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은 부여에서 그 이름을 백마강으로 바꾼다. 백마강은 전해오는 백제 이야기를 진하게 품고 있다. 금강 물결 따라 걷는 두 번째 코스. 부여에서 백제를 만난다. 부여는 백제의 마지막 도읍지다. 백제는 위례성(지금의 서울)과 웅진(지금의 공주)에 이어 지금의 부여, 사비성으로 도읍을 옮겼다. 538년부터 660년까지 122년 동안 부여는 마지막 백제의 땅이었다. 신라와 당나라 연합군에 백제가 패망한 때가 660년, 31대 의자왕 때다. 122년이라는 시간 동안 부여는 백제의 흥망성쇠를 모두 지켜보았다. 비극의 기억이 역사에 오래 남는다고 했던가. 낙화암에서 몸을 던졌다는 삼천 궁녀 전설로 상징되는 이야기가 금강 물줄기를 타고 오랫동안 흘러 내려온다. 이 물줄기를 따라 백제인의 생활과 문화를 엿본다. 사람을 압도하는 풍광은 아니지만, 살며시 마음 속에 남아 두고두고 생각날 친근함이다.
- 부여 정림사지
시시때때로 다른 오층석탑의 여러 얼굴
부여 정림사지(사적 제301호)는 백제가 부여로 도읍을 옮긴 시기, 중심 사찰이 있던 자리다. 발굴조사 때 강당 터에서 나온 기와에서 ‘태평 8년 무진 정림사 대장당초(太平八年 戊辰 定林寺 大藏唐草)’라는 글이 발견되어, 고려 현종 19년(1028) 당시 정림사로 불렀던 것을 알 수 있다. 고려 시대에 백제 사찰의 강당 위에 다시 건물을짓고 대장전이라 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정림사는 중문, 오층석탑, 금당, 강당의 중심축이 남북으로 일직선에 놓이고 건물을 복도로 감싸고있는 구조다. 특이한 것은 가람 중심부를 둘러싼 복도의 형태가 정사각형이 아니고 북쪽 간격이 넓은 사다리꼴 평면이라는 것이다.
부여를 여행할 때 정림사지는 꼭 들러야 한다. 그만큼 정림사지는 백제의 모습을 많이 간직하고 있다. 그저 절터일 뿐이지만 천천히 둘러보면 백제의 미란 무엇인지 극명하게 느껴지는 순간이 온다.
정림사지 오층석탑(국보 제9호) 앞에 선다. 정림사지 오층석탑은 정제미와 율동미를 동시에 갖추었다. 다른 층에 비해 1층이 높고 2층부터는 서서히 그 높이가 줄어든다. 이러한 탑신 높이의 비례미로 언뜻 보아 밋밋해 보일 수도 있는 탑이 생명을 지니게 됐다. 얇고 넓은 지붕돌의 처마 네 귀퉁이가 부드럽게 하늘을 향하고 있는 상승감이 이 명품에 아름다움을 더했다. 정림사지 오층석탑은 익산 미륵사지 석탑(국보 제11호)과 함께 현존하는 백제 시대 석탑 2기 중 하나라는 점에서 귀중한 자료다. 한편, 신라와 연합군으로 백제를 멸망시킨 당나라 장수 소정방이 ‘백제를 정벌한 기념탑’이라는 뜻의 글귀를 이 탑에 남겨, 한때는‘평제탑’이라고 불리는 수모를 겪기도 했다.
정림사지 오층석탑은 여러 얼굴을 지녔다. 시간에 따라, 날씨에 따라, 보는 장소에 따라 다양한 분위기를 풍긴다. 안개 핀 새벽, 정림사지 바로 옆정림사지 박물관 기념품점에서 정림사지 오층석탑을 바라보면, 탑이 꼭 물 위에 떠 있는 것 같다.또, 연지가 있는 쪽 한 귀퉁이에 누워 바라봐도 색다르다.
