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여행길 8 - 섬진강 530리 길을 따라

이산저산구름 2014. 5. 27. 09:15

 

 

 

- 5일차
순창 향가마을-남원 생사마을-방산마을-신기마을-가덕마을-사석교-석촌마을-청계동교-청계동 계곡-신기마을-섬진강자연생태공원-동산리-고달교

 

 

아름답지만 생채기를 지닌 미인의 얼굴이 이러할까. 아직 걷히지 않은 안개 속 저만치 괴이쩍은 다리기둥들이 강물에 제 그림자를 담그고 서 있다.
순창 풍산면 향가마을. 그윽한 아름다움으로 옛부터 시인 묵객들을 불러모았다는 곳이다. 하지만 아픈 역사는 이 조그만 강변마을도 비껴가지 않았다. 수탈의 길의 흔적. 일제강점기에 남원 금지에서 순창과 담양을 거쳐 광주로 이어지는 철도를 만들기 위해 일본인들이 놓았던 다리가 기둥만으로 남아 있다. 태평양전쟁이 격화되면서 병기 제조에 따른 철 부족으로 공사가 중단됐던 것. 영산강과 섬진강에는 당시 건설했던 다리들의 교각이 곳곳에 남아 있다. 향가마을의 교각도 그중 하나이다.

강물 위에 띄엄띄엄 놓인 육중한 덩어리들은 잘못 맞춰진 퍼즐조각처럼 비현실적인 풍경을 이룬다. 그 운명의 유사성을 떠올려서인지 어떤 이들은 ‘콰이강의 다리’라고도 부른다.
당시 마을 사람들도 노역에 동원됐다. 끊긴 다리와 짝을 이루는 향가터널도 있다. 길이 380m에 폭은 4.88m. 철도용 터널로 1942년 완성됐다.

 

 

향가마을을 되짚어나와 대풍교를 건넌다. 둑길 지나 도로로 접어들면서 강과는 잠시 작별이다. 대강면 생암리에는 십로사(十老祠, 전라북도문화재자료 제59호)라는 사당이 있다. 어린 단종을 폐위시킨 수양대군에 항거해 벼슬을 버린 이들의 절의를 기리기 위해 세운 사당이다.
생사마을은 섬진강을 두르고 사는 마을. “여가 백사장이 옛날에는 얼매나 좋았는중 안가. 어디랄 것 없이 백사장이 넓었어. 놀기 좋았제. 모래뜸도 많이 하고. 여름이문 사람이 어찌고 많앴어. 인자 그 모래 못 찾어. 사방군디 풀만 있제. 지금도 (그 모래가) 있으문 사람이 빗발칠 건디.”
생사마을에서 만난 할머니는 강변에 백사장 넓었던 그 여름날의 정경을 이야기해 준다.
할머니에게 들은 예전의 섬진강 이야기는 향가마을 어르신들이 “몬야(예전) 안 같어”라며 들려준 이야기와도 다르지 않다.
1970∼1980년대 대량의 모래 채취로 향가마을도 그 많던 모래들을 잃었다. “그 때는 자연보호라는 것도 잘 모르던 시상인께, 퍼가도 그런갑다 했제. 은어도 모래무치도 없어져불고 냇물말(강에서 나는 미역같은 말)도 없어져불고 재첩이랑 다슬기도 예전만 못허고. 멸치매니로 생겨갖고 양님해서 지져묵으문 맛나던 꼽소리도 없어져불고….”
몸으로 강을 살고 겪어온 사람에게 오늘의 강은 사라진 것 많아 허전한 강이기도 하다.
강둑을 따라 걸어 방산마을로 접어든다. 강변에서 만난 할매는 곡성 입면에서 시집왔다.“저 건너가 고향이여. 여그서도 보여”라며 가리키는 곳은 섬진강 저편. “그때는 나룻배가 댕겼어. 나룻배 타고 시집왔제.” 저 건너 고향마을 쳐다보이니 좋기도 하고, 보여도 못가니 더 서럽기도 하고. 그렇게 새각시 시절을 살았단다. 나룻배가 사라진 지는 벌써 오래 전이다. 방산마을 할아버지는 “저 건네 곡성 입면에 오일장이 선께 장보러 가니라고 (나룻배를) 많이 타고 댕겼제”라고 말한다.

 

 

방산마을을 벗어나면서부터 아스팔트길이 한참 이어진다. 표지판 왼쪽길은 순창·대강, 오른쪽길은 곡성·금지. 곡성·금지 쪽을 따라 걷다 사석교를 건너면 석촌마을이다. 가는 길에 고리봉(還峰·708.9m)을 지난다. 섬진강을 조망할 수 있는 산. 고리봉이란 이름은 소금배를 묶어두었던 ‘고리(環)’에서 유래했다고. 100여 년 전에는 하동에서 섬진강을 거슬러 오른 소금배가 남원을 가로지르는 요천 물줄기를 타고 남원성 동쪽 오수정(五樹亭)까지 올랐는데, 당시 소금배가 중간 정박지로 금지평원에 머물기 위해 배 끈을 묶어두었던 쇠고리가 고리봉 동쪽 절벽에 있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청계동교를 건너면 곡성땅이다. 강물 속 점점이 놓인 바위들이 서정적 풍경을 이룬다. 청계동계곡은 임진왜란 때 금산전투에 나섰던 청계 양대박 장군이 의병을 양성하고 활동했던 곳이기도 하다.

