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여행길 8 - 섬진강 530리 길을 따라

이산저산구름 2014. 6. 3. 10:22

 

 

 

- 7일차
구례구-문척면-간전면-남도대교-다압면 소재지-섬진교

 

 

넉넉하니 품이 넓어진 섬진강을 끼고 가는 재미가 솔찬한 길이다. 오산 아래 문척면 길에는 벚꽃나무의 행렬이 이어진다. 기억하시라, 봄날이면 온통 꽃대궐을 이루는 그 길.
강물의 아름다움까지 합세하니, 그 길의 아름다움은 더욱 강력하다.
문척면 뒤에는 간전면이다. 걷다보면 화개와 광양, 즉 경상도와 전라도를 잇는 남도대교가 나온다. 남도대교를 지나면, 봄날 온통 매화천지를 이루는 도사리 청매실마을이 있는 다압면에 닿는다.
강 건너 맞은편에는 악양들판을 낀 하동 평사리길이 있다. 지리산 남부능선 끝단 형제봉(1115m)에 올라 바라보면 지리산 깊숙이 파고든 넓고 푸른 들판은 가지런하다. 80만평 땅으로 ‘거지가 밥동냥을 하며 다 돌려면 1년이 걸린다’는 이야기가 있다. 뜰 앞으론 유려한 섬진강이 길게 뻗어있다.

 

 

드넓은 모래톱과 척박한 논밭이었던 악양들판은 일제강점기 둑을 쌓으면서 만석지기 서넛은 나올 만한 문전옥답으로 바뀌었고 19번 국도가 생기면서 지금의 모습이 되었다. 들판 한가운데 소나무 두 그루가 놓인 자리는 본시 물 가운데 있던 섬으로 악양의 상전벽해급 변화를 보여주는 흔적이다.
박경리 선생의 <토지>에서 ‘고개 무거운 벼 이삭이 황금빛 물결을 이루는 들판’으로 묘사된 악양들판은 만석지기 최참판댁의 소유였다. 최참판댁이 있는 평사리 마을은 이 벌판이 내려다 뵈는 남향받이 산중턱에 있다. 하동군에서 소설 속 공간을 재현한 아흔아홉 칸 최참판댁은 평사리 상평마을 언덕배기에 있다.

 


- 8일차
섬진교-신원마을-답동마을-월길리-송금리-돈탁마을-선소마을-망덕포구

 

 

 

답동마을은 산줄기가 돈박난 것 같다고 ‘돈박골’이라 하는 마을. 강을 가로지르는 철교가 놓이기 전, 커다란 나무가 그늘을 드리운 돈박나루터는 그림 같은 곳이었다.
“우리는 아즉 갱조개로 묵고 산다. 마을이 공동으로 들어가는기라. 그랄 때는 참 재미지제.” 강마을의 삶을 사랑하는 동네 아짐은 “우리 동네가 봄이 제일 먼저 올라오는 동네”라고 자랑 하나를 더 보탠다.
드디어 매화가 피었노라고 해마다 봄소식을 전하는 마을. 난분분 꽃소식은 이곳으로부터 강을 거슬러 올라가 청매실농원 비탈에서 하얗게 축포로 터진다.

 

 

신송, 송현, 금동마을을 지나가는 길. 강바람 넘나드는 푸릇푸릇한 밭엔 일 나온 할매들의 머릿수건이 숨은 그림처럼 박혀 있다.
저 멀리서 쳐다보면 거북등같이 생겼다고 ‘거북등’이라 부르는 마을은 돈탁마을. 마을 앞을 지키고 선 푸른 솔숲은 ‘아름다운 숲’으로도 뽑혔을 만큼 아름다움이 각별하다. 홍수를 막기 위해 심은 나무들이 제 역할을 짱짱히 하고 있다.
돈탁은 신석기 유물인 패총(조개무덤)터가 발굴된 마을이기도 하다. BC 4000년 경 신석기인들이 이 곳에 살면서 조개를 그리 묵고 살았노라고, 빗살무늬토기조각이며 다양한 유물이 나온 곳이다.
봉암산성 표지판을 지나 반가운 이정표를 만난다. ‘망덕포구 2km’.
덕유산을 바라보고 있어 ‘망덕(望德)’이라는 이름이 붙었다는 망덕산 발치를 해안도로가 휘감고있다. 망덕은 ‘가을 전어’로 유명한 곳이지만, 동네 할매는 거기에 또 하나를 얹는다. ‘봄 벙꿀(벚굴)’이다. “큰 손바닥만썩 안하나. 껍데기가 요리 이삐까. 차말로 복스럽고.”
쌀뜨물처럼 뽀얀 알의 맛이 일품인 강굴은 섬진강 물속 바위에 붙어서만 사는데 수중에서 보면 꽃핀 듯 화사하다 한다. 설을 전후해 칼바람 속에서 따기 시작해 4월 말까지 채취하는데 크기가 무려 30cm에 이른다.

