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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씨는 화창하다 못해 눈이 부셨다. 며칠 심한 황사로 전날까지 하늘이 뿌옇더니만 판화가 이철수 선생을 만나러 가는 날 아침은 눈이 부시게 명징한 하늘이었다.
이번 인터뷰는 오는 6월 24일, 관훈미술관에서 이철수 선생의 데뷔 30주년 기념 전시회를 앞두고 작품집을 준비하는 컬처북스 대표 오창준 선배가 주선하여성사가 되었다. 전시회 준비와 기념 작품집 준비로 몹시 바쁘신 중에도 흔쾌히 (?) 인터뷰를 허락해 주신 터라 며칠 전부터 어떻게 하면 짧고 굵게 마칠까 궁리를 했지만 딱히 답이 나오질 않았다. 아니 오히려 무엇부터 여쭈어야 할지 가늠하기 힘들었다.
전전반측하다 새벽녘에야 까무룩 잠이 들고 새벽 6시 알람이 울리자 선잠에서 깨었다. 머릿속은 하얗고 대체 내가 왜 이 인터뷰를 하겠노라 나섰는지 후회막급이었다. 아마도 너무나 많은 분들이 이철수 선생님과 선생의 판화를 알고 있는 터라 자칫 섣부른 글로 그분과 그분을 좋아하시는 분들에게 실례를 범하지 않을까 하는 우려 탓이었으리라. 하지만 날은 밝았고 하늘은 두 번 다시 못 볼 정도로 깨끗하고 맑았다.
7시 20분, 서둘러 나선 덕에 제천으로 가는 길은 막히지 않았다. 차안에서 출판을 예술하듯, 예술 전문 출판을 하는 오 선배에게 슬며시 물었다.“형님, 이철수 선생님의 작품 특성을 한마디로 뭐라고 할 수 있을까요?”돌아온 대답은 짧고 명확했다.“자네가 지금 그걸 들으러 가는 거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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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시 30분, 오 선배와 함께 대문을 열고 들어간 이철수 선생님의 집은 참 낮고 평평했다. 다른 것이 있다면 잔디를 깔아둔 정원 곳곳 에 있는 조각들 정도랄까? 마침 댓돌 위에서 신을 신고 나오시는 사 모님이 우리를 알아보고 반기신다“. 장환아버지!오창준씨오셨네요.”그소리에문득그자리에얼어 붙고 말았다.‘이게 무슨 소리야? 장환 아버지라니?’사모님은 옆에 밀짚모자를 쓴 젊은이를 바라보며 한마디 하신다. “얘, 장환아! 그거 얼른 치우고 좀 쉬어. 젊은 녀석이 그렇게 골골해 서야...”알고 보니 이철수 선생님의 아드님 이름이‘장환’(필자의 이름 도 장환이다)이란다. 이런 인연이... 이름으로는 흔치 않은‘장환’이라 는 이름을 쓴다고 인사를 하자 사모님도 따라 놀라신다. 잠시 뒤꼍에서 나오시던 이철수 선생님은 웃는 낯으로 우리를 반기시더니 인 사보다 먼저 일부터 하자신다. “일단 저걸 먼저 좀 치워야 해. 그러고 나서 얘기하자고...”하시면서 빗물받이로 쓰던 캐노피를 해체해서 고추밭 옆 창고에 옮기자고 하신다. 일단 짐을 내려놓고 팔을 걷어붙인 다음 일을 거들었다.한 10여 분 전동드라이버로 해체하고 옮기고...손을 씻으시면서 그제야 인사를 하신다.“서울서 일찌감치 오시느라 애쓰셨네요.”웃는 얼굴이 해맑으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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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리를 옮겨 작업실에 마주앉았다. 사모님이 내주신 진홍빛 오미자차로 시원하게 목을 축이려는데“실은... 인터뷰를 하지 않으려고 했는 데... 내가 저 사람(사모님)에게 인터뷰 안 하겠다고 했거든. 그런데 저 사람이 창준 씨에게 전달을 안 한 거지. 그래서 이렇게 되었네. 나 원래 인터뷰 잘 안 하거든요.”하고 운은 떼시는 통에 사래가 들릴 뻔했다.“이왕 왔으니 차나 마시면서 이야기합시다. 나는 여기서 이렇게 칼질을 하고 있을 테니... 뭐 묻고 싶으신게 있으면 물어보세요.”라고 말하며 작업 중이던 목판을 손으로 쓸어내리고, 훅! 입으로 불어 나뭇조각을 털어내셨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당황해 하는데 선생님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담배를 피워 무시더니 밑그림을 따라 칼질을 하시면서 낮은 목소리로 말씀을 이으셨다.
