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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인생 에디팅을 위해 멘토 잘 만나야지요_박맹호(민음사 회장)

이산저산구름 2012. 5. 24. 13:37

 

자기 인생 에디팅을 위해 멘토 잘 만나야지요_박맹호(민음사 회장) DEL

 

 

인문·사회계열 출신이라면 민음사의 책 한 번쯤 접하지 않고 30대를 맞이하긴 힘들었을 것이다. 1966년 설립돼 창립 50주년을 목전에 두고 있는 민음사는 매출액 기준으로 1~2위를 다투는 단행본 출판사다. 1972년 ‘세계시인선’, 1974년 ‘오늘의 시인총서’를 발간, ‘문학과지성 시인선’(문학과지성사), ‘창비시선’(창작과비평사)과 함께 상업적인 시집 붐을 일으켰다. 1976년 문학 계간지 ‘세계의 문학’을 창간하고, 이듬해엔 ‘오늘의 작가상’을 만들어 이문열, 조성기, 강석경, 이만교 등 중견 작가들을 발굴했다. 198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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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인생 에디팅을 위해 멘토 잘 만나야지요_박맹호(민음사 회장)

2012-05-17 1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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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사회계열 출신이라면 민음사의 책 한 번쯤 접하지 않고 30대를 맞이하긴 힘들었을 것이다. 1966년 설립돼 창립 50주년을 목전에 두고 있는 민음사는 매출액 기준으로 1~2위를 다투는 단행본 출판사다. 1972년 ‘세계시인선’, 1974년 ‘오늘의 시인총서’를 발간, ‘문학과지성 시인선’(문학과지성사), ‘창비시선’(창작과비평사)과 함께 상업적인 시집 붐을 일으켰다. 1976년 문학 계간지 ‘세계의 문학’을 창간하고, 이듬해엔 ‘오늘의 작가상’을 만들어 이문열, 조성기, 강석경, 이만교 등 중견 작가들을 발굴했다. 1981년엔 ‘김수영 문학상’을 제정했다. 1990년대 들어 인문·사회과학 분야 이외에 아동도서물도 출판하기 시작했다. 비룡소(1994), 황금가지(1996), 사이언스북스(1997) 등의 자회사를 설립했다. 큰 딸 박상희(50)가 이끈 비룡소는 국내 최대 아동전문 출판사로 성장, 민음사 전체 매출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이 민음사를 세운 박맹호(78) 회장은 충북 보은 출신이다. “박 씨 땅 밟지 않고 보은을 지날 수 없다”는 말이 있었을 정도의 갑부 집 맏이였다. 가업 잇기를 원했던 부친의 뜻과 달리 서울대 불문과를 졸업한 뒤 ‘돈 안 되는’ 출판업에 홀연히 뛰어들었다. 서울대 조소과를 나온 맏딸은 물론, 서울대 산업공학과 졸업한 뒤 뉴욕대학에서 멀티미디어 아트를 전공한 차남이 사이언스북스를, 지금은 쉬고 있는 장남은 서울대 경제학과를 나와 미주리주립대에서 경영학 석사를 딴 뒤 오랫동안 민음사를 경영했다. 단지 돈만 많은 집이 아니라 보기 드문 ‘서울대 집안’인 셈이다. 고려대 가정교육과 출신의 맏며느리가 자회사 ‘민음인’을 이끌고 있으니 말 그대로 ‘출판 집안’이기도 하다. 강남출판문화회관 민음사 회장 집무실에서 진행된 인터뷰 내내 박맹호 회장은 기자에게 전혀 하대(下待) 없이 존칭어로 시종했다.

“신용을 잃으면 모든 걸 잃는다”
Q. 부친의 뜻을 거스른 채 출판업을 하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선친은 유아독존의 사고와 행동방식을 가지신 분이었지요. 제가 출판을 한 이유 중에는 아버지에 대한 반발심도 있었는데, 돌이켜보면 내가 해온 행동이 아버지하고 똑같더라고요.(웃음) 늘 아버지에 반발하고 살았다고 생각했는데 실제로는 닮았으니, 나의 멘토는 아버지인 셈이지요.”
Q. 부친께서 사업을 하셨던가요?

