나무가 서 있다. 그늘에서 쉬고 있던 할아버지들은 마을의 옛이야기를 하나둘 풀어놓는다.
“지금이야 이렇게 다 마을이지만, 그전에는 요 앞까지 강이었대. 버드나무 앞까지 물이 차있었다고 하대. 저기 바위에 배를 묶어서 대고 그래서 마을 이름이 배바우였다고 말들 하지.”
커다란 바위는 아직도 마을에 남았지만, 강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버드나무를 지나 연꽃단지 쪽으로 길을 걷는다. 수줍게 핀 연꽃이 보일 듯 말 듯 숨어 애간장을 태운다. 관촉사는 나지막한 반야산 중턱에 있다. 산 오르는 것을 힘겨워하는 사람에게는 아주 좋은 절이다. 사람 사는 곳과 가까워 산세가 주는 운치는 덜하지만, 오가는 걸음이 편안해 산책하는 마음으로 기분 좋게 오른다. 오르는 길은 짙은 나무 그늘에 가려 시원하다. 지금은 큰 절이 되어 많은 사람을 품는 관촉사는 옛날에는 관음전과 승려들이 거처하는 자그마한 요사, 그리고 은진미륵이라 부르는 석조미륵보살입상(보물 제218호)이 전부였다.
지금은 야트막한 산에 절터가 넓게 퍼졌다. 모든 것이 은진미륵의 크기에 맞춰 커진 것 같다. 관촉사라는 이름도 이 석조미륵보살입상에 얽힌 전설과 닿아 있다. 창건 당시 석조미륵보살입상에서 나온 빛줄기를 보고, 중국의 지안스님이 찾아와 참배했다는 설화에서 관촉사라는 이름이 유래했다고 전한다.
관촉사석문(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79호)은 많은 건축가가 창덕궁의 불로문과 함께 우리 건축에서 대표적으로 아름다운 돌문으로 꼽는다. 작은 문을 지나 들어가니 은진미륵이 더 거대해 보인다.

 


은진미륵에는 전해오는 재미난 이야기도 많다. 고려 시대 북쪽 오랑캐를 물리친 이야기는 유명한 설화다. 압록강을 건너려던 오랑캐가 폴짝폴짝 강을 뛰어 건너가는 중을 보고, 따라 건너다가 수많은 병사가 강물에 빠져 죽었다. 가까스로 강을 건넌 오랑캐 장수가 중의 목을 내리치자 칼은 부러지고, 중은 사라졌다. 이때 오랑캐를 유인한 것이 지금의 은진미륵이라고 한다. 불상을 올려다보면 보이는 갈라진 모자 부분이 오랑캐 장수가 내리친 부분이란다.

 


은진미륵은 18m가 넘는 장신이라 올려다보려면 한참이다. 그런데 머리가 아주 커서 그렇게 커 보이진 않는다. 어깨도 아주 좁다. 요즘 미의 기준으로 보자면 한참 모자라다. 그렇지만 불균형적인 비례가 푸근하면서도 위압적이지 않은 권위로 다가온다. 바로 앞 관촉사 석등(보물 제232호)을 통해 미륵을 바라보면 다양한 표정을 만날 수 있다.
불상 왼쪽 사적비를 보면, 고려 광종 19년(968)에 해명대사가 조성하기 시작해 37년 만인 목종 9년(1006)에 완성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 공주 마곡사
소박함이 깃든 곳

 

 