“판화 새기는 거 처음 봐요? 난 줄곧 이걸 해왔지. 왜 판화를 하느냐고 묻는 사람들이 많았지요. 그럴 때마다 나도 내게 물었어. 30년 넘게 해왔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내 답은 하나야.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이것밖에 없어서...”
그러고는 길게 담배연기를 뿜어내시고는 담배를 손가락에 끼운 채 다시 칼질과 이야기를 이어가셨다.
“우리집은 있잖아요. 누가 고급 스테이크 재료를 가져와서 요리를 해준다고 해도 그걸 담아낼 그릇이 없어요.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그냥 된장찌개에 밑반찬을 담아내는 게 전부야. 다만 그걸 얼마나 정성스럽게 담느냐, 어떤 마음으로 담느냐 그런 게 중요하겠지. 그런 거예요. 내게 있어서 판화라는 거.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이것밖에 없다는 거... 그런데 사실 판화가 중요한 건 아니지요. 더 중요한 건 이야기예요. 좀 더 솔직하게 말하자면 이야기에만 관심이 있어요. 그래서‘판화가 아니면 안 된다’그런 생각은 하지 않지요.”
첫 번째로 준비한 질문이“데뷔 30년째를 맞는 판화가 이철수에게 판화는 무엇인가?”였는데, 묻지도 않은 질문에 선생님께서 자문자답을 한 셈이었다. 나직나직이 이어지는 말씀을 그저 듣고 있으려니 어느새 새기고 있는 목판 위에 숲이 조금씩 윤곽을 드러내고 있었다.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작품의 주제로 넘어가고 있었다.
“20대 때에는 판화가 가진 힘을 좋아했었던 거 같아요. 게릴라적이라고나 할까? 그것이 가진 완강한 힘을 좋아했지요. 그래서 판화가 가진 힘을 가지고 이야기를 했던 거지. 군사정권의 폭력, 민중들의 고단한 삶을 변화시켜서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으로 가자고 말이야. 그러다가 1988년에 독일에서 전시회를 열 기회가 생겼는데 그때의 경험이 참 많은 생각을 하게 하더군. 한동안 말을 할 수 없었다고나 할까? 그래서 잠시 작품이 뜸하기도 했지.”
손은 쉬지 않고 움직이면서 가끔 담배를 빨고 다시 손에 끼고 작업을 하면서도 말씀은 끊일 듯 이어졌다.
“그즈음 생각해보니 판화는 단순한 장르가 아니더라고. 따뜻함과 섬세함을 다 가지고 있을 뿐 아니라 이야기를 담을 수도 있는 장르야. 그러고 보니 미술이 갖추어야 할 모든 것이 다들어있더라고. 힘만이 아니라 말이야.”
이렇게 정리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철수의 판화가 소위‘외침’에서‘대화’로 나아가는 전환기는 성숙한 유럽 사회를 직접 경험하면서 소통의 방식을 바꾸면서 이루어졌다고. 그변화의 핵심을 그는 사물을 대하는 태도이자 관심, 즉 내면의 변화라고 정의했다. 특히 그는 88올림픽 이후 민주화운동이 거둔 몇 가지 눈에 보이는 성과가 있었음에 도 민주주의 운동 진영이 전망을 세우지 못하고 있을때, 그러면서도 싸움에 대한 의무감만 가지고 있을 때 몹시 힘들었다고 한다. 변화는 필요한데 그 방향과 해법을 찾지 못했기때문에 더 조심스러웠다고 한다. 그래서 1년간 그림을 그리지도 못했던 시절... 그때 그가 찾은 것이‘마음’이 었다고 한다.
“80년대 후반과 90년대로 접어드는 그 시절은 방향을 잃고 있을 때 세상으로부터 변화의 공간을 만들어가야 하는데 이를 뒷받침해줄 물리적 힘도 없었고... 결국 그림으로 해결 해야 한다는 과제를 안게 된 거지. 그때 붙잡은 것이 바로‘마음’이야.”
처음 마음에 관심을 천착할 때는 다분히 불교적이고도 상투적인 의미의 마음이었다. 하지만 점차 생각이 정리되면서 앞으로 우리들의 삶이 지향해야 할 방향을 제시하는, 그러면서 가져야 하는 마음으로 조금씩 구체화되었다.
