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이야기가 있는 문화유산 여행길 충청권 - 예와 강직함을 지닌, 충청도 선비정신을 좇아

이산저산구름 2014. 10. 21. 06:03

 

 

 

스승과 제자가 함께 걷는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따르는 둘의 뒷모습에서 오랜 벗의 모습이 보인다. 같은 곳을 바라보며, 함께 뜻을 세우고 그 위에 비슷한 모습의 집을 짓는다. 둘은 걸음을 함께 하지만, 때로는 다른 곳을 바라보기도 한다. 후학을 양성하는 것은 학자들에게는 중요한 일이다. 그 뜻을 올바로 이해하는 제자를 만난다는 것도 스승에게는 큰 복이다. 경기도와 충청도 선비 중심으로 이어진 기호유학(畿湖儒學)은 조선 시대 말 충청도를 중심으로 그 빛을 더했다. 묵직하게 이어진 사제 간 인연의 끈을 잡고 충남 논산으로 향한다.

 


- 노성 궐리사
흔들리지 않는 믿음 앞에서

 

 

노성 궐리사(충청남도 기념물 제20호)에 들어서자 공자상이 가장 먼저 눈에 띈다. 우암 송시열의 아버지 송갑조는 아들을 낳기 전 공자가 제자들을 거느리고 그의 처가인 구룡촌으로 방문하는 꿈을 꿨다고 한다. 조선을 유교의 나라로 만드는 데 큰손을 얹은 송시열과 유교의 창시자 공자의 인연은 어쩌면 그때부터였는지도 모른다. 1687년부터 송시열은 노성 궐리사 건립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송시열은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죽음에 이른다. 건립 추진을 시작했던 2년 뒤인 숙종 15년(1689), 왕은 숱한 논란의 중심에서 평생을 보낸 송시열을 사사(賜死)한다. 송시열이 숙종에게 희빈 장씨의 아들을 원자로 봉하는 일이 아직 이르다며 상소를 올린 후였다. 어느 편에 서느냐에 따라 가차 없이 목숨을 잃기도 했던 때였다. 송시열이 추진했던 노성 궐리사 건립은 묻히는 듯했다. 그러나 송시열의 제자 권상하, 김만준, 이건명 등이 송시열의 뜻을 이어받고자, 1716년 노성 궐리사를 창건하였다. 궐리사라는 이름은 공자가 태어나고 자란 마을 이름에서 유래했다. 공자는 중국 산동성 곡부현에 있는 궐리촌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숙종 43년(1717)에는 중국에서 공자의 유상을 가지고 와 봉안하고, 순조 5년(1805)에 지금 자리로 옮겼다. 긴 시간이 흐른 후에도 스승의 뜻을 기리는 마음으로 지은 것인지, 이것 또한 어떤 정치적인 이유였을지는 알 수 없지만, 궐리사는 적잖은 사연 속에서 지어진 건물이었다.


 

- 임리정
마지막까지 후학을 돌보다

 

율곡 이이의 성리학을 계승하여 예학을 발전시킨 사계 김장생은 많은 제자를 두었다. 그의 제자들은 모두 학문으로 이름이 높았다. 그 가운데 우암 송시열도 있었다. 충남 논산시 강경읍에 있는 임리정(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67호)은 인조 4년(1626) 사계 김장생 선생이 지은 정자다. 그때 그의 나이 일흔아홉이었다. 그는 세상을 떠나는 순간까지 율곡을 정통으로 계승하고자 열정을 쏟았다.
강자락 따라 봉긋하게 선 언덕에 지은 정자에 오른다. 금강 줄기를 바라보며 앞 뒤로 선 임리정과 팔괘정에선 스승과 제자의 애틋함이 머릿속에 그려진다. 당시에는 좋은 스승을 만나는 것을 높은 관직에 오르는 것보다 귀히 여겼다. 조선 후기 정치와 학문의 중요한 특징 중 하나가 ‘산림’의 출현이다. 산림은 급제나 관직과 상관없이 좋은 스승에게 학문을 이어받음으로 정치·사상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사람들이었다. 김장생은 그 원형을 보여준 예학의 대가였다.
임리정의 첫 이름은 ‘황산정’이었다. 이후 “깊은 못가에 서 있는 것과 같이, 얇은 얼음장을 밟는 것과 같이, 자기의 처신과 행동에 항상 신중을 기하라.”라는 《시경》의 구절을 따 임리정(臨履亭)으로 이름을 바꾼다. 김장생은 30대 이후 꾸준히 예학을 연구하고, 조선 예학의 기반을 마련했다. 생애를 두고 공부한 것을 많은 제자에게 가르치고, 또 가르쳤다. 김장생의 가장 큰 힘은 그의 제자들에게서 나온다. 이는 임리정을 마주 본 팔괘정에서도 느낄 수 있다.