태화산 동쪽에 자리잡은 마곡사는 대한불교 조계종의 제6교구본사다. 말사로는 동학사, 갑사, 신원사가 있다. 춘마곡, 추갑사라는 말이 전해질 만큼, 마곡사는 봄 경치가 좋다. 마곡사는 신라 선덕여왕 9년(640)에 자장율사가 세웠다는 설과신라의 승려 무선이 당나라에서 돌아와 세웠다는 두 가지 설이 있다. 신라 말부터 고려 전기에 폐사되었다가 고려 명종 2년(1172) 보조국사가 다시 세웠다. 임진왜란 뒤 60년 동안 다시 폐사되었다가 조선 효종 2년(1651)에 각순대사가 대웅전, 영산전, 대적광전 등을 고쳐 지었다고 한다.
마곡사로 향하는 산책로는 잘 닦여져, 걷기에 좋다. 우거진 나무들과 한쪽 옆으로 흐르는 계곡 물을 바라보며 걷다 보면 금방 마곡사 해탈문(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66호), 마곡사 천왕문(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62호)을 만난다. 연이어 자리잡은 해탈문과 천왕문은 소박한 멋을 지니고 있다. 천왕문을 지나면 태화천이 보인다. 태화천을 가로지르는 극락교 역시 소박한 아름다움을 지녔다. 그리 길지 않은 극락교를 건너며 마곡사 대광보전(보물 제802호)과 마곡사 대웅보전(보물 제801호)을 바라본다.
대광보전은 마곡사의 중심법당이다. 해탈문, 천왕문과는 일직선으로 놓였다. 문살은 꽃 모양을 섞은 조각으로 장식했고, 가운데 칸 기둥 위로 용 머리를 조각해 놓았다. 오랜 시간이 지나며 대광보전의 색은 빛이 바랬고 나무 자재는 곳곳이 갈라졌지만, 풍부한 장식이 그 옛날 화려했을 대광보전의 모습을 짐작케 한다.

 

 

대광보전 앞에는 마곡사 오층석탑(보물 제799호)이 자리했다. 머리장식으로 풍마등을 둔 것이 눈에 띈다. 고려 시대 석탑의 특징이 드러나지만, 머리장식은 라마탑의 영향을 받아 이색적이다.
대광보전 뒤로는 대웅보전이 자리했다. 겉으로 보기에는 2층 건물인 것처럼 보이는데, 내부는 하나의 공간이다. 현존하는 전통 목조건축물 가운데서는 많지 않은 중층 건물로, 내부 중심에는 석가모니불, 그 좌우로는 아미타불과 약사불을 모시고 있다. 대광보전 앞 한쪽 뜰에는 이곳을 찾은 사람들이 하나둘 쌓은 작은 돌탑이 늘어섰다. 그 작은 소망들은, 뒤로는 대웅보전을 앞으로는 대광보전을 바라보고 있다.
신라 시대에 세워져 여러 번 폐사되었다 다시 세워진 마곡사는 현대로 오면서 더 많은 이야기를 품는다. 김구 선생이 잠시 마곡사에 은거하며 출가 수도한 흔적이 남았다. 김구 선생이 삭발했던 삭발 터를 볼 수 있으며, 김구 선생이 광복 후 이곳에 다시 찾아와 심어 놓은 향나무도 볼 수 있다.

 


- 예산 수덕사
현존하는 유일의 백제 사찰

 

 

백제 위덕왕(554~597) 때 세운 것으로 추정하는 수덕사는 현존하는 유일한 백제 사찰이다. 예로부터 호서의 금강산이라 불렸을 만큼 아름다운 덕숭산 자락에 자리했다. 이러한 기운을 받은 곳, 수덕사에는 한국불교의 선맥이 계승됐다. 경허, 만공, 혜월, 수월, 보월 등 선승이 배출되어 선지종찰이라 한다. 수덕사는 대한불교 조계종 덕숭총림으로 제7교구 본사이며, 69개 말사를 관장한다.
수덕사로 향하며 먼저 접하는 것은 이응노 화백이다. 이응노 화백이 수덕사 아래에서 작품 활동 했던 것을 기념하여 세운 수덕사 선(禪) 미술관을 지나, 그의 부인이 운영했던 수덕여관을 복원해 놓은 것을 볼 수 있다. 2007년에 복원 개관해 옛 모습은 남아 있지 않지만, 특유의 정겨운 느낌과 이응노 화백의 암각화가 그대로 남았다.

