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희경의 소설 《행복한 사람은 시계를 보지 않는다》에 실린 단편 〈인 마이 라이프〉를 읽다 보면 '손글씨'라는 말이 눈에 띈다. 책 제목과 참 잘 어울린다는 생각과 함께 어린 시절 그리 죽기보다도 싫어했던 '꽁보리밥'이 떠오른다.
미끈미끈 요리조리 입안에서 겉돌며 씹히기를 거부하는 '보리밥알'들은 대바구니에 한가득 담겨 늘 부엌의 한구석에 놓여 있었다. 가난의 '향유물享有物, 자기의 것으로 소유하여 누리는 것'처럼 치부되었던, 그래서 시간의 흐름 속에 꼭꼭 묻어 두고 싶었던 보리밥. 그런데 우리는 지금 그 보리밥을 잘한다는 '맛집'을 찾아다닌다. 물질의 풍요가 가져다 준 보리밥에 대한 향수는 보리밥의 가치를 바꾸어 놓았다. 우리가 보리밥을 찾는 것은 단순히 과거로의 회귀가 아니다. 보리밥에 대한 새로운 가치 부여이다.
'손글씨'와 '손편지'가 그렇다.
그 시절 국군 장병 아저씨께 위문편지 한 통 쓰는 것이 얼마나 버거웠는지, 연애편지 한 통을 쓰며 얼마나 많은 편지지를 꾸기적거려 버렸는지, 대문 앞을 서성이며 우체부 아저씨를 얼마나 애타게 기다렸는지를 떠올려 보면 '이메일'이 얼마나 편리한지 새삼 느끼지만, 낱낱의 글씨에 쌓인 정성과 설렘 그리고 기다림의 정서는 왠지 도둑맞은 기분이 든다.
그때 내 눈에 들어왔던 것은 저렇게 커다란 간판이 아니라 귀퉁이에 붙어 있던 작은 간판이었다. 거기에는 눈에 잘 띄지 않는 손글씨로 이렇게 씌어 있었다. 《은희경, 인 마이 라이프》
휘갈겨 쓴 손글씨에 배어 있던, 그 분노와 슬픔의 무게에 심장이 찌르르했었다고 나는 기억한다. 《염승숙, 자작나무를 흔드는 고양이》
몇 날 며칠을 고민해서 손편지를 쓰는 대신 그때그때 생각나는 대로 메일이나 문자, 그도 아니면 바로 전화를 해 버리는 소통의 속도전에 익숙해진 …… 후략 《김이은, 고양이 소설에 고양이가 없다》
생활을 편리하게 하는 디지털 시대에도 번거로움을 마다하고 손편지를 고집한다면 너무 시대에 뒤떨어진 아집이겠지만 인정이 갈수록 삭막해지는 이 시대에는 사람 냄새 풋풋해서 좋지 않은가. 《최균선중국 동포 작가, 편지를 쓰시라》
'이메일'이 '빠름'을 최우선의 가치로 여기는 디지털 시대의 아이콘이라고 한다면, '손글씨'로 또박또박 눌러 쓴 '손편지'는 아날로그 시대의 '느림'의 가치를 깨닫게 한다. '손글씨'와 '손편지'는 비단 '이메일'의 '빠름'에 대한 반발만은 아니다.
'손글씨'에서 묻어나는 한 자 한 자의 정성은 '손편지'의 감동으로 전해진다. '손글씨'와 '손편지'를 통해 우리가 잊고 살았던 '느림'에서 '정성'으로 그리고 '감동'으로 이어지는 아날로그 시대의 정서가 고스란히 살아나고 있는 것이다. '손편지'에 해당하는 영어는 '스네일 메일snail mail'인데, '손편지'의 '느림'의 정서가 'snail달팽이'에 고스란히 녹아들어 있다.
'손글씨'는 '타자기나 컴퓨터를 이용하지 않고 손으로 직접 쓴 글씨'이며, '손편지'는 '손에서 손으로 전해지는 편지, 또는 손으로 직접 쓴 편지'라는 뜻으로 '이메일'에 상대하여 '편지'를 이르는 말이다. '손글'과 '종이편지'는 그 말맛은 좀 다르지만 각각 '손글', '손편지'와 같은 말이다'손글'은 워드 프로세스를 이용하지 않고, 그래픽 프로그램을 이용하여 마우스로 그린 글자를 의미하기도 한다.
아날로그 손글이 좋다. 《한겨레신문, 2011. 7. 11.》
어떤 때는 컴퓨터로 써 보기도 했지만 손편지보다는 느낌이 강하지 않았고, 왠지 섭섭해하는 눈치였습니다. 손으로 쓰면 힘들지만 아내가 손글 편지를 원하니 어찌할 도리가 있습니까? 아내 원하는 대로 해야지요. 《오마이뉴스, 2009. 1. 13.》
그것은 인간다움이다. 전자 우편은 편리하지만 종이편지의 감동이 담겨 있지 않다. 《동아일보, 2000. 7. 10.》
종이편지보다 이메일로 소식을 전할 때 거짓말을 더 많이 한대요. 난 디지털로 편지 주고받는 거 싫어요. 아날로그가 좋아요. 《장은진, 아무도 편지하지 않다》
'손편지'와 '종이편지'는 '이메일혹은 전자 우편'이라는 말이 쓰인 이후에 만들어진 말이다. 이들은 '이메일'과 비교하여 종래의 '편지'가 갖는 문화적·정서적 특성을 드러낼 필요성과 '편지'의 가치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졌기 때문에 만들어진 말이다. '손글'과 '손글씨'도 마찬가지이다.
'손글씨, 손편지'와 같은 유형의 말들이 최근에만 만들어진 것은 아니다. 그 이전에도 '손국수기계국수', '손칼국수칼국수', '손짜장짜장' 등이 같은 이유에서 만들어졌다. 이들은 모두 '기계면기계로 뽑은 면'으로 만든 음식과 '손면손으로 직접 뽑은 면'으로 만들어진 음식을 차별화하고, '손면'만이 갖는 음식의 가치를 드러내기 위한 것이다. 전자 매체의 발달과 함께 그것의 존폐를 놓고 한때 세간을 떠들썩한 논쟁으로 끌어들였던 '전자책'과 '종이책', 그리고 '전자사전'과 '종이사전'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컴퓨터와 현서의 비염에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치는 반지하의 만성 습기를 수백 수천 쪽에 이르는 법이라는 이름의 종이책들이 빨아들이고 있기 때문이었다. 《함정임, 엷은 안개 사이로》
전자책보다는 여전히 종이책을 사서 보시고 손글씨 편지를 즐겨 쓰시고 먹을 갈아 향이 밴 사군자를 치시고 디지털보다는 구닥다리 아날로그 라디오가 더 편하다고 하시니까요. 《박현경, 네 마음을 보여 줘》
'손글씨, 손글, 손편지, 종이책, 종이사전' 등은 '종이책'을 제외하면 모두 2000년 이후에 만들어진 말들이다. 이들은 디지털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아날로그 시대의 가치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한다. 이 시대의 진정한 가치가 무엇이든 '종이책' 한 장 한 장을 넘기는 잠깐의 여유로움과 또박또박 써 내려간 '손글씨'의 낱낱에 묻어나는 일상의 상념들이 더 이상 불편함의 아이콘이 아니라 이 시대를 살아가는 작은 행복의 날갯짓이 될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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