백제 시대 정림사지 강당 자리에 있는 정림사지 석조여래좌상(보물 제108호)은 고려 시대 때 만들어진 것으로, 정림사가 고려 시대에 다시 번창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손상으로 인해 그 형태를 자세히 알 수 없지만, 한눈에 봐도 친근한 불상이다. 머리와 머리 위에 올린 보관은 후대에 다시 만들어진 것으로 본다. 이와 관련해 이야기가 전한다. 조선 시대, 정림사지 주위에 살던 주민들이 머리가 없는 정림사지 석조여래좌상을 안타깝게 여겨서 마을의 멧돌을 불상 머리로 올렸다는 이야기다. 정림사지 석조여래좌상 뒤편에서 보면, 머리 중앙에 멧돌의 동그란 구멍을 막은 것이 보인다. 그리고 머리 양쪽에 귀 모양을 한 것이 멧돌의 손잡이였던 것으로 추정한다. 석조여래좌상을 보호하기 위한 건물은 1993년에 지었다.
정림사지 바로 옆에 정림사지 박물관이 있다. 정림사지를 발굴, 연구, 관리, 전시할 목적으로 세웠다. 이곳에 먼저 들러 정림사지와 백제 불교문화에 관한 이해를 넓힌다면 정림사지를 더 자세히 즐겁게 둘러볼 수 있다.
- 부여 궁남지
잔잔한 물결 같은 백제 숨결
부여 궁남지(사적 제135호)에 다다르자 연잎 냄새가 코끝을 간질인다. 연잎의 은은한 향은 세상사 고민을 말끔히 씻어 줄 것만 같다. 부여 궁남지는 백제 무왕 때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삼국사기》에 ‘궁궐의 남쪽에 연못을 팠다.’라는 기록이 있어 궁남지라 부른다. 연못을 파 풍류를 즐겼던 옛날 백제 사람들의 흔적은 지금 궁남지에는 남아 있지 않다. 하지만, 옛 풍류 그대로 사람들이 궁남지에 모여 한가로운 시간을 보낸다.
궁남지는 천천히 산책하기 좋다. 연못 사이로 난길을 따라 물 위로 솟아 오른 연잎에 힘이 넘친다.
연꽃 피는 시기 궁남지는 색색의 아름다움을 뽐내많은 사람이 찾는다. 궁남지의 화려한 모습을 보고 싶다면 연꽃 필 무렵에, 한적한 궁남지를 즐기고 싶다면 연꽃 필 무렵을 피해 찾는 것이 좋다.
인력으로 돌리는 물레방아는 궁남지의 재밋거리다. 물레방아에 올라 타 힘겹게 발을 옮기는 아빠를 아이들이 응원한다. 길게 매단 그네 역시 아이들이 좋아한다.
연못 중앙에는 포룡정이 있다. 포룡정으로 연결된 다리를 건너다 보면 연못 속 잉어들이 쫓아오는 모습이 보인다. 사람이 던져 주는 먹이를 먹고 큰 잉어들이, 인기척이 들리면 먹이를 기대하는 모양이다.
포룡정에 잠시 앉는다. 잠시 앉아 있는 것만으로 신선이 된 것만 같다. 멀리 바람을 따라 하늘거리는 수양버들, 바람결과 함께 잔잔하게 물결치는 연못을 바라보노라면 온 세상 평화가 내 곁에 있는 듯하다. 연못 크기가 크지 않아 더 정겹다. 백제 시대 때 연못의 크기가 어땠는지는 정확히 알지 못하지만, 당시에 연못에서 뱃놀이를 했다는 기록으로 그 크기를 짐작할 수 있다.
궁남지의 옛 모습은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적지만, 소박한 백제의 아름다움만은 여전히 남아 있다. 궁남지에는 신라 진평왕의 딸 선화 공주와의 사랑으로 유명한 백제 무왕의 전설이 전한다. 그리고 전해지지 않는 뭇사람의 사랑 이야기 역시 품고 있을 것이다.
