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

용서와 회복 그리고 부활

이산저산구름 2010. 4. 2. 16:44

용서와 회복 그리고 부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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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와 회복 그리고 부활

 

예수님이 돌아가시기 전까지는 믿지 못하던 제자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 신앙인으로 다시 태어나게 되는 계기가 되고 그 후로는 예수님의 말씀을 모든 사람들에게 전달하려고 복음을 떠납니다.

 

돌아가기 전까지는 배신을 때리며 믿지 못하던 제자들이 어떻게 예수님의 죽음을 통해서 신앙을 찾았을까요?

 

예수님의 죽음을 통해서 제자들은 예수님의 사랑을 어떻게 확인했을까요?

제자들은 어떤계기로 회개를 하게 되였을까요?

 

예수님의 죽음

 

예수님의 죽음을 본 제자들은 어떤 심정이였을까요?

 

어쩔수 없었다고 신세한탄만을 하던 제자들은 예수님의 죽음을 통해서 강한 신앙심을 얻습니다.

 

용서를 받고 용서도 해주고 싶은데 어디서 부터 시작할지 제자들도 몰랐을겁니다.

 

잃어버린 기술 용서를 읽고나니 예수님의 죽음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제자들을 다 용서해주었습니다. 예수를 배반할수 밖에는 없었던 상황, 자신을 고소한 유다의 아픔, 예수자신이 십자가에 매달릴수 밖에는 없었던 유대의 상황들을 하느님께 다 고백하고 용서받고 그리고 제자들을 용서했습니다.

 

용서를 받은 제자들은 다시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받고 서로를 용서했을겁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복음이 시작됐을겁니다.

 

내 자신에 대한 고백과 용서를 하고 싶지만 그래도 어떻게 시작할지 혼란스럽습니다. 하느님이 우리에게 주신 최고의 선물은 선택의 자유입니다. 용서를 선택할수도 있고 분노와 증오를 선택할수도 있습니다.

 

용서를 선택하려고 합니다. 하느님 제가 매일 용서를 실천할수 있는 인내력과 용기를 주십시요! 매일 용서를 통해 다시 태어날수 있게 해주십시요!

 

책 용서, 잃어버린 기술 (The lost art of Forgiving)

 

책 제목 번역은 기술이지만 미학이라고 표현하고 싶습니다. 나를 용서하기 위해서 글을 시작했지만 진정으로 용서를 한적이 없어서 시간낭비를 하고 있었는데 자주가던 블로그에서 용서에 대한 책을 다운로딩받았습니다. 우연인지 감사했습니다. 

 

용서를 해야 하는 이유

 

한가지 변함없는 법칙이 있다 ….우리가 깊은 상처를 입었을

, 용서하지 않는 한은 어떤 치유도 없다는 것이다. - 알란

패턴

 

용서는 평화와 행복으로 가는 길이다. 그리고 용서는 하나의 신비이다. 우리가 용서를 추구하지 않으면 용서는 우리에게서 숨어버릴 것이다. 이 책은 용서에 대한 무슨 신학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누군가에게 용서하는 법을 일러준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단지 용서가 왜 필요한지 사람들이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길 바랄 뿐이다.

 

용서한다는 것은 잊어버리거나 눈감아 주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 용서하기 위해서 꼭 가해자와 직접 만나야만 하는 것도 아니다. 용서한다는 것은 의식적인 결단을 통해 증오하는 행위를 멈추는 것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증오는 전혀 유익이 없으며, 암처럼 사람의 마음에 퍼져 완전히 자신을 파멸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용서의 어려움 증오

 

그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가로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수께서 가라사대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할지니라. - 18:21-22

 

용서가 필요하다는 것을 부정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가끔은 할 수 없노라고 억지부리고 싶은 유혹에 빠질 때가 있다. “너무 어렵고 감당하기 힘들다. 그건 성자들이나 할 수 있는 일이지 나같이 죄 많은 사람에겐 해당 안돼….” 또 이렇게도 말한다. “그 동안 나만 너무 상처받아 왔어. 내 말을사람들이 오해만 했어. 사람들이 나를 이해해 주지 않아….

 

심한 상처를 입었을 경우, 용서한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러나 이런 고통의 심연 속에서도 우리는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해야만 한다. 사랑할 것인가, 아니면 미워할 것인가? 용서할 것인가, 아니면 정죄할 것인가? 화해를 위해 노력할 것인가, 아니면 복수할 것인가?

