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을 움직이는 시

그림자가 닿을 수 있는 거리

이산저산구름 2012. 11. 20. 1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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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태와 싸워서
선생님께 불려 간 날
억지로 손을 잡게 하고
교문 나갈 때까지
절대 놓지 말라고 했다

오늘따라 교문은 멀고
병태는 밉고
운동장을 가로질러 가는데
그림자가 먼저 간다

나는 그림자 손으로
병태의 그림자를 툭 쳤다
병태도 그걸 봤는지
그림자 발로
내 그림자를 툭 찬다

그림자가 싸운다
그림자가 엉킨다
그림자가 춤춘다
그림자가 킬킬거린다



― 「그림자 싸움」 중에서 (『바다는 왜 바다일까?』)




그림자가 닿을 수 있는 거리

 


친구와 화해를 하고 싶은 친구에게



무슨 일 있니?


오늘 따라 힘이 없어 보이는구나. 혼자 학교 가고, 쉬는 시간에도 말없이 책상에만 앉아 있고, 점심도 혼자 먹고, 혼자 집에 가고…….


친구와 싸워서 속이 상하다고?


그래, 그랬구나. 누구나 싸울 수 있지. 싸우고 나면 당연히 속이 상하고. 그런데 혼자 지내보니 재미가 없지? 친구가 먼저 말을 걸어줬으면 좋겠다고? 그런데, 네가 먼저 다가가기는 싫다고?


이해해. 나도 그렇거든. 마음이 풀리면 몸이 다가갈 수 있을 것 같은데 마음이 쉽게 풀리지 않거든. 그럴 땐 거꾸로 해봐. 몸이 먼저 다가가는 거야. 그림자가 닿을 수 있는 거리만큼.


꼭 무슨 말을 하라는 것은 아니야. 그냥 가까이 있다가 보면 생각지도 않은 일로 마음이 풀리거든. 이를테면 친구 그림자와 네 그림자가 붙었다 떨어졌다 하는 모습이 싸우는 것처럼 보였다가, 춤추는 것처럼 보였다가, 장난치는 것처럼 보였다가, 그런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웃음이 나오니까.


친구가 힘든 일로 시무룩할 때, 뭔가 위로의 말을 해주고 싶은데 생각나지 않을 때도 터벅터벅 걷고 있는 친구 그림자 옆에 네 그림자를 선물하는 거야. 말없이 옆에 있어주기만 했을 뿐인데도 힘이 되거든. 친구는 그런 거니까. 그림자가 닿을 수 있는 거리에 있어주는 거니까.


이장근 올림

이장근
1971년 경북 의성에서 태어났으며, 한남대학교 국어교육과를 졸업했다. 2008년 시 「파문」 으로 매일신문 신춘문예에 당선되었으며, 2010년 동시 「귓속 동굴 탐사」 외 11편으로 제8회 푸른문학상 ‘새로운 시인상’을 수상했다. 현재 서울에서 중학교 국어 교사로 일하고 있으며, 지은 책으로 동시집 『바다는 왜 바다일까?』, 청소년시집 『악어에게 물린 날』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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