“하셨죠. 스케일이 저보다는 훨씬 컸죠. 제가 하는 출판 같은 건 그것도 사업이냐,며 인정을 안 하셨지요.”
Q. 어느 분야의 사업이었나요?

“시골 유지라는 게 대개 정미소 아니면 운수업이에요.”
Q. 아, 그렇군요.

“정미소를 충북에서 가장 크게 한 편이셨어요. 그걸 기반으로 해서 몇 번 국회의원에 출마하시기도 했고요. 번번이 고배를 마셨는데도 회복해서 다시 도전하시더라고요. 7전 8기라는 말도 있지만, 그 살아 있는 실례와 같은 분이셨어요.”
Q. 충북 보은에서 하신 거죠.

“박(朴)자, 기(起)자, 종(鍾)자를 쓰셨는데, ‘보은대동정미소’라는 회사였어요. 슬하에 7남매를 두셨는데, 내 아래로 남동생이 하나 있고, 위로 누님 한 분 계시고 여동생이 넷 있어요.
Q. 그러면 2남 5녀. 그중에 맏이셨네요.
“남자로선 맏이죠.”
Q. 당연히 부친께선 맏아들이 본인의 사업을 이어야 한다고 생각하셨을 텐데요.

“그걸 갈망하셨는데 제가 들어주지 않아서 지금도 죄송해요.”
Q. 왜 안 들어주셨습니까?

“우선 제 적성에 맞지 않아서요.”
Q. 그 정미소 운영이라는 것이요?

“네. 적성에도 맞지 않았고, 또 시골이라는 한계를 제가 못마땅해했죠. 시골 유지(有志) 따위 해봤자 아닌가, 하는. 가풍이랄까, 이런 것도 뜻에 맞지 않았고.”
Q. 혹 부친이 종손이셨습니까?

“종손이시죠.”
Q. 오, 박 회장님 종손이시군요.

“네. 밀양 박 씨인데, 우린 국당공파예요. 국당공 어른은 조선 시대에 가야금으로 유명했던 분이에요.”
Q. 뼈대 있는 가문이시구나. 어쨌든 부친께서는 맏아들을 서울대 불문과 보내실 때 졸업하면 당연히 내려와서 가업을 이을 줄 알았는데, 회장님께서 되도 않는 출판사를 하겠다고 하신 거네요.

“학교도 제가 선택을 한 거예요. 원래 영문과를 지망했는데, 성적이 좋지 않아서 재지망으로 불문과에 배당되었어요. 어쨌든 사업도 사업이었지만, 선친께서는 정치에 야망이 있어서 당신 정치기반 좀 챙겨달라, 이런 요구도 있었지요. 그건 제 적성에 전혀 맞지 않았어요.”
Q. 조직관리 이런 거 말씀하시는군요.

“네.”
Q. 부친은 그러면 출마만 하시고 당선이 되신 적은 없나요?

“제5대 때 한 번 했죠.”
Q. 5대 국회요? 하하. 그게 몇 년입니까?

“4·19 나던 때.”
Q. 아, 1960년이요? 어느 당으로 나가서 되셨어요?

“민주당이었어요. 사업을 하시면서도 평생 민주당이라는 야당에 소속되어 있었어요. 그래서 사업을 하면서 엄청 힘들어하셨는데, 그때마다 불굴의 투지로 일어나더라고요. 그 점은 늘 감탄했고, 나는 도저히 저렇게 못하겠다 싶었어요. 하지만 제가 가장 불만이었던 것은 집에 개인생활이 없다는 거였어요. 늘 유권자가 몰려와서, 동네 여관방도 아니고, 뭐, 견딜 수가 없었어요.”
Q. 낯선 사람들.
“저는 성격상 조용하고.”
Q. 혼자 있는 시간도 좀 필요하고 그러셨겠어요.

“저는 사실 제가 문학에 관심이 있는 줄 몰랐어요. 그런데 습작을 몇 번 끼적거렸더니 여기저기에서 입선이 되더라고요.”
Q. 소설이요? 시요?