 

용서를 해야 하는 데에는 매우 현실적인 이유들이 있습니다. 누군가 우리에게 잘못을 저질렀을 경우에, 우리는 앙갚음을 하던가, 아니면 용서하던가 한가지를 선택해야 합니다. 만일 복수를선택했다면 우리의 삶은 분노로 불 타오를 것입니다. 그리고 앙갚음을 했다 하더라도 남는 것은 공허함 뿐일 것입니다. 분노란 것은 정말 만족시키기 어려운 욕망인데다 또 습관적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용서는 우리로 머물러 있게 하지않고 앞으로 나아가게 합니다.

 

수 백만의 기독교인들이 주기도문을 주일마다 암송하고 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라는 기도 속에서 우리는 정말 그 뜻을 제대로 이해하고나 있을까? 너무나 자주 우리는 그 의미를 생각해 보지도 않고, 이 거룩한 단어들을 반복하고 있다. 이 구절 속에는, 우리 자신이 용서가 필요한 사람이라는 것을 스스로 인정할 때, 우리도 다른 사람을 용서할 수 있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이렇게 스스로 죄인이라고 인정하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우리 자신이 얼마나 용서가 필요한 사람인가를 알때, 비로소 우리는 사랑과 연민의 마음으로 다른 사람을 대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얼마나 깊게 상처 입혔는가를 깨달을 때, 우리 자신의 깊은 상처도 치유받을 수 있는 것이다.

 

제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면서 저는 거기에 증오의 씨앗이 자라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나 뿐만이 아니라 모든 인간의 마음 속에 그 씨앗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교만한 생각, 다른 사람에 대한 짜증, 냉담한 마음, 분노, , 심지어 무관심 같은 것들 말입니다. 분명하게 하나님의 용서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사람은 제 자신이란 사실을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나서야 저는 완전히 자유함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용서와 사랑

 

네 원수를 사랑하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의 훈계보다 따르기 어려운 것은 없을 것이다.” 마틴루터 킹은 1963년도에 베스트셀러였던 <사랑하는 힘>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진지한 고민 속에서 실제적인 용서의 실천이 불가능하다고 느끼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말한다. ‘우리를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쉽다. 하지만 내놓고 음흉하게 우리를 해하려는 사람까지 어떻게 사랑할 수 있다는 말인가?

 

하지만 원수를 사랑하라는 명령은 유토피아를 꿈꾸는 이상주의자들의 위선적인 표어가 아니다. 이것은 우리가 살아남기 위해 따라야 하는 절대적인 명령인 것이다. 원수까지도 사랑한다면 오늘날 세계가 당면한 많은 문제들이 해결될 수 있을 것이다. 예수님은 비현실적인 이상주의자가 아니라 실제적인 현실주의자셨다.

 

사랑은 원수를 친구로 뒤바꿈 시킬 수 있는 유일한 힘이다. 미움으로 미움을 맞서서는 원수를 없앨 수 없다. 오직 적대감을 없앰으로써만 우리는 원수를 없앨 수 있는 것이다. 미움은 본질상 파괴하고 무너뜨리는 것이다. 반면 사랑은 창조하고 세우는 것이다. 사랑은 모든 것을 변화시키는 구원의 능력이다.

 

우리는 용서의 능력을 습득하고 유지해야만 한다. 용서하는 능력이 결여된 사람은 사랑할 능력도 없는 사람이다. 우리에게 해를 끼치는 사람을 거듭거듭 용서해야 한다는 것을 먼저 인정하지 않는다면, 원수를 사랑하는 행위는 그 자체가 불가능하다. 또한 우리가 깨달아야 하는 사실은, 피해를 당한 사람이 언제나 먼저 용서의 행위를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다. 뿌리깊은 상처를 입은 사람, 불법적인 행위의 희생자,

 

그리고 압제의 피해자들이 먼저 용서해야 한다는 말이다. 가해자가 용서를 구해 올 수도 있을 것이다. 그들은 탕자처럼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는 용서를 받고자하는 열망으로 가슴 벅차 오를 지도 모른다. 하지만 상처입은 이웃만이, 사랑하는 아버지만이 용서의 따뜻한 손을 내밀 수 있는 것이다.

 

 

용서와 정의

 

사랑 없는 진리는 죽이는 것이요, 진리 없는 사랑은 거짓말하는 것이다.

