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팔은 잘라버려야 한다. 우리가 날마다 모이니 그 수가 어찌 열 명, 백 명에 그치겠는가마는 이런 글씨를 쓸 사람이 유독 한 명도 없어 남의 손을 빌려 쓰게 한단 말인가!
무협소설에서나 나올법한 분위기가 풍기는 이 말은 조선의 19세기 여항인인 睡軒 金泰旭이 술에 취하여 칼을 뽑아 스스로 자기 팔뚝을 긋고 통곡하며 한 말이다. 그러면 그가 누구 때문에, 무엇 때문에 자해를 하였을까? 바로 추사 김정희 때문이고 그의 글씨 때문이다. 왜 그랬을까?
김태욱의 행동은 너무나 거칠었지만 다르게 보면 비장하기도 하다. 언제인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1810년대 혹은 1820년대 즈음에 김정희가 여항문인인 천수경(千壽慶)의 집 근처 석벽에 송석원(松石園)이라는 당호를 써주었는데, 현재에도 남아 있는 이 예서는 너무나 우아하고 예스럽다. 그러니 이를 본 여항문인들이 김정희의 서예적인 재능에 감탄해 하였던 것이다. 그렇지만 그들은 한편으로 자신들 중에 이러한 글씨를 쓰지 못한 것을 아쉬어 하였을 것이고 그 중에 김태욱은 자신들의 무리가 이런 글씨를 쓰지 못하여 김정희에게 부탁한 것을 못내 창피해하며 술기운에 그만 팔뚝에 상처를 내고 말았던 것이다.
당시 여항문인들은 문화의 주도세력으로 성장하고 있었기에 자존의식과 동류의식이 상당하였다. 그래서 때로는 사대부들과 문학과 예술 방면에서 어깨를 겨루기도 하였다. 그러므로 여항문인과 조선의 사대부는 함께 어울리면서도 서로의 영역을 구축해 갔다.
김정희는 조희룡(趙熙龍, 1789∼1866), 변종운(卞鍾運, 1790~1866), 유최진(柳最鎭, 1791∼?)같은 여항문인들과 어울렸고 이들과 자연스레 시서화에 대한 담화를 가졌을 것인데, 그는 이들에게 자신의 회화관을 피력하였으며 때로는 사군자를 가르치기도 하였다. 그러나 김정희와 비슷한 나이였던 그들은 이미 예술적 흥취를 중요히 여기는 성령설이라는 자신들의 예술론을 정립하고 있었기에 전적으로 김정희의 회화관에 동조하지는 않았다. 이같은 정황은 이른바 추사화파 속에서도 감지된다.
김정희는 제주 유배시절인 1845년경에 아들 상우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신의 맏 제자로 알려진 조희룡에 대해 비난에 가까운 내용을 적었다.
“조희룡 같은 부류들이 나에게 난을 치는 법을 배웠으나 끝내 그림 그리는 법칙 한 길을 면치 못하였으니, 이는 그들의 가슴속에 문자향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 글에서 ‘조희룡 같은 부류’는 바로 여항문인을 지칭하는 것이다. 아들에게 보내는 아주 개인적인 편지였기에 김정희가 조희룡을 직접 보고는 얘기하지 못했을, 마음 속의 얘기를 꺼낸 것인데, 아마도 상우가 보낸 편지에는 ‘아버님 지금 한양에 조희룡같은 화가들이 묵란으로 화단을 이끌고 있는데요. 어떤가요? 괜찮은가요?’ 했을지도 모른다. 또한 위의 편지 내용은 김정희가 제주 유배가기 이전에는 당시의 화단을 이끌지 못했다는 사실도 담겨 있는 것이다. 김정희는 자신의 文友들과 회화 경향을 공유하였을 정도였다.
그러나 9년간의 제주 유배 생활은 그의 위치를 바꾸어 놓았다. 그는 제주에서 이상적이나 권돈인 등에게 많은 편지를 보내면서 학문과 문학, 그리고 서화에 대한 주장을 지속적으로 펼쳤다. 한양의 문인들은 한반도 남쪽 끝자락 너머에서 들여오는 소리가 참으로 심상치 않았을 것이고, 김정희의 후배 격에 해당되는 인물은 그의 존재에 대해 너무나 궁금해 하였을 것이다. 그야말로 김정희는 정치적으로는 재기 불가능하게 되었지만 학문과 문학, 그리고 서화 분야에서는 얼굴 없는 리더가 되어 가고 있었다.
드디어 김정희는 유배에서 풀려나 1849년에 한양에 모습을 드러낸다. 그는 이내 왕성한 감평활동을 하며 본격적으로 화단에 영향력을 발휘하기 시작하였으며 화가들은 김정희의 등장에 촉각을 세웠다. 당시 여항문인출신의 서화가들은 김정희에게 각자의 그림을 품명받자며 자신의 그림을 가지고 김정희를 방문하였다. 그 구성원 중에는 허련외에도 김수철이나 전기와 유재소 같은 뛰어난 회화감각을 지닌 신진 화가들이 있었다. 아마도 이 계획은 당시 한양의 화단에서 화가로 자리 잡은 김정희의 애제자 허련이 상당한 역할을 하였을 것이다.
사실 이같은 일은 조선시대회화사에서 볼 수 없는 일대의 사건이었다. 김정희는 품평을 부탁한 화가들에게 조목조목 평을 하였다. 그 평을 살펴보면 김정희가 이들에게 원했던 바를 알 수 있다. 그중에도 새로이 등장한 신예화가 전기와 유재소의 작품에 대한 평은 이렇다.