 

- 팔괘정
스승을 따라 오른 언덕에서

 

가만히 보면 임리정과 쌍둥이 같다. 모양도 비슷하고, 마주 보며 지붕을 뻗은 모습이 사이좋은 형제의 미소처럼 느껴진다. 함께 금강을 바라봤을 스승과 제자의 모습이 어렴풋이 보이는 듯하다.
팔괘정(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76호)은 임리정과 150m 가량 떨어진 곳에 세웠다. 스승과 제자의 정자가 나란히 아름다운 금강을 바라본다.
팔괘정도 인조 4년(1626)에 우암 송시열이 지었다고 전한다. 퇴계 이황과 율곡 이이를 추모하며 학문을 연구하던 곳이다.
우암 송시열은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 송갑조에게 주자와 이이, 조광조 등을 흠모하도록 가르침을 받았다. 이런 송시열에게 김장생도 흠모의 대상이었을 것이다.
쉰아홉이라는 나이 차이도 같은 뜻을 품은 두 사람의 사제 간 인연을 막지 못했다. 그러나 인조 9년(1631)에 김장생이 생을 다하고, 이후 송시열은 김장생의 둘째 아들인 김집에게 그의 뜻을 배운다.

 


- 죽림서원
가르침도 있고, 토론도 있었다

 

임리정 옆으로 돌계단이 나 있다. 예전에는 그저 좁은 산길이었을 것이다. 그 길을 따라 내려가면 죽림서원이 나온다.
죽림서원(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75호)은 논산에서 가장 먼저 세워진 서원이다. 당시 율곡 이이와 우계 성혼을 기리고자 황산서원이라는 이름으로 세우고, 현종 6년(1665), 임금으로부터 ‘죽림(竹林)’이라는 이름을 받아 사액서원이 된다. 수많은 학자를 가르치고, 품에 안은 서원에서는 격한 논쟁도 있었다. 효종 4년(1653), 많은 학자가 한 사람에 관한 토론을 위해 이곳에 모였다. 평생 주자의 말씀을 받들며 살았던 송시열에게 주자의 학문에 토를 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윤휴는 달랐다.
윤휴는 조선 후기 문신으로 인조 13년(1635) 19세 때 당시 자신보다 열 살이 많았던 송시열을 만나 3일 간의 토론 끝에 송시열이 “지난 세월 나의 독서가 참으로 가소롭다.”라고 자탄할 정도로 학문이 높은 경지에 이르렀다. 그런 윤휴가 주장했던 것은 “성학 발전에 기여하는 길은 주자가 일생 동안 새로운 업적을 이루었듯이 그 업적을 토대로 새로운 해석과 이해의 경지를 개척하는 것이다.”이었다. 주자의 해석에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는 윤휴의 태도는 송시열이 보기에 주자를 향한 도전으로 느껴졌을 지도 모를 일이다.
이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당시 황산서원이었던 죽림서원에 송시열을 비롯한 저명한 서인학자가 모였다.
이 자리에 참석한 윤선거는 송시열의 뜻대로 윤휴를 사문난적으로 몰지 않았다. 결국 이 논쟁 이후에 서인은 송시열 중심의 노론과 윤증(윤선거의 아들) 중심의 소론으로 나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