 

 

신기마을은 섬진강을 경계로 한쪽은 전남이고 한쪽은 전북인 마을이다. 마을 앞에서 다리 건너면 남원 금지땅이다. 신기1구 마을 사람들 대부분은 강 건너 금지에서 농사를 짓는다. “밥은 여그서 묵고 농사는 거그서 짓고 잠은 또 여그서 자고…. 우리가 겁나 바빠. 하루에도 전라남도하고 전라북도를 몇 번이나 들락날락 함서 살어. 우리가 그라고 발이 넓은 사람들이랑께.” 마을 할매의 너스레다.
신기1구에는 예전에 나루터도 있었다 한다. 그래서 그 때는 마을 이름도 ‘나룻물’ 또는 진촌(津村)이라 했다.
섬진강자연생태공원을 끼고 가는 길은 굽이쳐가는 강물의 아름다움을 느릿느릿하게 맛볼 수 있는 길. 동산리 맞은 편에는 백로들의 서식지가 있다. 숲을 이룬 나무 위가 허옇다. 고달교 아래 섬진강물이 금빛으로 일렁이는 저물녁이다.


 

- 6일차
곡성 고달마을-호곡마을-고리실-살골-두계마을-가정마을-논곡마을-진변마을-계산마을-압록-유곡마을-독자마을

 

 

곡성 고달대교 아래 농로에서 가장 많이 보이는 풍경은 옥수수밭이다. 옥수수박사 김순권 교수와 공동개발한 고달 사탕옥수수는 사탕처럼 달콤한 것이 삶을 때 설탕을 넣을 필요가 없다한다.
섬진강 풍경에 정다움을 더하는 초가원두막도 만난다. 압록까지 이 강을 ‘순자강’이라 했다. 시골 사는 아는 언니 이름 같은 정다운 강이름. 이중환이 《택리지》에서 “임실에서 구례에 이르는 강변은 도처에 절경”이라고 찬양한 그 풍경들이 이어지는 곳이다. 맞은편은 17번 국도. “상식이 통하는 운전자라면 이 곳에서는 자기가 모는 차의 모든 창문을 열어젖히는 것이 타당하다”고 곽재구 시인이 말한 그 길이다. 어여쁜 강줄기 하나의 풍경을 두 개의 길이 나란히 나누어 가진다.
옛날옛날 호랑이 살았다는 범실(호곡)마을 앞에 놓인 호곡나루. 호곡마을 사람들은 “내 다리로만 건너는 시상”을 살다가 집집이 거출을 해서 처음으로 동네배를 만들었을 때는 “워따워따 인자 원없이 출입을 허겄네”라고 동네 잔치를 했더란다. 건너편 배를 끄집어당길 수 있도록 고안했다는 줄배는 이제 줄이 끊긴 채 강기슭에 한가하게 매여 있다.
고리실 어르신한테 이 강의 옛이야기를 듣는다. “저어그 살골 아래에 도깨비살이라고 허는 디가있어. 독살을 놔서 괴기를 잡는디 아 언제는 도깨비가 그랬단 것이여, 니그들이 우리헌티 좋게뵈들 안허믄 밤에 와서 살을 터 불란다, 아 그래서 메밀묵을 쒀다가 믹였더니 무탈했다고 그래.”
도깨비살 유래비에 적힌 바로는 조선개국공신 마천목 장군이 소년시절 부모 공양을 위해 살을 막으려는데 워낙 강폭이 넓고 물살이 세서 엄두를 못내고 다만 기이한 돌 하나를 주워 귀가했는데 그 날 밤 수많은 도깨비들이 몰려와 그 돌이 우리 대장이니 돌려주시면 한다는 간청에 못이겨 돌려주었더니 그 보답으로 막아 준 살이라 한다.

 

 

예전에는 ‘고기 반 물 반’이었다는 섬진강. 잉어 붕어 뱀장어 누치 메기 갈겨니 동자개 가물치 쉬리 모래무지 가래 버들치 동사리 피리 은어 참마자 꺽지 쏘가리…. 이 중 ‘섬진강 동자개(빠가사리) 우는 소리’는 환경부가 선정한 ‘한국의 아름다운 소리 100선’에도 들어 있다.
숨이 가쁘게 뺑덕어멈 고개를 오르면 ‘두계산골 외갓집체험마을’이라고 간판을 내건 두계리다.
두가세월교와 두가현수교를 나란히 앞에 둔 마을은 가정리 녹색체험마을. 곡성섬진강천문대도 있고 강변에 뽀짝 붙어 나 있는 자전거길도 있다.
보성강 줄기를 더해 섬진강이 강다운 자태를 갖추는 곳은 압록. 두 물이 만나는 합수(合水)머리는 모래가람, 모래내, 다사강, 대사강이라는 섬진강의 다른 이름에 걸맞은 새하얀 백사장이 펼쳐지고, 거기에 어우러지는 ‘청둥오리 목 색깔’처럼 푸른 물빛으로 ‘압록’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압록귀범(鴨錄歸帆)’이라 하여 압록으로 돌아오는 돛단배가‘곡성팔경’에 들어 있는 건 그 옛날 이곳까지 돛배가 다녔다는 뜻.
압록교 주변의 식당에 내걸린 간판들은 죄다 ‘참게매운탕’이며 ‘은어’라는 글자를 달고 있다. 섬진강 은어 중에 가장 대차고 실팍한 은어와 굵고 톰박하면서도 달고소한 맛으로 이름난 참게가 이곳에서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