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예와 강직함을 지닌, 충청도 선비정신을 좇아!

이산저산구름 2014. 11. 4. 10:37

 

사찰을 둘러보면 절로 마음이 편해진다. 사찰을 급하게 둘러보는 사람은 없다. 누구든지 사찰에 오면 느린 걸음으로 곳곳을 둘러본다. 그러면서 자신을 돌아보고, 옆자리를 바라본다. 사찰을 찾는 이유는 많다. 누군가는 이곳에서 종교적인 수양을 하고, 누군가는 마음의 안정과 위안을 얻는다. 누군가는 산세를 즐기는 한 방법으로 사찰을 찾는다.
사찰은 산과 밀접하다. 깊은 산 속, 아니면 산의 초입에 자리한 사찰. 사찰은 인간세상과 자연 사이에서 오랜 시간 그 자리를 지켰다. 세월을 따라 사찰이 품은 이야기도 쌓여 간다.

 


- 공주 동학사
홍살문으로 들어가니

 

 

계룡산 북동쪽 기슭에 있는 마곡사의 말사 동학사는 상원조사가 지은 상원암에 연원을 두고 있다. 상원조사가 입적한 뒤 그의 제자인 회의화상이 성덕왕 23년(724)에 암자 자리에 상원조사의 사리탑과 절을 세우고 이름을 청량사라고 한 것에서부터 그 역사가 시작됐다. 청량사는 지금 동학사로부터 2km 정도 떨어진 곳에 있었으며, 당시 사리탑이었던 청량사지 오층석탑(보물 제1284호)과 청량사지 칠층석탑(보물 제1285호)이 남아 있다. 이 두 탑을 흔히 남매탑이라고 부르며, 남매탑은 동학사에서 갑사로 넘어가는 고개에 있다. 남매탑까지 이르는 길은 사람들이 많이 찾는 계룡산 등산로이기도 하다.
주차장에서부터 계룡산으로 들어가는 입구를 지나 동학사까지는 걸어서 20분 정도가 걸린다. 산책하기 좋을 만한 구간을 지나고, 본격적인 등산로로 진입하기 전에 동학사가 있다. 고려 태조 3년(920)에 도선국사가 지금 동학사 자리에 사찰을 중창한 뒤 태조의 원당이 되었다. 태조 19년(936), 신라가 고려에 복속되자 류차달이 신라 시조와 박제상을 제사하기 위해 동계사를 짓고 절을 확장한 뒤 절 이름도 동학사로 바뀌었다.
동학사의 모습이 드러나기 전, 사찰에서는 흔히 볼 수 없는 홍살문이 세워져 있어 눈길을 끈다. 유교와 불교가 공존하는 모습은 단종과 충신들의 위패를 모신 사당 숙모전(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67호)에서도 드러난다.
대웅전과 마당은 크지 않고 아담해 정겹다. 마당으로 들어서자마자 보이는 동학사 삼층석탑(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58호)은 남매탑이 있는 곳에서 옮겨 놓았다. 기단과 3층 탑신은 복원한 것이라 탑의 다른 부분과는 어울리지 않지만, 소박한 멋은 그대로 남아 있다. 이곳을 찾은 사람들은 무언가를 기원하며 삼층석탑에 동전을 던진다.
동학사는 비구니 사찰이며, 우리나라 최초의 비구니 강원이 있는 곳으로 유명하다. 봄이면 동학사를 찾는 사람이 늘어난다.
동학사로 향하는 도로 양옆으로 벚꽃이 만발하고, 동학사에도 벚꽃과 온갖 꽃들이 피어난다. 꽃을 찾는 사람들, 계곡을 찾는 사람들, 등산하는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동학사를 둘러본다. 그렇게 동학사는 친근한 사찰로 자리잡고 있다.

  

 

- 공주 갑사
대웅전 마당에 연지

 

 

계룡산 서쪽 기슭에 마곡사의 말사인 갑사가 있다. 갑사의 창건 배경이 전설로 전한다. 석가모니 가 입적하고 400년 뒤에 인도 아소카왕이 사천왕에게 석가모니의 사리를 48방에 봉안하게 했다. 북쪽을 관장하던 비사문천왕이 사리 일부를 계룡산에 봉안했는데, 백제 구이신왕 원년(420)에 고구려의 아도화상이 도리사를 창건하고 계룡산을 지나다 상서로운 빛이 뻗쳐오르는 것을 보고 그곳을 찾아 대(臺)를 만들고 예배한 데서부터 갑사 역사가 시작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그 후 계속 중창해 신라 화엄종의 10대 사찰이 되었다.
주차장에서 갑사까지는 약 2km 정도 걸어야 하는데, 그 거리가 5리라 하여 오리숲이라 부른다. 수백 년 세월을 품고 있는 오래된 나무들을 바라보며 걸으면 금방 사천왕문을 지나 갑사 강당(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95호) 앞에 이른다. 강당은 스님들이 법문을 강론하던 건물이며 절도사 홍재의가 쓴 ‘鷄龍甲寺(계룡갑사)’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광해군 6년에 창건했다가 정유재란(1597)으로 불타 다시 지었다. 강당에서 오른쪽으로 조금 더 걸으면 종루 안에 갑사 동종(보물 제478호)이 있다. 선조 17년(1584)에 만들어진 이 동종은 민족의 수난을 같이 했다는 점에서 뜻깊다. 갑사 동종은 일제강점기에 헌납이라는 명목으로 공출되었다가, 광복 후 다시 갑사로 돌아왔다. 종 꼭대기에 두 마리의 용이 고리를 이루고 있는데, 입을 벌린 용에 광복을 바라던 우리 민족의 염원이 서린 듯하다.

