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이야기가 있는 문화유산 여행길 경상권 - 여행길 9 - 수운 최제우의 인내천 사상과 경주의 유적들을 찾아

이산저산구름 2013. 10. 16. 13:39

 

 

 

 

 

- 남사리 사지 삼층석탑과 북삼층석탑
온갖 풍상 겪어내며 오늘 이 자리에

 

 

경주시 현곡면 남사리에는 유래를 알 수 없는 돌탑이 두 개 있다. 하나는 이름없는 옛 절터에 남아 있는 사지(寺址) 삼층석탑(보물 제907호)이고 또 하나는 북삼층석탑(경주시문화재자료 제7호)이다. 그런데 지금은 놓인 처지가 서로 다르다.
남사리 북삼층석탑은 1973년 경주경찰서 신청사를 준공할 때 기단부만 남겨두고 지붕돌(옥개석) 3개가 경찰서 정원으로 옮겨졌다. 이후 이 곳 주민들의 꾸준한 요청으로 1995년 드디어 옮겨 세우고 명칭도 남사리 북삼층석탑이라 명명하였다. 지붕돌은 네 귀퉁이가 많이 망가졌지만 밑면에 새긴 5단의 받침은 비교적 선명하다.
반면 사지 삼층석탑은 산중 절터에 남아 있어 자태가 훨씬 돋보인다. 저 혼자 잘나기가 힘든 사정은 사람이나 탑이나 매한가지인 모양이다.
사지 삼층석탑은 2단 기단 위에 3층 탑신을 올린 모양인데, 지붕돌의 추녀가 살짝 들려 있어 날렵한 느낌을 준다. 전체적으로 간략함을 추구하는 형식이라 9세기말 작품으로 짐작된다.

 

 


- 남사저수지 배호 노래비
그 시절 국민가수 배호의 '마지막 잎새' 새겨져

 

<그 시절 푸르던 잎 어느덧 낙엽지고/ 달빛만 싸늘히 허전한 가지/ 바람도 살며시 비켜가건만/ 그 얼마나 참았던 사무친 상처길래/ 흐느끼며 떨어지는 마지막 잎새…>
남사저수지에서 만나는 배호의 '마지막 잎새' 노래비는 수운 최제우의 탄생과 득도 현장을 찾아가는 여행길에 뜻밖의 수확이다. 배호는 요즘 표현으로 하자면 국민가수였다. 5060세대들은 다들 배호에 열광하며 한시절을 보냈다.
가슴을 울리는 중저음으로 대중의 감성을 자극했던 배호는 당시로서는 불치병인 신장염에 걸려 1971년 29살로 아깝게 요절했다. 활동하던 5년 동안 '누가 울어' '파도' '울고 싶어' '안녕' '0시의 이별 등 300곡 남짓을 남겼는데 이 가운데 '0시의 이별'은 통행금지 시작 시각에 이별한다는 노랫말 때문에 지난 시절에 금지곡이 됐던 끔찍한 에피소드가 있기도 하다.
배호 노래비가 여기 들어선 까닭은 그이가 부른 노래 '마지막 잎새'의 노랫말을 쓴 정귀문씨가 여기 출신이라는 데 있다. '마지막 잎새'는 배호가 숨을 거두기 넉 달 전인 1971년 7월에 발매된 음반에 담겨 나와 아쉬움과 안타까움을 더했다고 한다.

 

 


- 용담정
동학 교조 수운 최제우의 득도처

 

배호 노래비에서 경주로 가는 방향 200m 지점 오른쪽에 조그만 도로가 있다. 도로를 따라 올라가면 그 끝에 태묘(太墓)가 있다. 36살에 득도를 하고 그 뒤 동학을 포교하다가 마흔 나이에 사도난정(邪道亂正)이라는 죄목으로 죽임을 당한 수운(水雲) 최제우(1824∼1864)가 묻힌 곳이다.
둘레에는 그이와 고락을 함께했던 아내와 큰아들·둘째아들의 무덤이 함께 있다.
수운 최제우 태묘는 천도교조 대신사 수운 최제우 유허비가 서 있는 탄생지, 그리고 득도를 했던 용담
정(龍潭亭)과 더불어 동학농민혁명과 3·1독립운동의 정신적 지주가 된 사상의 발상지다. 태묘를 들른 다음에는 탄생지와 득도처를 둘러본다. 탄생지는 오른쪽에 있고 득도처는 왼편에 있다. 태묘에서 거리는 비슷하다.
현곡면 가정리 탄생지에는 유허비만 우뚝하다. 천도교 중앙총부에서 만든 안내판에는 '포덕(布德) 36년 후천 천황씨인 수운대신사께서 탄생하신 곳'이라 적었고 '포덕 1년 저 앞 구미산 계곡의 용담정에서 만고 없는 무극대도를 득도하시었으니, 이 겨레와 억조창생을 살리실 개벽(開闢)의 천도(天道)를 밝히시었다'고 덧붙였다. 생가터는 2012년 11월 현재 한창 발굴이 진행되고 있다.

멀지 않은 용담정으로 간다. 용담정은 천도교의 성지다. 경주국립공원의 구미산지구의 중심에 해당되는데 들머리에서 용담정까지는 편안한 산길이다. 수운의 동상도 만난다. 도포를 입고 관모를 쓴 채 오른손에 책을 말아 들고 오른손을 높이 들었다. 절박한 무엇인가를 외치는 듯 역동성이 뛰어나 보인다.
용담정에는 수운의 영정이 모셔져 있다. 수운 최제우는 보국안민을 고민하는 가운데 젊은 한 시절을 떠돌아다니며 유람을 했다. 용담정은 그의 아버지인 근암 최옥이 학사(學舍)로 쓰던 곳으로, 오랜 방랑을 끝내고 돌아와 1860년 4월5일 사람이 곧 한울이라는 시천주(侍天主) 계시를 받고 득도한 곳이다.
최제우가 이 해 포덕을 시작한 동학은 양반 지배집단의 부패와 세도정치가 더없이 심해지고 크고작은 민란이 끊이지 않았던 당대를 배경으로 탄생했다. 동학 하면 인내천(人乃天)이다. 사람을 한울 같이 섬기는 사인여천(事人如天)을 실행하면 세상은 평화롭고 사람과 자연이 공생하게 된다는 내용이다. 사람이 동등하지 못하고 사람을 귀하게 여기지 못함으로써 생기는 당시의 어지러운 사회상을 극복하고자 하는 강한 의지를 담고 있다.
교세를 넓혀가던 최제우는 이단사교(異端私敎)로 좌도난정(左道亂政)과 요언혹민(妖言惑民)을 했다는 죄명으로 붙잡혀 1864년 대구성 남문 밖 관덕정에서 효수당한다. 앞서 수운은 1863년 탄압을 예상하고 도통(道統)을 최시형에게 넘기는데 최시형(1827~1898)은 '동학농민혁명'을 통해 최제우의 보국안민 사상을 이어간다.
최제우에 이어 최시형이 앞장서 이끌게 된 동학은 벼슬아치(官) 위주 정치에서 백성(民) 위주 정치로 바꾸기 위한 운동이었으며, 이 땅에 민주주의를 심고자 하는 의지의 발로였다.
최제우에게서 비롯된 동학과 천도교의 역사는 2012년 올해로 포덕(布德) 153년. 인내천과 사인 여천은 얼마나 이뤄지고 있는가, 우리는 도대체 얼마나 사람 중심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는가. 이런 물음을 던지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