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개념과 종교문화
오늘날 우리는 종교와 비종교는 물론 종교와 종교를 분명하게 구분한다. 종교인과 비종교인을 나누며, 다시 종교인을 불교인, 기독교인, 유교인, 천도교인 등으로 나눈다. 그런데 과연 예전에 한국 사람들이 이런 식의 구분을 하면서 살았을까? 이렇게 종교를 구분하고 분별하는 태도는 근대 이후에 종교와 비종교, 종교와 종교를 날카롭게 구분하는 서구적 종교개념이 유포되면서 나타난 현상이다. 예로부터 한국인은 종교와 비종교, 종교와 종교를 나누지 않는, 통합된 복합적인 종교문화를 영위해왔다. 따라서 종교와 비종교를 명확하게 구분하고 개별종교의 특수성을 강조하는 근대적 종교개념으로는 한국사회의 전통적인 종교문화를 제대로 설명하기 어렵다.
고대의 다원적 종교문화
흔히 고대 한국사회의 상대적 단일성을 전제로 고대 한국의 종교전통 역시 단일하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고대 한국인의 종교적 세계를 단일한 것으로 말하긴 어렵다. 외래종교인 불교가 유입되기 전만 보아도, 고대 한국에는 천天신앙, 산신신앙, 삼한시대 제사공간인 소도와 같은 성스러운 공간에 대한 신앙, 나무와 숲에 대한 신앙 등 여러 신앙의 흐름이 존재하였다. 그리고 당시에도 이미 여러 부류의 종교전문가가 활동하였다. 군왕도 종교적 사제의 역할을 맡기도 하였으며, 무당과 일관日官, 점복자占卜者들은 나름의 역할을 하면서 공존하였다. 이런 점에서 고대에도 다양한 신앙의 흐름이 공존하는 종교문화의 전통이 자리 잡았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다원적인 종교문화의 흐름은 불교 전래 이후에도 지속된다. 불교는 삼국시대에 전래된 이래 당시 고대 한국사회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음에도 불구하고, 불교에 의해 기존 토착신앙의 흐름이 통일되거나 대체된 것은 결코 아니다. 기존 토착신앙과 불교는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존속해왔다. 이는 오늘날 민간신앙과 불교의 상호공존을 통해서도 잘 확인된다.
물론 불교의 전래 초기에는 불교와 토착신앙과의 갈등이 없지 않았다. 이차돈의 죽음, 재앙을 일으키는 독룡(毒龍, 인간에게 해를 끼치는 용)을 불교의 힘으로 굴복시켰다는 이야기는 그것을 잘 보여준다. 여기서 독룡은 토착신앙의 신격을 나타낸다. 그러나 곧 양자 사이에는 절충과 공존이 모색된다.
하늘에 두 개의 해가 동시에 떠오르는 괴변이 발생하자, 일관은 인연있는 승려를 불러 해결할 것을 제안한다. 이에 승려인 월명사月明師가 향가 도솔가兜率歌를 지어 괴변을 해결한다. 또 왕후가 병에 걸리자 무당이 병을 고치기 위해서는 다른 나라에서 약을 구해 와야 한다고 말하고, 그래서 용왕으로부터 『금강삼매경론』을 구해 병을 고쳤다는 설화도 있다. 이 이야기들은 토착신앙의 종교전문가들이 불교를 공존의 대상으로 수용하였음을 보여준다.
그런가 하면 토착신앙의 대표적 신인 산신山神 역시 사찰의 건립에 도움을 주거나 승려를 돕는 등의 역할을 한다. 예컨대 신라시대 화랑이 지켜야 할 다섯 가지 계율인 세속오계를 설한 원광圓光에게 중국으로 유학하도록 권유한 것은 삼기산三岐山의 산신이었다. 신라의 중악中岳 산신은 승려 심지心地에게 계율을 받고 동화사桐華寺 건립터를 점지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선도산仙桃山 성모聖母 또한 안흥사安興寺의 불사를 도왔으며 신라 오악五嶽의 탱화를 모시도록 하였다. 이러한 사례들 역시 토착신앙인 산신신앙과 외래종교인 불교의 공존을 확인해준다.
토착신앙과 불교의 융합
그리고 토착신앙과 불교는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함께 변화를 겪는다. 예컨대 토착신앙인 천신앙은 불교의 전래와 함께 변모된다. 좋은 예가 천신天神을 가리키는 용어가 불교적 용어인 제석帝釋으로 바뀌는 것이다. 이는 단군신화에서 천신인 환인을 제석이라 설명하는데서 잘 드러난다. 오늘날 무속에서도 천신은 불교의 천신인 제석을 통해서 표상된다. 그러나 이렇게 불교적으로 윤색되었음에도, 천신앙은 기존의 성격을 유지한다. 전래의 천신앙에서 천은 다양한 기능을 하였다.
일국의 군왕은 천의 자손으로 여겨지고 왕실은 제천의례를 지내는 등 천은 왕권을 정당화하는 기능을 하였다. 또한 천신은 국가의 재앙을 막고 국가를 수호하며 보살피는 존재였으며, 아이를 점지하는 기능을 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천은 인간사에 무관심한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인간사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였다. 천의 이런 모습은 불교 전래 이후에도 지속된다. 예컨대 불교의 천신인 제석천은 신라 진평왕에게 옥대를 전하기도 하며, 신라 경덕왕에게는 자식을 내려주기도 한다. 그런데 이는 불교의 천신 본래의 기능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토착 천신앙에서 나타나는 천의 기능이다. 이런 점에서 비록 불교적인 윤색에도 불구하고 기존의 천신앙이 유지됨을 알 수 있다.