“산문이었지요. 별 볼일 없는 데서….”
Q. 문재(文才)가 있으신 거죠. 회장님이야 시답잖은 데라고 말씀하시지만 그래도 그게 아무나 됩니까? 어쨌든, 멘토라 할 때는 이런 점이 있습니다. 직접 부친께서 회장님을 앉혀놓고 얘야 인생은 이렇다, 가르치진 않았지만 선친의 생활 속의 모습, 평소의 모습을 나도 모르는 사이에 배웠거나 나도 내 아버지와 이렇게 비슷하게 살아가고 있었구나, 그런 느낌을 받아야 멘토인 듯합니다. 하신 말씀 중에서는 어떤 불굴의 의지, 포기하지 않는 어떤 자세, 요런 걸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런 점도 있죠. 또 하나는 고압적이고 남의 말을 듣지 않는 면이랄까요. 그런 환경을 무척이나 싫어하면서 자랐는데 어느 날 보니 제가 똑같이 아이들한테 그러더라고.”
Q. 자제분들한테요?

“우리 근섭(장남)이가 그래요. 내가 출판하는 걸 좀 도와달라니까 안 하겠대요. 저하고 맞지 않아서 못하겠다고 하더라고요. 하지만 (내가 강요하니까) 출판할 때는 잘했어요. 우리나라에 장르문학 등을 잘 정착시켰고, 《부자 아빠 가난한 아빠》 등 몇 가지 히트작을 냈는데, 그건 나하고 맞지 않았거든요. ‘야, 기왕이면 본격적으로 인문학을 하든가 하지 왜 변두리 쪽을 하니?’ 이런 식으로 늘 타박을 했지요. 인정하지 않은 거죠. 아이가 참고 참다가 재작년인가 ‘저는 출판 재미없어요. 안 나옵니다. 내일부터’ 말하더니, 그날로 사라져서는 지금까지 안 나와요.”
Q. 뭘 하고 있습니까? 장남은.

“(천연덕스럽게) 산천유람할 거예요, 아마.”
Q. 진짜요? 혼자서요?

“그럼요. 매일 등산 가고.”
Q. 부친께서는 회장님이 출판하는 것을 결국 인정하신 셈 아닌가요, 결과적으로?

“인정했다기보다는 아버지하고 나하고 경제권이 다르니까 충돌할 일이 없었어요. 당신은 당신 사업해서 잘되고 나는 내 사업해서 먹고살고. 그러니까 다툴 일이 별로 없었죠. 하지만 늘 제 어머닌 이 방앗간 어떡하냐, 이 자동차 어떡하냐, 늘 안타까워 하셨어요. 정미업에서 나중에는 버스 사업도 했으니까요. 조금 맥락이 다른 얘기지만, 저는 소위 전통사상에 대해서 굉장히 개혁적이라고 생각해왔는데, 실제로는 옛날 사람들처럼 살고 있더라고요. 가령 제사를 모신다든지, 대가족주의를 인정한다든지… 이런 점은 대체로 답습하는 게 아닌가, 그런 생각을 해요.”
Q. 부친께서는 실례지만 대학 교육을?

“한학 대가 중에 임창순 선생이라고 있어요. 임 선생하고 같이 한학 동문수학을 했어요.”
Q. 그러면 국가교육제도 기관 기준으로는 고등학교까지만 하시고 한학을?

“고등학교도 안 했고.”
Q. 그냥 오로지 한학만.

“예, 한학만. 근데 머리가 아주 좋은 양반이에요.”
Q. 옛날 방식의 공부를 하셨군요.

“조실부모를 해서 그러셨을 거예요.”
Q. 아, 일찍 돌아가셨군요. 회장님의 할아버지 할머님이. 그럼 거의 혼자 힘으로 글을 읽으신 거네요.

“아주 탁월하신 분이에요. 스무 살에 보은에서 세금 납세 1등 기록을 낸 분이니까.”
Q. (경악스러운 표정으로) 약관 20세에 보은서 납세 순위 1등이요?

