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꼴도 사람이 만드는 겁니다 -글꼴 디자이너 노은유
그 일을 위해 태어난 것 같은 사람이 있다. 글꼴 디자이너인 노은유가 그랬다. 풀어 말하면, 그녀는 글자의 모양을 발견하고 매만지는 사람이다. 어떻게 이름마저 은유냐고 묻자, 은유隱喩가 아니라 은유恩裕라고 답한다. 그녀는 이름에 ‘은밀하게 깨닫게 하기’라는 한자어를 품지는 않았지만, 그녀의 메일 주소에는 ‘metaphor메타포, 은유’라는 단어가 포함되어 있다. “은유라는 이름이 직업이랑 맞는 게 참 신기한 것 같아요.” 세상 도처에 은유가 아닌 것은 찾아보기 힘들지만, 특히나 기호라는 것, 언어라는 것, 디자인이라는 것은 온통 은유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우연이었다. 외고를 다닌 노은유는 시각디자인과에 입학한다. 미술이 좋아 미대에 왔는데 친구들을 보고 혼란에 빠진다. 개성 강한 친구들 틈에서 ‘내가 있을 곳이 아닌가?’라는 생각을 하다 만난 게 타이포그래피typography였다. 안상수 선생의 타이포그래피 수업을 들으면서 “아, 이건가?” 했다. 자연스럽게 입학한 대학원에서는 고등학교 때 전공이었던 일본어를 자산으로 ‘소리체’라는 글꼴을 만든다. 일본어 음성 표기를 위한 한글 표기 체계다. 그녀는 글꼴 디자인이, 눈에 띄지 않는 게 오히려 매력적이라고 했다. 그렇게 그녀는 글꼴에 빠졌다.
“어떤 문제를 던져 주잖아요. 제약이 있고, 규칙이 있어요. 풀어 보고 싶은 호기심이 생겨요. 쌍비읍은 왜 없는 거지? 이런 생각을 하면서요.” 노은유가 말하는 글꼴 디자인이 좋은 이유다. 그녀는 간판이나 책을 보면 글자가 아닌 글꼴이, 크기가, 글자의 간격이 먼저 보이는 사람이다. 어릴 때 동네 서당을 다니면서 한자를 배운 일화가 재미있었다. 한 글자를 백 번쯤 쓰고, 훈장은 이상한 글자에 표시를 했다. “억울했어요. 내가 보기에는 다 똑같은 ‘마음 심心’인데. 발바닥을 맞으면서 울었어요.” 이런 그녀의 취미는 조선 시대의 글꼴을 보는 것이다. “옛날 서체들에서 아이디어를 많이 얻어요. 찾는 자에게 다 길이 있죠.” 이렇게 말하며 설핏 웃는 그녀, 정말 자기 일을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글꼴 디자이너 노은유 글꼴 디자이너 노은유](http://www.urimal365.kr/wp-content/uploads/2013/06/lovers_130625_02.jpg)
우리나라에는 글꼴 디자이너가 몇 명이나 될까 궁금했다. “글꼴 회사가 20개 정도니까 모두 100명쯤 되지 않을까요? 글꼴 디자이너가 더 많아져야 한다고 생각해요.” 시장의 수요에 비해 공급이 부족한지 물었다. “참 아이러니한 게 수요는 엄청나게 많죠. 하지만 시장이 없어요. 글꼴은 사서 쓰지는 않아요.”라면서 조심스럽게 덧붙인다. “디자이너들은 항상 쓸 글꼴이 없다고 하고요. 예전에는 글꼴을 구입하는 디자이너도 일부에 불과했죠.” 그렇지만 기업 서체 개발을 의뢰하는 곳도 있다. 조계종은 한글로 만든 최초의 불경인 석보상절에서 따온 ‘석보체’로 인쇄한 불경을 신도들에게 배포할 계획이라고 했다.
“그러니까 쌀의 품종 같은 거죠.” 글꼴 디자인이 무엇인지 정의해 달라고 하자 이런 답이 돌아왔다. 쌀을 주식으로 삼는 나라가 수없이 많으니 쌀의 품종도 그만큼 많을 것이다. 쌀이 없으면 할 수 없는 요리들은 또 얼마나 많을까. 이런 생각을 해 보자니 그녀의 비유가 더 그럴듯하게 들린다. 사람과 가장 가까이 있으면서 눈에는 잘 보이지 않는 디자인이 글꼴 디자인이라고 했다. ‘너무 가까워서 잘 보이지 않는다’라는 말이 묘하다. 하긴 쌀도 그렇다. 밥이나 죽을 요리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심지어 글꼴을 사람이 만드는 거냐는 질문도 받아요.”
노은유는 글꼴을 만든 선배들, 기록되지 않았거나 희미하게 남은 그들을 찾고 싶어 했다. “옛날에 활자를 만드는 사람들은 공인貢人들이었죠. 장인 취급도 못 받았으니까요. 당시의 기록을 찾는 게 쉽지 않지만 시간이 지나면 더 찾기 어려울 테니까요.” ‘글꼴 디자이너’라는 이름이 생기기 전에는 ‘활자체 설계자’나 ‘서체 도안가’, ‘서체 연구자’로 불렸다. 그리고 또 하나. 그녀는 소리체와 로명체를 완성하고 싶다고 했다하나의 글꼴을 만드는 데에는 적게는 2,350자가, 많게는 11,172자가 필요하다. “사람들에게 쓰이게 하고 싶어요. 우연히 마주치는 사람들이 제가 만든 글꼴을 읽고 있는 걸 보면 기분이 이상할 것 같아요. 그 사람은 제가 만들었는지 모르지만 저는 아는 거죠.”
![소리체,로명체 그림 글꼴 디자이너 노은유](http://www.urimal365.kr/wp-content/uploads/2013/06/lovers_130625_05.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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