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여행길 9 - 수운 최제우의 인내천 사상과 경주의 유적들을 찾아

이산저산구름 2013. 10. 21. 21:10

 

  

 

 

- 나원리 오층석탑
순백색 청신함에 비례미

 

이제는 경주 신라 나들이다. 먼저 구미산 지구에 있는 나원리 오층석탑(국보 제39호)을 둘러본다.
경주에서는 보기 드문 높이 8.8m 거대한 석탑으로 구조가 짜임새 있고 비례가 아름답다. 통일신라시대인 8세기에 세워졌을 것으로 짐작되는데 1996년 석탑 해체수리 공사시 사리갖춤이 발견되었다.
이 탑은 1000년이 넘게 지났음에도 이끼가 끼지 않고 순백색을 잘 간직하고 있어청신한 기운이 느껴진다.
그래서 '나원백탑'이라고도 하는데, 이런 돌탑이 있었던 절에 대해서는 제대로 전해지는 것이 없으니 오히려 그게 신기하다.
숱하게 그 아름다움을 칭송받아 온 감은사지 삼층석탑보다 덜 알려지기는 했지만 이 돌탑에서 받는 감흥역시 크다. 문화재와 역사 유물이 넘쳐나는 경주지만 여기서도 전혀 밀리지 않는 보배다.
다음은 손순유허비(경상북도기념물 제115호)다.

 

신라 흥덕왕 때 효자로 칭송이 높았던 손순의 효행을 기리기 위한 빗돌이라는데, <삼국유사>에 나오는 전설 같은 내용을 현실에서 확인하니 느낌이 새롭다.
손순은 늙은 어머니를 봉양했는데 손순의 자식이 어머니의 음식을 빼앗아 먹었다. 손순은 아이는 또 얻을 수 있지만 부모는 다시 얻을 수 없다는 생각으로 자식을 산에 묻으러 갔다. 묻으려고 땅을 파니 거기서 돌종이 나와 집에 가지고 와 울렸다. 소리는 당연지사 대궐에까지 크게 들렸다. 임금이 사정을 알아보고는 집과 쌀을 내리고 아이를 묻지 못하게 했다.
경주 오류리 등나무(천연기념물 제89호)는 수령이 450년이다. 한 남자를 사이에 두고 벌어진 자매의 이루지 못한, 그래서 슬프고 애달픈 사랑 이야기가 얽혀 있는 나무다. 자매가 죽은 자리에는 등나무가 생겼고 청년이 죽은 자리에는 팽나무가 나왔다. 등나무 두 그루는 팽나무 한 그루를 휘감고 오른다. 이 등나무의 꽃잎을 말려 신혼부부의 베개에 넣어주면 부부의 애정이 두터워진다고 하며, 사랑이 식어 버린 부부가 잎을 삶아 먹으면 사랑이 되살아난다고 한다.

 


- 진덕왕릉·태종무열왕릉·김유신장군 묘
무덤 셋을 한꺼번에 견주면서 보다

 

 

무덤 세 곳을 함께 돌아본다. 진덕왕릉과 태종무열왕릉, 김유신장군 무덤이다. 무심히 보면 별로 다르지 않고 같은 무덤이다. 진덕왕릉은 입장료가 없지만 태종무열왕릉과 김유신장군묘는 입장료를 받는다. 진덕왕릉은 구미산지구에 들고 나머지는 그렇지 않다.
먼저 찾아가는 경주 진덕왕릉(사적 제24호). 진덕왕(?~654)은 선덕왕(?~647)에 뒤이은 신라 두 번째 여왕으로 본명은 승만(勝曼)이며 마지막 성골 출신 임금이다.