- 부여 부소산성
백제의 마지막 날을 지킨 이곳
천천히 걷다보면 백제의 마지막 날이 머릿속에 그려질지 모른다. 부여 부소산성(사적 제5호)은 백마강 남쪽 부소산을 감싸고 쌓은 사비 시대의 도성이다. 《삼국사기》에는 사비성·소부리성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성이 위치한 산의 이름을 따서 부소산성이라 부른다. 웅진에서 사비로 수도를 옮기던 시기인 백제 성왕 16년(538)에 왕궁을 수호하기 위하여 이중 성벽을 쌓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동성왕 22년(500) 경에 이미 산 정상을 둘러쌓은 테뫼식 산성이 있던 것을 무왕 6년(605) 경에 지금의 모습으로 완성한 것으로 짐작한다. 지금 부소산성은 테뫼식과 그 주위를 감싸 쌓은 포곡식을 혼합해 쌓은 복합식 산성이다.
부소산성은 사비 시대의 중심 산성으로, 백제가 멸망할 때까지 수도를 방어한 곳이다. 그렇게 중요한 역할을 했던 부소산성의 모습이 어떨지 궁금해 눈을 씻고 찾아봐도 산성의 형태가 눈에 띄게 도드라지는 곳은 없다. 산책로를 따라 만나는 부소산성의 자연이 아쉬움을 덜어준다. 초록의 나무들은 눈을 맑게 씻어주고, 지저귀는 새들은 귀의 피로를 싹 가시게 한다. 조금만 더 자세히 둘러보면 나무 사이로 옮겨 다니는 다람쥐도 볼 수 있다.
성 안에는 군창터와 건물터가 남아있는데, 이것으로 부소산성이 유사시에는 군사적 목적으로 쓰였고, 평상시에는 왕과 귀족이 경관을 즐기는 곳이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낙화암(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110호)은 부소산 서쪽 낭떠러지 바위를 가리킨다. 백제 의자왕(재위 641~660) 때 신라와 당나라 연합군이 쳐들어와 왕성에 다다르자, 궁녀들이 굴욕을 당할 바에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이 낫다며 이곳에 와 치마를 뒤집어쓰고 뛰어내렸다는 전설이 전한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낙화암의 원래 이름은 타사암이었다고 한다. 전설 속, 바위에서 떨어지는 궁녀들의 모습이 꽃과 같았다고 해서 훗날 낙화암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1929년, 낙화암 꼭대기에 궁녀들의 원혼을 추모하기 위해 백화정(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108호)이라는 정자를 세웠다. 백화정 위에서 바라보는 백마강이 장관이다.
또 볼 만한 것은 배 위에서 보는 낙화암이다. 고란사(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98호) 선착장에서 유람선을 타면, 넘실대는 백마강 물결 위에서 낙화암을 바라볼 수 있다.
- 천정대
하늘과 가까운 곳
부소산 취령봉 꼭대기에 범바위(호암)라 부르는 넓적한 암반, 근처 절벽 아래 임금바위, 신하바위라 부르는 바위가 솟아 있는 이 일대를 천정대(天政臺)(충청남도 기념물 제49호)라 한다.
천정대에 오르는 길은 왕복 2.97km다. 길지 않은 거리지만 제법 가파른 오르막 내리막을 반복하며 걷다 보면 땀이 맺혀 흐른다. 비교적 평평한 지대가 나왔을 때 오른쪽 길로 내려가면 안 된다. 그곳에서부터 조금 더 오르면 천정대로 가는 표지판이 보인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내려다보이는 백마강 풍경은 이곳이 천정대임을 알린다. 백마강이 잘 내려다보이는 곳에 탁자와 의자가 있다. 이곳에 앉아 먹는 도시락이라면 김치에 맨밥뿐이더라도 꿀맛 같을 것이다.
하늘과 땅, 하늘과 물의 중간지대. 천정대는 고대에서부터 신성시 해온 성스러운 곳이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천정대를 정사암(政事岩)이라 불렀다고 한다. 나라에서 재상을 뽑을 때 서너 명의 후보 이름을 적어 상자 안에 넣어 두고 며칠 후 열어서 이름 위에 도장이 찍힌 사람을 재상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백제 시대에도 하늘을 받들고 섬기던 풍습이 남아 나라의 중대사를 결정하는 데 큰 영향을 주었다. 임금바위, 신하바위 위에서는 임금과 신하가 각각 하늘에 제를 올리고 기원했다는 전설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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