우선 전기에 관해서는 그의 필법이 소슬하면서도 담백하여 원나라 화가, 즉 황공망(黃公望)과 예찬(倪瓚)의 품격과 운치가 있음을 인정하였다. 그렇지만 너무 유려한 필법에 대해서는 화공의 속기로 판단하여 버릴 것을 요구하였고 담묵을 여러 번 칠하는 기법인 적묵법(積墨法)이 부족하다고 지적하면서 좀 더 변화시킬 것을 지시하였으며, 채색과 선염의 방법에 대해 고칠 것을 지적하였다. 김정희는 이처럼 여러 지적을 하였지만 그의 필법에 대해서만은 인정하였다.
김정희가 전기의 절친한 벗인 유재소에게 원했던바 역시 전기에게 바란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김정희는 유재소의 그림을 평하면서 기법에 대해 지적하였지만 黃公望의 필묵법을 거론하며 갈필을 이용한 유재소의 필묵이 元人의 필의를 갖추었다고 평가하였다. 이 밖에도 다른 화가들의 작품에 대한 품평도 주로 필묵법에 대한 강조가 두드러진다. 즉, 김정희가 당시 화가들에게 원했던 것은 마른 붓에 옅은 먹(枯筆淡墨)으로 적묵하여 소슬한 정경(荒寒小景)을 구현하는 것이다.
전기와 유재소는 자신과 어울렸던 서화가들의 작품에 대한 김정희의 품평을 다시금 옮겨서 「예림갑을록」을 만들었다. 전기가 쓴 서문에는 이들이 김정희를 어떻게 생각하는가가 적혀 있다.
가을 하늘 높고 기운은 맑은데 차를 마시며 길게 읊조리다가, 옛 상자 속에서 완당공(김정희)이 서화를 논평한 몇 장의 종이를 찾았다. 이것은 내가 지난 여름에 이 책 속에 기록된 사람들과 어울려서 그림과 글씨를 가지고 재주를 겨루어, 스스로 한때의 호쾌한 일이라 여겼던 것이다. 한번 읽어보니 말은 간결한데 뜻은 심원하며 훈계하고 깨우쳐주는 것이 너무나 정성스러워서 잘하는 자는 더욱 확신을 가지고 정진하게 하고, 못 미치는 자는 근심하며 고쳐나가게 하였다. ··· 우리 완당공(阮堂公, 김정희)이 주신 것이 어찌 많다고 하지 않으리요. 마침내 이를 구여(九如, 유재소)에게 정리하게 하여 몇 마디 말을 머리말로 덧붙여 동호인에게 보인다. 기유년(1849년) 중양(重陽, 9월 9일)후 이초당 앞 국화 그림자가 스산할 때.
위 글의 내용은 간결하지만 심원한 김정희의 품평을 감사하게 여기고 그 가르침에 따라 정진할 것을 다짐하는 것이다.
위 인용문의 다짐처럼 두 화가는 김정희가 제시한 고필과 담묵을 사용한 황한소경을 충실하게 조형적으로 실현하여 추사화파로 자리 잡는다. 그러면 이들이 그같은 작품을 그리는데 어떤 그림을 참고하였을까? 김정희는 이미 허련에게 자신이 그린 황한소경도를 보여주고 배우라고 하였다. 애제자 허련은 스승이 건넨 작품을 충실하게 임모까지 하였다. 그 작품 중의 하나가 바로 <임완당모정도(臨阮堂茅亭圖)>이다. 이같은 작품은 전기와 유재소가 선본으로 사용한 것이다.
전기(田琦, 1825∼1854)가 1849년 9월 13일에 그린 <추수연천도(秋樹連天圖)>는 거칠고 분방한 필법이나 입태(立苔)의 표현 등에서 <임완당모정도>와 상당히 유사하다. 전기가 황한소경도류를 집중적으로 제작하게끔 한 김정희의 영향력은 유재소(劉在韶, 1829∼1911)에게도 찾아진다. 유재소는 전기와 절친한 벗으로, 이들은 이초당(二艸堂)이라는 공동의 화실을 마련하고 함께 서화활동을 하였으므로 화풍에서는 더더욱 공유되는 부분이 많다. 1849년작 <추림소산도(秋林蕭散圖)>에서 마른 먹과 거친 필치로 산과 나무 등이 표현되어 있는 점, 곳곳에 가해진 입태의 표현은 <임완당모정도>와 비교할 수 있다.
신예 전기와 유재소는 살펴본바 대로 추사화파로서 김정희의 작품을 선본으로 삼아 그의 회화관이 반영된 황한소경도류를 제작하였다.
화단애의 추사화파의 회화 경향은 이렇게 되어가는 데도 불구하고 여항문인화가의 영수인 우봉(又峰) 조희룡은 김정희의 제자이면서도 <매화서옥도>처럼 고필과 담묵이 아닌 먹이 흥건한 붓으로 흥에 겨워 화면을 두들기듯이 그려나가, 절제미라고는 찾기 힘든 산수화풍을 구현하였다. 이것을 보고 스승 김정희는 뭐라고 하였을까? “하여간 우봉은 …” ▲ 문화재청 인천항 국제여객터미널 문화재감정관실 김현권 감정위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