 

 

강당 안쪽으로 들어가면 대웅전(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105호)이 보인다. 소조삼세불(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165호)을 모신 대웅전은 정유재란 때 불탄 건물을 보수했다. 대웅전 앞마당에는 다른 절 대웅전 마당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탑 대신에 연지가 자리했다. 연지를 둘러싸고 넷으로 구획된 잔디밭이 소박하다.
대웅전 오른편 뒤쪽으로 삼성각(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53호)이 있는데, 불교가 우리나라에 토착화하면서 나타난 신앙으로, 칠성, 산신, 독성의 삼성을 함께 모신 곳이다.

 


조금 더 깊숙이 산 쪽으로 들어가면 계곡을 옆에 둔 갑사 석조약사여래입상(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50호)이 보인다. 동굴 안에 있는 석조약사여래입상은 원래 갑사 뒷산 사자암에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고려 중엽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며, 한쪽 손에는 약단지를 들고 있다. 중생을 병고에서 구하고 마음의 어둠을 씻어준다는 석조약사여래입상 앞에는 꽃과 음식이 끊이지 않는다.
갑사로 향하는 사천왕문을 지나기 전에 오른편 산책로로 방향을 틀어 오르면, 철당간(보물 제256호) 및 지주를 만난다. 절에 행사가 있을 때 절 입구에 깃발을 달아두는데 이 깃발을 달아두는 장대가 당간이며, 장대를 양쪽에서 지탱하는 두 돌기둥을 당간지주라 한다. 꾸밈없어 소박하지만, 높게 솟아 한편으로는 장엄하다. 이곳에서 대나무가 터널을 이루는 계단을 오르면 법당인 대적전(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106호)이 그 앞의 승탑(보물 제257호)과 어울려 한적한 분위기를 만든다.

 

 

- 공주 신원사
중악단 꽃담 따라

 

 

세월의 흔적을 이렇게 아담하고 소박하게, 아름답게 간직한 사찰이 또 있을까. 신원사는 계룡산 남쪽 자락에 자리 잡은 마곡사의 말사다. 백제 의자왕 11년(651)에 보덕이 처음 지었다고 전한다. 고려와 조선 시대를 지나며 여러 번 다시 지었다.
신원사는 계룡산으로 들어가는 초입에 있다. 산과 마을 사이에서 신원사는 때로는 친근하게, 때로는 경외감을 주는 존재로 자리를 지켜왔다.
대웅전(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80호) 마당은 아기자기한 정원처럼 작고, 곳곳에 사람의 손길이 느껴질 만큼 잘 닦은 곳이다. 처마 끝이 살짝 올라간 대웅전은 크지 않고 간략한 양식으로 이루어져 소박하면서도 우아하다.
대웅전에서 오른쪽으로 걸음을 옮기면 얼마 가지않아 중악단(보물 제1293호)이 보인다. 세월의 흔적을 그대로 간직한 중악단은 계룡산신에게 제사 지내기 위해 만든 조선 시대 건축물이다. 조선시대에 북쪽의 묘향산을 상악으로, 남쪽의 지리산을 하악으로, 중앙의 계룡산을 중악으로 해 단을 쌓고 산신에게 제사를 지냈다. 태조 3년(1394)에 처음 제사를 지냈다고 전하며, 효종 2년(1651)에 제단이 폐지되었으나, 고종 16년(1879)에 명성황후의 명으로 다시 짓고 이름을 중악단이라고했다. 현재 상악단, 하악단은 없어지고, 중악단만 남아 역사적 의미가 크다.
중악단에 색이라고는 빛바랜 것들뿐이다. 빛바래서 누추한 것이 아니라 진한 고즈넉함을 품은 색이다. 겹겹이 문을 지나 안으로 들어가면, 작지만 위용 있는 모습의 중악단이 존재감을 발한다.
불과 몇 백 년 전에는 이곳에서 국가의 제사를 지냈다. 명성황후는 이곳에서 기도해 순종을 임신했다고 전한다. 명성황후가 을미사변으로 세상을 떠난 날, 이곳에서 추모대재를 올린다.
중악단을 감싼 꽃담은 소소한 멋을 지녔다. 행운을 기원하는 문자와 무늬로 장식한 꽃담을 천천히 둘러보면 마음이 포근해진다.

 

 
중악단을 나오면 뒤로 보이는 계룡산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언젠가 명성황후도 이 길을 걸으며 계룡산 줄기를 바라봤을 것이다.
중악단 남쪽에 있는 신원사 오층석탑(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31호)은 중후하다. 지금은 4층 지붕돌까지만 남아 있지만, 원래는 2층 기단에 5층의 탑신을 올렸던 것으로 본다. 신원사 오층석탑은 고려 전기에 세운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