불교 역시 토착신앙의 요소를 받아들인다. 좋은 예로서 산신을 모신 산신각이 불교 사찰에 수용되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한국 고대에 불교가 기존의 신앙을 배제하기보다는 포용하면서 한국사회에 정착하는 과정은 불교 사찰이 어디에 건립되는가를 통해 살펴볼 수 있다.
불교 전래 이전의 한국 고대사회에는 소도와 같은 성스러운 공간에 대한 신앙이 존재하였다. 소도는 물론이고 한 국가나 부족의 시조가 하늘에서 내려온 산이나 언덕, 신단수와 같은 나무가 있거나 나무들이 무성한 숲 등의 공간은 성소로 여겨지고, 그곳에서 국조國祖나 시조始祖의 탄생과 하강 같은 신화적 사건이 발생하였다.
불교는 바로 그런 전래의 성소에 사찰을 건립하고자 하였다. 대표적 예가 불교 전래 이전의 가람터로 여겨진 신라의 ‘칠가람지처七伽藍之處’이다. 그곳은 바로 천경림天鏡林, 삼천기三川岐, 용궁남龍宮南, 용궁북龍宮北, 사천미沙川尾, 신유림神遊林, 서청전胥請田이다. 이 일곱 지역이 어떤 연유로 신라에서 성소로 여겨졌는가를 밝히는 것은 쉽지 않다. 그러나 몇몇 지역은 그 이름만으로도 성스러운 공간임이 드러난다. 신이 노니는 곳이라는 신유림, 하늘의 거울 숲이란 의미의 천경림은 그 이름만으로도 성스런 공간임을 짐작케 한다. 용궁남과 용궁북 역시 토착신인 용왕과 관련된 공간임을 알 수 있다.
이처럼 토착신앙의 성소로 여겨지던 지역에 불교의 전래와 함께 흥륜사, 황룡사, 분황사 등의 절들이 세워진다. 이는 불교가 토착신앙과의 상호공존의 맥락에서 한국고대 사회에 자리 잡아 갔음을 말해준다. 이를 통해 양자 간의 융합이 더욱 진전되었을 것임은 쉽게 추측할 수 있다. 그리고 한국고대사회에서 이러한 상호영향과 상호변모의 과정은 토착신앙과 불교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그것은 유교, 도교와의 상호작용으로까지 확대된다. 이러한 사실은 고대의 한국인이 단일한 종교의 세계를 살기보다는, 이른바 토착종교와 외래종교를 포함한 다양한 신앙이 복합된, 다원적인 종교의 세계를 살았음을 말해 준다.
풍류도風流道가 전하는 조화와 창조
현재까지 한국고대의 종교는 선교仙敎나 신교神敎, 무교巫敎 등 단일한 하나의 종교전통으로 형성되었으며, 그것이 곧 한국의 고유종교라고 주장하는 경향이 지배적이었다. 하지만 이른바 외래종교가 들어오기 전의 한국고대의 종교를 단일한 종교전통으로 설명할 수 있을 지는 의문이다.
이 문제와 관련하여 최치원의 「난랑비서鸞郞碑序」에 언급된 풍류도가 자주 거론된다. 이는 난랑鸞郞이라는 화랑을 기리는 비碑에 쓰인 글로서, 그 일부인 76자가 『삼국사기』 권4 진흥왕 37년(576)조에 전해온다.
“우리나라에는 현묘지도玄妙之道가 있으니 풍류라 이른다. 그 교의 기원은 『선사仙史』에 자세히 실려 있거니와 실로 이는 삼교三敎를 포함하며 뭇 백성들과 접接하여 교화 한다. 그리하여 집에 들어오면 부모에 효도하고 나가면 나라에 충성하는 것은 노사구(魯司寇, 공자)의 취지이며, 또 그 무위의 일에 처하여 불언의 교敎를 행하는 것은 주주사(周柱史, 노자)의 종지宗旨이며, 모든 악한 일을 하지 않고 착한 일만을 신봉하여 행하는 것은 축건태자(竺乾太子, 석가)의 교화이다.” 이 글을 근거로 유불도儒彿道 삼교가 들어오기 이전 한국고대의 고유종교는 풍류도라는 주장이 제기되어 왔다.
풍류도는 유불도 삼교의 종교적 이념을 두루 내포하는 현묘한 도로서, 신선사상이 중심사상이며 화랑도의 정신적 기반을 이루었다고 말한다. 또한 풍류도는 토착신앙인 천신앙, 산신신앙, 무교신앙 등을 모두 포괄한다고 말한다. 여기서 이러한 주장의 타당성 여부를 논할 여지는 없다. 중요한 점은, 이 글이 풍류도라 일컫는 당시 신라인들의 종교적 세계가 유불도 어느 한 종교전통에 의해 설명되지 않는 복합적인 세계임을 말하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는 이 글을 통해 당시 신라인들이 새롭게 전래된 유불도 삼교에 매몰되지 않고, 그것을 조화롭고 창조적으로 통합하여 수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난랑비서」는 우리 역사에서 지속적으로 나타난 유불도 삼교의 창조적 수용의 가장 이른 사례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리고 「난랑비서」를 통해, 당시 신라인들이 단일한 종교전통의 세계에 머물지 않고 새로운 종교를 받아들여 새로운 문화를 창조하는 주체적 능력을 발휘하였음을 확인하게 된다.
글ㆍ이용범 한국종교문화연구소 연구위원 사진ㆍ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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