- 에버하르트 아놀드

 

용서로 가는 길은 멀고 험난했습니다. 내가 용서해야 할 사람은 그 가해자 말고 또 있었습니다. 마이클과 이런 불행이 일어나도록 허용하신 하나님, 그리고 나 자신까지도 용서해야만 했던 것입니다. 결국, 가장 어려우면서도 근본적인 문제는 나 자신을 용서하는 부분이었습니다.

 

“저는 하나님의 정의는 형벌이 아니라 회복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예수님도 사람들을 벌주러 오신것이 아니라, 회복케하시고 화해하게 하고자 오셨습니다.

 

책임 받아들이기

 

형제 앞에서 적나라하게 자신의 죄를 고백함으로써 우리의 옛자아는 고통과 수치 속에서 죽게 된다. 이런 수치가 너무나 두려워서 우리는 끊임없이 죄의 고백을 피해 보려고 이리저리궁리를 한다. 하지만 형제 앞에서의 이런 수치로 인한 깊은 정신적, 육체적인 고통을 통해 우리는 경험하게 된다.,우리의 해방과 구원을.

-        디이트리히 본훼퍼

 

우리 자신이 먼저 용서받아야 할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한, 다른 사람을 용서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실제로는 이런 인정 가지고도 충분하지 않다. 다른 사람에게 저지른 잘못을 고백하는 것까지 가야만 하는 것이다.

 

참된 용서는 다른 사람에게로 전염됩니다.

 

용서의 시작: 고백

 

고백은 용서와 화해로 가는 다리를 놓는 것이다. 고백이 없다면 우리의 자존심이 우리를 꼼짝 못하게 묶어 놓기 때문에 용서는 전혀 불가능하게 된다.

 

용서는 능력이다. 용서는 아픈 과거에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며, 모든 악을 이겨내게 한다. 또한, 용서는 용서하는 사람과 용서받는 사람 둘 다를 회복시켜준다. 사실 우리 인간들이 막지만 않는다면 용서는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을 것이다.

 

어떻게 시작할까?

 

다른 사람에게 용서를 베풀거나 용서를 구하기 전에 먼저 우리는 용서에 대한 잘못된 여러 통념들에서 벗어나야만 한다.

 

용서를 베풀지 못하게 막는 많은 장애물들은, 우리가 용서의 잘못된 관념을 올바로 이해하기만 하면 쉽게 사라져 버릴 것이다.

 

용서는 잊어버리는 것이 아니다. 잊어버리는 것이 기억에서 지워지는 것을 의미한다면 용서는 잊어버리는 것은 아니다. 용서란 과거에 개의치않고 앞으로 발을 내딛는 것이다.

 

용서는 고통스러운 상처를 지워 없애는 것이 아니라 상처의 고통에서 자유로워지는 것을 의미한다. ‘용서한 뒤에도 당신은 과거의 상처를 다시 떠올릴 수는 있다. 하지만 그 아픔까지 되살아나진 않는다.’ 우리의 과거를 지워버리는 것은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그래서도 안 된다. 용서는 기억을 치유하는 것이지 지워버리는 것은 아니다. 과거의 상처는 실상은 우리를 위한 선물이며 성숙과 지혜를 향한 디딤돌이다.

 

용서는 책임을 묻지 않는 것이 아니다. 우리 중 누구도 순전히 죄 없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하지만 책임 소재를 분명히 하는 것은 필요하다. 죄에 대해 누군가 책임을 지지 않는다면 용서할 기회도 없는 것이다.

 

모든 것을 상황적인 탓으로만 돌리며 인간의 책임을 묻지 않는 것은 옳지 않다. 모든 일에는 우리가 감당하기 벅찬 외적인 요인들과 사정들이 있게 마련이다. 하지만 그런 여건들에 어떻게 대응하는가는 우리에게 달린 문제이고, 그러기에 책임 또한 져야 하는 것이다.

 

용서는 화해하는 것은 아니다. 용서의 궁극적인 목적은 깨진 관계의 회복이다. 우리는 ‘우리의 형제를 찾아가야’ 한다( 5:23; 18:5).

 

하지만 당신에게 상처를 준 사람을 용서할 때 반드시 깨진 관계가 회복된다는 보장은 없다.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선 두 사람이 다 필요한 것이다. 그런 이유로, 용서는 일방적인 행위로 시작하는 것이다.