“스무 살 이후 돌아가실 때까지 평생 그 타이틀을 내놓지 않았죠. 얼마나 탁월한 분이었는지, 기억나는 일화 하나만 말씀드리죠. 아버님께서 해방 후 서울로 올라오셨는데, 당시 미군 부대가 지금 한남동에 진주하고 있었어요. 거기서 건설회사를 했어요. 동광건설주식회사라고. 그때 미국 여자를 세컨드도 아니고 서드로 데리고 사업을 하더라고요.”
Q. (더욱 경악스러운 표정으로) 미국 여성이요?

“당신은 영어를 하나도 못하면서, 영어하는 미국 여자를 데리고 살면서 사업을 벌이실 정도였으니 얼마나 탁월한 역량입니까?”
Q. 부친이 몇 살 때 얘깁니까?

“그게 30대 그렇게 될 거예요.”
Q. 아니 스무 살 전에 보은에서 뭘로 돈을 버셨는데요. 그때도 정미소였습니까?

“정미소가 아니고 부동산을 했을 거예요.”
Q. 이야, 대단하시네.

“지금도 보은에서는 신화적인 인물이에요. 그래서인지 사회활동만으론 부족하다, 국회의원도 하겠다고 나서신 거지요.”
Q. 폭을 넓히기 위해서.

“정주영하고 비슷한 사람이에요.”
Q. 제가 볼 때는 부친의 그런 사업 감각, 요즘 표현으로 비즈니스 능력이 물론 회장님께도 갔지만, 하나 건너서 손주한테 간 게 아닌가 싶네요. 박근섭 사장한테. 출판계에서는 ‘자기 아버지가 평생 책 팔아서 번 돈을 투자로 3년 만에 벌었다’고 회자되던데요.

“예, 그랬대요.”
Q. 그렇게 벌 수 있는데 왜 책 하나하나 만들어서 이 고생을 하며 벌겠냐, 그러니 울화통이 터지지 않겠느냐, 그게 출판계의 중론이었어요. 이건 제 비유입니다만, 몽고 벌판에서 뛰어다녀야 될 사람을….

“그게 내가 참 잘못한 거라고 생각해.”
Q. 연전에 박근섭 사장과 저녁 먹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습니다만, 일반적으로 출판인들이 대개 꼼꼼함, 치밀함 이런 게 필요한데 박 사장은 거국적으로, 거시적으로 보고 분석하는 능력이 탁월하더라고요.

“요새 라디오에 ‘교육을 말합시다’라는 프로가 있던데, 그걸 듣다 보니 내가 아이를 왜 이렇게 몰았을까, 이런 회한이 들더라고요.”
Q. 뭐 자식이 자식의 인생만을 살 수는 없죠. 박 사장이 처음에 민음사 영업부장으로 들어와서 한 10년 했죠? 많이 참았죠, 그 양반도?

“어유, 많이 참고 병도 나고 그랬지.”
Q. 회장님과 달리, 자기 부친하고 동종 업종이라는 게 결정적인 문제였던 것 같군요.

“그러니까 애들한테는 간섭하지 말아야 되는 거더라고요.”
Q. 그건 그렇고요. 회장님 입장에서 부친께서 했던 말씀 중에서도 본인에게 영향을 많이 끼친 것이 있습니까?

“절대로 신용을 잃지 마라. 신용을 잃으면 모든 걸 다 잃는다. 그 말씀을 하셨어요.”
Q. 참 진짜 중요한 말씀이네요.

“평생 사업을 하면서 은행 거래를 잘 안 했어요. 신용 잃기 딱 좋은 일이라서요. 출판업은 어음 끊어서 돈을 돌리다 보면 망하기 쉬운 구조예요. 그래서 예금은 맡겨도, 은행대출이나 신용거래는 극히 꺼려 왔죠.”
Q. 사업 초반에는 자금도 필요하셨을 텐데요?

