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쥐』
박쥐는 날아다니는 유일한 포유동물이다. 서양에서는 불길함과 연관 짓지만, 동양에서는 꼭 그렇지만은 않다. 박쥐 중 열매·꽃가루·꿀을 먹고 사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 곤충을 잡아먹고 사는 식충성 포유류다.
그러다보니 인체에 해를 주는 상당량의 곤충을 잡아먹어 인간에게는 그리 나쁜 동물은 아니다. 하지만 열대 아메리카에 사는 흡혈 박쥐들은 포유동물이나 큰 새들의 피를 먹고 산다.
박찬욱 감독이 2009년 스크린에 옮겨놓은 영화 『박쥐』는 후자에 속하는 박쥐인 듯하다. 아마도 그는 이 영화를 통해 마치 동물들처럼 살아가는 타락한 인간 군상들의 모습을 역겨워하며 표현하려 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런지는 모르겠으나 영화를 보는 동안 많이 불편했다. 그래도 보고자 한다면 권하고 싶다. 섹스에 굶주리고, 억압된 사회에 시달리고, 욕망을 풀지 못해 방황하는 것이 현대인들 아닌가. 올 칸 영화제에 경쟁부분 출품작이라니 좋은 결과 올 것이라 생각된다. 즐겁게 웃고, 가슴 저리게 애달프고, 진저리 쳐지는 반전, 더욱 우리 모두가 원하는 해피엔딩은 영화 속에 아무리 눈 씻고 찾아봐도, 죽어도 내재되어 있지 않다. 그런데도 그 긴 130분의 상영시간은 지루하지 않다. 그러니 봐야 한다.
‘상현/송강호’는 임종을 맞은 환자들의 마지막을 돌보는 일을 한다. 좋은 곳으로 갈 것이라고 죽어가는 환자에게 건네는 간호사의 간절한 임종사에 “당근이죠.”라고 의젓하고 근엄한 얼굴의 신부는 부드럽게 이야기한다. 마치, 영화 『박쥐』는 그렇게 부드러운 영화라고 암시하듯이 말이다. 그러나 절대로 그렇지 않다. ‘상현/송강호’는 진정으로 사람 살리는 일을 하고 싶었다. 그는 아프리카의 옛 프랑스 식민지에서 실시되는 백신 개발 임상실험에 자원한다. 그리고 바이러스에 감염돼 죽을 고비를 맞지만 정체불명의 피를 수혈 받은 뒤 ‘뱀파이어’가 되어 돌아온다.
우리들은 흔히 이해하기 어렵거나 거북한 경우에 ‘그로테스크’하다는 말을 사용한다. 영화 『박쥐』가 그로테스크하다. 공포가 있으나 인간 존중도 있다. 천박하지만 인간 본연의 순수함이 있다. 동물적이지만 이성적인 갈등이 존재하는 영화. 그것이 『박쥐』다. ‘그로테스크’는 16세기 로마건축양식에서 나온 말이다.
건축과 장식예술에서 동물·사람·식물 모양을 함께 사용하여 만든 환상적인 벽장식이나 조각장식을 ‘그로테스크’라 한다. 즉, 이질적인 것들의 결합이라 볼 수 있다. 그래서 ‘그로테스크’한 장면에 접하게 되면 인간은 공포와 웃음, 천박함과 두려움, 혐오감과 매력 등의 이질적인 감정을 느끼게 된다.
영화 『박쥐』는 본인의 의도와는 전혀 관계없이 동물로 변해버린 뱀파이어 신부를 등장시켜 인간답게 성스러운 관계모색을 꿈꾸는 인간의 너저분한 짓들을 질타한다. 본능적인 섹스, 물질에 싸여 사는 궁상맞은 짓거리들을 뱀파이어의 초능력으로 던져 버린다. 가증 섞인 인간의 허물을 벗겨보려 노력한 것이 감독의 의도인가 싶다. 리얼한 섹스 신, 남자 주인공의 성기 노출, 요염한 자태의 여주인공, 지겹게도 살고 싶어 하는 지긋지긋한 생명력, 최근에 대두되는 자기만족의 ‘사이코패스’, 이런 단어들을 떠 올리며 영화를 감상한다면 그대는 영화광이다. 『올드보이』에서 폐쇄공간 속에서 탈출하여 자신을 그렇게 가두어 놓은 상대에게 응징하는 한 욕망을 통해 삐뚤어진 사회현상을 고발하려 했다면 박찬욱은 영화『박쥐』는 동물이 된 신부의 절규를 통해 인간 본성을 찾아내려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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