 

 

망덕포구 눈앞의 작은 섬은 ‘배알도’(拜謁島). 망덕산을 향해 배알하는 형상이어서 붙은 이름이라 한다. 꼭 저 섬처럼 절하고 싶다. 걷지 않았으면 만나지 못했을 풍경과 사람들, 그 모든 것들과의 인연에 절한다.

 

 

 

 

 

 

섬진강을 따라 걸으며 만나는 문화재들

 

곡성 함허정(전라남도유형문화재 제160호)

강물에 제 그림자를 띄우고 싶다는 듯 정자는 강변 쪽으로 바짝 붙어 있다. 곡성 입면 제월리 군촌마을에 있는 함허정(涵虛亭). 광양·곡성 등지에서 훈도를 지냈던 당대의 문사 심광형 선생이 1543년(조선 중종 38년) 지은 정자이다. 당대의 문사들이 이 정자에서 서로 어울려 시정을 나누었을 풍경을 마루 위에 걸린 편액들에서 짐작해 본다. 봄철이면 향음례(鄕飮禮)가 열리던 곳. 반달 모양으로 굽이쳐 흘러가는 섬진강이 눈앞에 펼쳐진다. 함허정 부근에 군지촌정사(君池寸精舍, 중요민속자료 제155호)도 있다. 심광형 선생이 함허정에 앞서 1535년 지은 건물로, 후학을 길러내던 강학소로 쓰였다.

 

사성암 마애여래입상(전라남도유형문화재 제220호)

구례 오산은 들녘에 불쑥 솟았다. 정상은 542미터. 이 높지 않은 산이 섬진강과 지리산을 조망할 수 있는 맞춤한 터가 되어준다.
오산엔 기기묘묘한 벼랑들이 많기도 하다. ‘벼랑뫼’란 이름이 붙을 만하다. 이 벼랑들 사이에 자리한 절이 사성암(四聖庵). 연기, 원효, 진각, 도선 등 네 스님이 이 곳에서 수도했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사성암은 오래 전부터 영험 있는 기도도량으로 알려져 왔다. 그중에서도 사람들이 지극정성으로 기도 드리는 곳은 깎아지른 벼랑에 선으로 새겨진 마애여래입상 앞. 천년 세월을 변함없이 견뎌오고 있는 부처님이다. 눈과 귀, 코, 입 등이 선각되었으며 고졸한 느낌이다.

 

 

 

 

구례 운조루(중요민속문화재 제8호)

구례 토지면 오미리에 있는 99칸 양반집 운조루(雲鳥樓). ‘바람 따라 넘나드는 구름(雲)처럼, 자유로이 제 집 찾는 새(鳥)처럼’ 고향에 안겨 살고자 했던 이의 집이다. 1776년 류이주(1726∼1797)가 지었다. 금환락지(金環落地) 명당에 자리한 아흔 아홉 칸 집이 품어 온 보물 중의 보물은 뒤주이다. 곳간채에 놓인 이 쌀뒤주는 넉넉한 마음의 발현인 양 각지지 않고 둥글둥글 풍신한 몸매다. 아름드리 소나무 속을 그대로 파내 원통으로 만들었다. 하단부의 구멍을 여닫는 마개에는 ‘타인능해(他人能解)’라고 씌어져 있다. 누구나 마음대로 이 구멍을 열 수 있다는 뜻. 몇 겹의 보안장치는커녕 누구든 쉽게 열 수 있다는 데 이 뒤주의 아름다운 뜻이 담겨 있다. 가난하고 배고픈 사람은 누구든지 이 뒤주에서 쌀을 퍼가도록 함으로써 생색내지 않고 조용히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실천했던 것.

 

광양 ‘윤동주 시인 유고(遺稿) 보존 정병욱 교수 가옥’(등록문화재 제341호)

저 멀리 북간도나 후쿠오카와 함께 떠오르는 시인 윤동주(1917~1945)를 예기치 않게 섬진강 끝자락인 망덕에서도 만날 수도 있다. ‘윤동주 시인 유고(遺稿)보존 정병욱 교수 가옥’. 윤동주의 시 원고가 숨겨져 있던 집이 예전 모습대로 남겨져 있다.
원고가 숨겨져 있던 곳은 마룻장 밑. 말과 글마저 짓눌렸던 시대의 긴장이 오늘에도 전해진다.
일제강점기인 1925년 세워진 이 집은 국문학자 정병욱(1922~1982)의 옛 집이다. 주변 횟집들이 새로 층수를 올리고 포구가 번화해져 가는 동안에도 이 집은 1920년대 점포주택(양조장을 겸한)의 모습을 지키며 지난 시대를 증언하고 있다. 윤동주 시인은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하던 1941년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발간하려 했으나 일제의 탄압으로 여의치 않게 되자 자필원고를 친한 후배 정병욱에게 맡기고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다. 이후 시인은 1943년 일본 유학중 항일운동 혐의로 일본경찰에 검거돼 1945년 2월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옥사했지만, 이 집에서 일제의 감시를 피해 은밀히 보존되던 시인의 유고는 정병욱에 의해 1948년 한 권의 시집으로 간행돼 세상의 빛을 볼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