“아, 그건, 마누라 고생을 많이 시켰어요. 마누라가 약국을 했거든요. 거기서 버는 돈을 몽땅 긁어다 쓰고 또 쓰고. 10원짜리, 20원짜리 약을 팔아가지고서 목돈을 대는데 (남편이) 이자도 안 가져와, 본전도 안 가져와, 그러다 과로로 쓰러졌어. (한숨을 크게 쉬며) 이야~ 참담하대. 인사동에 있는 내과에 입원해 있을 때, 처가 식구들이 다 왔는데 몸 둘 바를 모르겠더라고. 마누라가, 이런 얘기하면 좀 우습지만, 고등학교 때고 대학교 때고 1등을 놓치지 않은 아가씨였거든.”
Q. 재원이시네요.

“그런데 어디서 이런 날탕한테 맡겨가지고 이 고생을 시키는구나, 하는 눈으로 날 보는 듯하니까 정말 몸 둘 바를 모르겠더라고.”
Q. 사모님이 이대 약대 나오시지 않았나요?

“서울대학교요.”
Q. 더더군다나요? 하하하. 몇 살 아래시죠? 회장님보다.

“두 살.”
Q. 잘못하셨네요. 많이 잘못하셨네요.

“많이 잘못하다마다. 그래서 지금도 내가 ‘모든 건 마누라의 힘이다. 나의 힘의 원천은 마누라다.’ 이런 얘기를 기회 있을 때마다 쓰고 반복하고 있어요. 허허허.”
Q. 그 와중에도 회장님 신용이었으면 당연히 은행에서 돈을 빌릴 수 있을 텐데도 대출을 안 하셨단 말이에요?

“안 했어요.”
Q. 그게 다 부친 말씀 때문에?

“갚을 능력도 없고. 빌려오면 틀림없이 못 갚는다, 그러면 금치산자나 파산자가 된다, 이런 생각에. 그냥 꾸물거려도 나 혼자 하자, 그래서 평생 은행 융자 없이 살았어.”
Q. 사업이야 그렇다 치고 내 집 마련, 자식들 집 마련, 사옥 마련, 이때도 은행 돈이 안 들어갔단 말입니까?

“스텝 바이 스텝으로 했어. 노량진 사옥이 아마도 민음사 첫 번째 사옥일 텐데, 아버님이 나 결혼했을 때 1억을 내서 사주신 집을 팔고, 내가 따로 들었던 전세금하고 건물에 들어 있던 세입자들 전세금을 합해서 인수했어요. 거기서 한 발짝 한 발짝 올라온 거예요.”

아는 사람만 아는 팩트인데, 국내 단행본 출판사들이 매출액을 발표할 때 거의 모든 회사들이 출고액을 기준으로 한다. 우리나라 출판은 위탁판매 시스템이라, 출판사에서 서점으로 나간 책들 가운데 팔리지 않은 책들은 수개월 뒤 다시 반품되는 일이 허다하다. 그래도 일단 회계상 매출로 처리하는 게 관례다. 그러나 민음사는 철저하게 수금액 기준으로 발표한다. 창고에서 얼마가 나갔든 책이 소비자에게 팔려 실제 들어온 돈을 매출로 친다는 얘기다. 그 철두철미함이 어디서 연유하나 궁금했는데 이번에 의문이 풀렸다. 수십 년 동안 사업을 하며 은행돈 한 푼 안 썼다면 뭐 더 할 말이 있겠는가.

Q. 민음사가 지난 수십 년 동안 은행 돈 10원 한 장도 안 썼다는 게 믿기지가 않네요. 그러면 회장님 입장에서는 요즘 몇몇 출판사 사장들이 사업이 안 된다는 이유로 직원 월급을 안 준다, 체불·체임한다는 게 이해가 안 되겠네요.

“그런 일은 절대로 없지요.”
Q. 정말로 이해가 안 될뿐더러, 그냥 불한당 같은 인간이라고 생각하시겠네요?

“하하하. 그 대신 (월급이) 짰지. 짜게 달려왔어요.”


책 꾸준히 읽는 3만 명이 사회를 지탱하는 힘
Q. 부친 외에 영향을 받은 분은 없습니까?