 

 

<삼국사기>는 '타고난 자질이 풍만하고 고우며, 키가 일곱 자나 되고 손을 내리면 무릎 아래까지 내려갔다'고 했다. 진덕왕은 김춘추와 김유신의 보좌를 받으면서 나라를 다스리는 7년 동안 반란을 진압하고 백제의 공격을 막아내고 안으로 힘을 기르는 한편 대당 외교를 통해 고구려와 백제를 적절하게 견제했다. 진덕왕은 삼국통일의 기초를 닦은 임금으로 평가된다.
진덕왕릉에는 별다른 장식이 없다. <삼국사기>는 임금이 죽자 '진덕(眞德)'이라 하고 사량부에 장사지냈다고 한다. 사량부는 경주 서남쪽 일대로 짐작되는데, 지금 있는 무덤과는 정반대 방향이다. 무덤 형식도 제33대 성덕왕 이후에 발달한 형식이고, 12지신상의 조각수법도 신라왕릉의 12지신상 중 가장 뒤늦은 것이다.
이를 들어 진덕왕의 무덤이 아니라는 주장도 있다. 경주에 있는 수많은 능들 가운데 주인을 정확하게 아는 경우보다 그렇지 않은 경우가 더 많다. 진덕왕릉도 그렇다.
여기 왕릉은 걸어 들어가는 둘레 솔숲도 멋지고 가로세로 지르며 이어지는 오솔길은 오히려 다른 어떤 왕릉보다 운치있다. 맑은 하늘 아래 내려쬐는 햇살, 어둑어둑한 솔숲 그늘에서 바라보니 무덤 자리가 더없이 환하다.

 

 

진덕왕릉을 떠나 경주시내로 들어오는 어귀에 태종무열왕릉(사적 제20호)이 있다. 진덕여왕에 이어 등극한 태종무열왕 김춘추(604~661)는 진골 최초 임금으로 백제는 멸했으나 삼국통일을 보지는 못했다.

김유신 장군과 더불어 삼국통일의 주인공으로 꼽히며 우리 역사상 조종(祖宗)법 묘호를 받은 첫 임금이다. 임금이 세상을 떠난 뒤에 붙이는 이름인 묘호(廟號)에, 조(祖)나 종(宗)이 들어간 첫 보기라는 얘기다.
이렇게 대단한 취급을 받았는데도 그이가 묻힌 태종무열왕릉은 다른 무덤들보다 장식이 소박해 무덤가를 두르는 호석(護石)조차 없다. 덕분에 왕릉을 둘러싼 울창한 솔숲이 한층 선명하게 다가온다. 밑둘레 114m, 높이 8.7m로 크기는 한데 아래쪽은 자연석을 쌓고 드문드문 큰 돌로 받쳤다고 한다. 이런 자연스러움이 오히려 사람을 편하게 하는 구석도 있는 것 같다.
태종무열왕릉은 신라 경주에서 주인공이 뚜렷하게 확인되는 유일한 왕릉이라 한다. 바로 앞에있는 태종무열왕릉비(국보 제25호) 이수에 '태종무열대왕지비(太宗武烈大王之碑)'가 새겨져 있는 덕분이다.

이 빗돌은 맏아들 법민(문무왕)이 왕위에 오른 해(661년)에 아버지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세웠고 글씨는 둘째 아들 인문이 썼다. 귀부는 조각이 섬세하고 군더더기가 없다. 여섯 마리 용이 새겨져 있는 이수는 화려하고 웅장하며 사실적이고 역동적이다.
김유신장군묘(사적 제21호)는 밑둘레가 50m, 높이가 5.3m로 무열왕릉보다 규모는 작지만 장식이 대단하다.
김유신(595~673)은 후대에 왕으로 추존된 하나뿐인 신하다. 사후 150년 즈음인 흥덕왕 때 흥무대왕(興武大王)으로 추존되었다.
김유신 무덤은 십이지신상 호석(護石)이 가장 눈에 띈다. 머리는 짐승이고 몸은 사람인데, 모두 의복을 입고 무기를 들고는 오른쪽을 향해 몸을 살짝 비틀었다. 얕게 새겼지만 솜씨는 매우 세련돼 있다는 평을 받는다.
경주에는 여기 말고 진덕왕릉을 비롯한 다른 여러 왕릉에도 12지신상이 있지만 어느 것도 김유신 장군 묘의 그것을 넘어서지는 못한다.
마지막으로 들를 국립경주박물관은 국립중앙박물관 다음으로 규모가 크고 잘 알려져 있는 박물관이다. 어쩌면 여기 있는 유적·유물을 살펴보는 것만해도 하루이틀 갖고는 모자랄 수도 있다.

 

 

 

 

 

* 문화재청에서 발간한 [이야기가 있는 문화유산 여행길] 에서 발췌한 내용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