 

이 말은 용서를 통해득을 얻는 사람은 용서해 주는 사람 한 쪽만일 경우도 있다는

것이다. 당신이 용서하려는 사람에게 당신의 손이 미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용서한다는 것은 관계의 회복을 소망하면서 노력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당신은 당신에게 해를 입힌 사람에 대해 선의와 신뢰를 다시 쌓아가는 것이다.

 

용서는 한 번에 끝나는 것이 아니다. 용서는 일시적인 행위가 아니다. 용서는 과정이다. 용서하는 데는 시간이 걸리기 마련이다. 용서는 한 번의 발디딤이 아니라 계속적인 발걸음이다. 비록 용서가 우리 편에서의 선택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별 어려움 없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용서는 하나의 발견이며 우리에게 일어나는 어떤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용서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아놀드의 글을 다시 짚어보자. ‘우리가 용서를 말할 때는, 실패나 죄를 용서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죄인을 감싸주고, 다시 일으키고, 회복시켜 주는 것까지 포함하는 것이다. 우리의 용서가 언제나 받아들여지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일단 화해의 손을 내밀 때 비로소 우리는 분노에서 자유롭게 되는 것이다.

 

깊은 상처자국까지야 없어지길 바랄 순 없겠지만, 그 상처를 가지고 다른 사람에게까지 고통을 주는 일은 더는 없을 것이다.’ 간단히 말해서 용서하는 것은 우리를 괴롭히는 감정들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또한 용서는 앙갚음을 포기하고, 상대에게 완벽한 행위와 완벽한 사과를 요구하지 않는 것이다.

 

‘누가 용서받을 수 있는가?’와 ‘용서해야 하는 우리는 누군가?’의 두 질문을 각각 살펴보자.

 

첫번째 질문과 관련해선 용서와 화해, 그리고 용서와 사면의 차이에 대해 생각해 보아야만 한다. 사도 바울은 용서를 받았다. 그리고 그가 변화된것은 바로 그가 용서받았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그런 다음에 그는 자신이 피해를 입힌 사람들과 화해할 수 있었다. 여전히 바울은 자신이 저지른 행동 때문에 고통스러워 했지만, 이 죄인 중의 괴수에게도 하나님의 자비의 손길이 뻗쳤다. 회개가 있는 곳은 어디나 하나님의 자비가 모든 것을 새롭게 하신다.

 

용서는 정말 그만한 가치가 있는 것일까?

 

용서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아놀드는 강조한다. 사실 용서한다는 것이 자연적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초인간적인 것으로 보일 때도 적지 않다. 그렇다면 왜 용서란 것에 그다지도 힘을 기울여야 하는 것인가? 지난 일은 그저 묻어 버리는 것이 더 현명하지 않을까?

 

용서를 통해 실제로 무엇이 바뀐단 말인가? 솔직히 용서가 효과가 있기나 한 것일까?

 

‘용서는 뭔가를 하는 것이 아니라, 뭔가를 발견하는 것이다. 우리 자신 또한 용서가 필요한 사람으로서 용서할 자격이 없다는 사실을 발견할 때 비로소 우리는 용서할 수 있게 된다. 우리는 상처를 준 사람들과 다른 점보단 같은 면이 많은 것이다. 용서는 관대함이나 우월함을 드러내는 행위가 아니라, 그 사람과의 유사성을 발견하는 것이다.

 

분노를 용서로

 

분노를 넘어서는 열쇠는 분노를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일단은 받아들이고 그 다음에 당사자에게 겸손하게 표현하는 것이다. 그런 다음에 분노에서 벗어나야 한다. 때때로 분노의 대상이 당신에게 상처를 준 사람일 경우가 있다. 이럴 경우 바르게 분노를 표현하기 전에 마음을 차분히 정리할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그리고 적당한 때가 왔을 때는 당신의 분노가 그사람의 인격을 대상으로 하지 말아야 한다는 사실을 명심해야한다. 당신에게 상처를 준 것은 그 사람됨이 아니라 그 사람이 한 일이다. 당신이 화를 내는 유일한 목적은 그들로 하여금 당신의 고통을 느끼게 하는 것이지 똑같이 고통을 주려는 것이아니다. 당신의 목적은 분노를 드러내 사라지게 하는 것이지 거기에 매달리는 것이 아니다.

 

실행하기

 

당신의 상처를 껴안기

당신의 필요를 인정하기

앙갚음을 포기하기

분노에서 놓이기

다른 사람을 존중하기

은혜를 실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