“그 외에는 전부 책 이런 데서 영향을 많이 받은 편이에요.”
Q. 네. 사람으로서는 부친이었던 셈이고, 사상가나 작가나 한둘이 아니겠습니다만 그중에서도 한두 명을 굳이 좀 꼽아주십사 하면?

“카네기의 《인간 처세학》이란 책이 있었어요. 그 책에 누구나 만나면 공손하게 대하고 칭찬하라, 이런 말이 있어요.”
Q. 누구에게나?

“그 말이 그 책 전체의 근본정신이에요. 중학교 때 읽어서 세세한 내용은 기억나지 않지만 그 말이 나한테 깊이 뿌리 내렸던 것 같아요. 그래서 지금도 험담을 거의 안 하는 편이에요.”
Q. 아유, 험담만 안 하시는 정도가 아니지요. 출판계에서 2세들이 경영 일선에 다 적극적으로 등장하고 있는데요. 회장님 자제분들의 경우는 벌써 10년, 5년 이렇게 돼가고 있는데 다들 평들이 좋아요. 물론 세평이 전부는 아니지만 비즈니스 세계에서 좋은 평판 듣는 게 쉬운 일은 아니잖습니까? 중·고등학교 학창시절 말고 성인이 된 이후에 크게 영향을 받았다고 느껴진 책은 또?

“그건 내 출판 궤적하고 마찬가진데, 우선 기억나는 건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 나오는 그 불굴의 투지! 스칼렛 오하라가 끝까지 살아남아서 농장을 되찾는. 그리고 로맹 롤랑의 《베토벤의 생애》라는 책이 있었죠. 저도 어려서부터 귀가 그렇게 나빴어요. 양쪽 귀가 다.”
Q. 특별한 계기가 없이?

“아니, 어려서부터 중이염이 쭉 있었죠. 나중에 양쪽 모두 수술을 해서 완치됐지만. 거기서 헤어 나오고 싶은 마음이 절실했는데, 베토벤 역시 귀 때문에 얼마나 고생을 했어요? 그래서 아주 감동했죠. 그 사람이 그런 조건에서도 작곡도 하고 지휘도 하고, 충격이었어요. 철학 쪽으로는 윌 듀런트라는 사람이 있어요. 《철학 이야기》를 쓴 사람 말이에요.”
Q. (긴가민가하면서도 시침 뚝 따면서) 예, 유명하죠….

“읽으면서 철학책이 재밌는 줄 처음 알았어요. 확~ 서광이 비치는 거 같았죠. 니체고 하이데거고 다 나오는데 그렇게 흥미로울 수 없었죠. 그리고 서머싯 몸의 《달과 6펜스》하고 《인간의 굴레》도 감명 깊게 읽었어요. 고등학교 들어가서부터는 중국 고전을 읽기 시작했죠. 고전이래야 《수호지》, 《삼국지》 등인데, 저는 삶의 방법론을 《삼국지》에서 배웠다고 할 수 있어요. 《삼국지》는 내가 언젠가는 한번 만들어보자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나중에 이문열에게 제안해 쓰게 했죠. 사상적으로 전체주의에 혐오감을 갖기 시작한 건 조지 오웰의 《1984년》 덕분이에요. 정말 큰 충격을 받았어요.”
Q. 멋진 소설이죠. 맞습니다.

“내 사상의 한 지표였던 거 같아요.”

책 이야기가 시작되자 박 회장의 표정이 환해졌다. 정말 출판이 천직이구나 싶다. 척박한 환경에서 좋은 책, 읽을 만한 책을 만들겠다는 일념 하나로 평생을 매진한 사람, 까탈스런 작가들 비위를 맞추고, 수지타산을 맞추기 위해 평생 노심초사한 사람, 그 덕에 몸이 완전히 망가져버려 중국까지 날아가 간 이식을 받아 죽을 고비를 간신히 넘긴 사람, 그런 사람이 책과 사상가 얘기가 나오자 화색을 띠기 시작했다.