사천왕문을 지나 황하정루를 지나 올라가면 1988년에 스리랑카에서 받은 진신사리 3과를 모신 금강보탑이 있고 그 너머로 대웅전 모습이 보인다. 오른편에 있는 법고각 뒤로는 청련당이 놓였다. 청련당 주련 위에 ‘世界一花(세계일화)’라는 글이 위용 있는 필체로 존재감을 드러낸다. 만공스님이 이곳 수덕사에 주석할 때, 광복 다음날 무궁화 꽃송이에 먹물을 묻혀 써내려간 글씨다. 이 세상 삼라만상이 한 송이 꽃이라는 뜻으로, 머지않아 조선 땅이 세계 일화의 중심이 될 것이라는 뜻도 담겼다.
수덕사 대웅전(국보 제49호)은 1992년 준공하고 1994년에 이전 개축한 황하정루와 비교하면, 세월의 무게가 느껴진다. 대웅전은 고려 충렬왕 34년(1308)에 세웠다. 부재가 크고 굵은 대웅전을 가만히 바라보면 마음이 가라앉는다. 묵직함과 부드러움, 안정감을 동시에 지닌 대웅전은 조형미가 뛰어나고, 한국 목조건축사에서 중요한 건물로 손꼽힌다. 건립연대를 정확히 알 수 있고, 고려 시대 건축물이지만, 백제적 곡선을 보인다는점에서 소중하다.
대웅전 앞에 자리해 소박한 모습으로 존재감을 뽐내는 수덕사 삼층석탑(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103호)은 신라 문무왕 5년에 건립되었고 원효대사가 중수했다고 전해지지만, 통일신라 시대 양식을 띤 고려 초기의 석탑으로 추정한다. 상대갑석과 지붕돌, 3층 몸돌 일부가 파손됐지만, 여전히 균형감이 느껴진다. 지붕돌은 끝이 치켜 올라가 균형미에 율동감을 더했다.
평소에는 조용한 수덕사가 템플스테이에 참여한 아이들로 북적인다. 대가람의 위용은 어린아이들 앞에서 잠시 그 기운을 속으로 품는다. 위용 있고 엄숙한, 때로는 친근한 모습으로 수덕사는 지금까지 제자리를 지켜오고 있다.

 


- 서산 간월암
바닷바람에 실린 이야기

 

 

서해를 바라보고 있는 간월암은 밀물과 썰물에 따라 섬 위에 있기도 하고, 육지에 자리하기도 한다. 고려 말 무학대사가 이곳에서 수도하다가 달을 보고 도를 깨우쳤다고 해, 암자 이름을 간월암(看月庵)이라고 하고, 섬 이름도 간월도가 되었다. 간월암은 조선 시대 억불정책으로 폐사되었다가, 1941년에 만공스님이 중창했다.
이곳에는 여러 이야기가 전해 내려온다. 무학대사가 이곳에서 수행하며 태조 이성계에게 보낸 간월도 어리굴젓이 궁중 진상품이 되었다고 전한다. 만공스님이 이곳에서 조국해방을 위한 천일기도를 드리고 바로 그 후에 광복을 맞이했다는 이야기도 유명하다.
간월암은 한 폭의 그림이다. 크기가 크지는 않지만, 서해와 접해있다는 것만으로 가슴이 확 트인다.
대웅전 앞의 넓은 마당과 용왕단이 길게 뻗은 서해안과 함께 눈에 들어온다. 대웅전에는 1600년 전후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 목조보살좌상(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184호)이 있다. 마당 한쪽 지장전의 지붕 모양이 재밌다. 지장전 지붕은 강한 바닷바람을 이기려 독특한 모양으로 만들었다.
간월암을 찾은 사람들이 주변에 돌탑을 쌓아두었다. 바닷바람에도 쓰러지지 않고 자리를 지킨 돌탑. 돌탑을 무너지지 않게 한 힘은 뭇 사람들의 작은 바람이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