“그것이 바로‘생명’이고,‘평화’야. 한번은‘새는 좌우의 날개로 나는 것이 아니라 온몸으로 난다’고 엽서를 보낸 적이 있어요. 좌우의 날개로 나는 것이 틀렸다는 게 아니라‘온몸’으로 난다는 인식이 필요하다는 거였어. 살아보면 좌우를 뛰어넘는 삶의 문제가 바로 생명이고 평화잖아요. 이번 일본 원전으로 인한 피해가 어디 좌파나 우파 어느 한 군데의 이야기가 아니잖아요. 모두의 문제예요. 그런 인식이 필요해.”
그는 좌파와 우파 등 사람을 구분 짓는 그 어떤 표현도 극복하고 싶다고 하셨다. 그래서 그가 말하는 온몸은‘혼신을 다한다’는 의미이기도 하고, 본질적이지 않는 구분과 차별이 없는 세계이기도 하고, 미성숙한 것을 포함하는 세계이기도 하다.
“팔이 하나 없어도, 다리가 하나 없어도 온몸은 온몸이잖아요. 그래서 온몸은 전존재이자 전인격이자 온전한 생명이라고 할 수 있겠지.”
선생님께서 바라시는 세상은 어떤 것일까 여쭸더니 아주 간단한 답이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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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고 사는 게 민주주의로 해결되는 세상이라고 할까? 형식적 민주주의, 민주주의적 형식이 전부가 아니고 건강한 생각으로 밥 벌어 먹게 하거나 안 좋은 미래를 선택하지 않아도 좋은 세상이지. 진정성이 성공하는 사회로 나아가는 게 절실히 필요한 때인 거 같아요.”
그래서 선생님은 요즘 부쩍 마음을 나누는 이야기를 하고 싶다고 하셨다.
“살아가는 것 자체가 피곤한 사람들로 가득한 우리나라에서 상황은 점점 심각해지는데 아무도 말하지 않으려는 것 같아요. 이야기 잘하시는 분들이 있잖아. 그분들이 말씀 하시길 기다렸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말씀이 없으셔서 나라도 하려고요. 요즘 사람들이 내게 이야기가 좀 많아졌다고 해요. 하지만 자연스럽게 하는 게 중요하다고 봐요. 정말 필요한 이야기라면 이제는 좀 하려고... 그래서 그림을 통해서 엽서형식으로 띄우는 <나뭇잎편지>를 통해서 더 많이 이야기 하려고 해요. 함께 각성하고 삶의 변화를 함께 이끌어가는 것, 그래서 운동이 삶 그 자체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우리 사회가 물질로 황폐해졌는데도 모두 침묵할 뿐 아니라 더러 거기에 맞춰 살라고 하는 걸 보면서 당신이라도 적극적으로 이야기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절박한 심정이지 않았을까 싶다.
“폭력적인 권력에 의해 죽어나간 사람보다 시장경제에 의해 죽어가는 사람이 몇 배는 많을 거야. 지금 자살하는 사람들이 정말 죽고 싶어 자살을 하겠어요? 타살이지...”
타들어가는 담배를 깊이 빨아들이며 토하듯 하신 말씀에서 그 절박 함이 어떤 것인지 가늠이 되었다. 인터뷰 아닌 인터뷰는 여섯 시간이나 계속되었다. 아니 여섯 시간 동안 참 귀한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묻지 않아도 아니 섣부른 질문을 하지 않아도 듣고 싶은 이야기들을 다 들은 셈이다.
그 사이 찾아온 손님들과 함께 점심을 먹기도 하고, 사모님께서는 깔끔하게 차려진 다과와 차를 세 번이나 내오시기도 했다. 전시회가 얼마남지 않은 터라 작품을 선정하고 마무리 작업을 하시는 일로 말씀하시는 내내 분주하셨지만, 종종 칼끝으로 집중하던 눈을 들어 안경 너머로 따뜻한 시선을 보내주신 터라 시골 외삼촌댁에 내려온 느낌이었다. 출판계 17년을 지낸 필자의 이력을 들으시고,“김 선생 이름이 우리 아들 이름과 같아서 놀랐는데, 어떻게 그동안 이렇게 가까운 사람들을 서로 알면서도 못 만났지? 그것도 놀랍네.”하시던 모습도 5월의 햇살이 넉 넉히 부려지는 시골집처럼 잊히질 않는다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