Q. 회장님 말씀을 들으니, 민음사가 세계문학전집을 낼 만하군요. ‘세계의 문학’이란 계간지도 내고 있고.

“학교 다닐 때 보았던 세계문학전집이 참 불만스러웠어요. 어떻게 이렇게 만들까, 책이 이러면 안 되는데, 그런 생각이 들어서 언젠가 이걸 내가 만들어 봐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일본에서 세계문학전집을 20권 내지 30권 정도 규모로 만들고, 우리나라에서는 거의 그걸 표절해서 써먹었는데, 이걸 내가 제대로 좀 해봐야겠다고 결심했죠. 그리고 세계문학전집이 어떻게 20권이냐, 최소한 1000권이고 2000권은 될 거다, 그러니까 내가 출발을 해보자, 그랬던 거지요. (민음사 세계문학전집이) 금년에 300권이 나와요.”
Q. 그건 어떻습니까? 2008년 리먼 브라더스 사태 이후 자본주의에 대한 회의까지도 나오고 있는데요. 특히 우리나라의 경우 불황이 계속 깊어서 이제 책들이 너무 안 나간다고 아우성인데요. 책이 잘 안 팔리는 거야 어제 오늘 일이 아니지만 특히 작년과 올해는 심한 듯합니다. 직원을 줄인 회사도 많고요. 가계 소득이 줄어들 때 서적구입비, 영화관람비, 유흥비 이런 게 줄어드는 건 너무나 당연한 거지만 특히 우리나라처럼 웬만해선 교육비를 안 줄이는 분위기에선 책이 너무 안 팔리고, 또 베스트셀러의 면면이 뭐 그렇게 대단한 책인가 싶기도 한데요.

“제가 1960년대에 처음 책을 냈을 때의 베스트셀러하고 지금 베스트셀러하고는 그야말로 100만 배는 차이 납니다.”
Q. 질이요? 부수요?

“질도 그렇고 부수도 그렇고요. 늘 사람들이 책을 읽지 않는다고들 말하지요. 근데 한국 정도 인구 규모만 해도 언제나 10만 명, 더 축소하면 3만 명 정도는 계속 책을 읽습니다. 이 사람들이 결국 사회를 끌고 나가고 사회를 지탱해 나가는 힘이에요. 책은 많이 팔리는 책이 전부가 아니에요. 이제 책의 형태가 전자책이 될지 지금과 같이 종이책의 형태로 남을지는 잘 모르겠지만, 종이책은 종이책대로 전자책은 전자책대로 지속될 거라고 봅니다. 책을 읽는 사람은 늘 있으니까요.”
Q. 알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인생의 멘토는 필요한가요?

“필요하죠. 이번에 《스티브 잡스》를 읽으면서 깨달았는데, 삶이라는 것은 결국 끝없는 열정과 끊임없는 추구가 아닌가 싶어요. 그건 어떤 자극에 의해, 또는 자각에 의해 시작됩니다. 멘토에게 자극을 받아 출발할 수도 있는 거라고 생각해요. 잡스가 제 표현으로 바꾸면 이런 뜻의 말을 했어요. 세상의 기계라는 것은 다 비슷비슷하다. 그런데 에디팅하기에 따라서 위대한 작품도 되고, 허접한 물건도 된다. 나하고 사상이 똑같더라고. 자기 인생의 에디팅을 위해 멘토를 잘 만나야지요.”


박 회장은 지금도 매일 회사로 출근, 주요 작품에 대해서는 제목과 본문 레이아웃부터 광고 문안까지 직접 진두지휘한다. 50년째다. 물리지도, 질리지도 않는가 보다. 인생 에디팅을 말할 자격이 충분한 것이다. 불현듯 엉뚱한 상념 하나. 에디팅으로 해결될 인생이라면 가능성이 있는 셈이겠지. 어떤 인생은 ‘리셋’ 내지, 아예 ‘포매팅’이 필요하니까. 부잣집 도련님으로 평생 호의호식(好衣好食)하며 살 수도 있었을 노(老) 신사가 ‘영원한 편집자’ 반백년 내공을 품은 채 희미하게 웃고 있었다.
글_신용관 기자
사진_민음사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