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겨울, 옛글의 말미에서 그 마음을 읽다
정제규 | ||||
조선시대를 살았던 한 선비가 공들여 써놓은 『중용혹문(中庸惑文)』을 보다 그 말미에 쓰인 글을 읽어본다. “歲白鷄〔重光作?〕暢月 哉生魄 越三日 書庸識之” 공들여 쓰였을 그 글의 내용은 의외로 간단하다. “때는 백계(중광작악) 창월 재생백을 삼일 지난 날이다. 중용을 쓰고 기록한다.”
‘백계’와 ‘중광’ 그리고 ‘작악’은 이전 사람들이 그 날짜를 기록했던 하나의 법이었으니 ‘백(白)’은 십간가운데 ‘경(庚)’ 이나 ‘신(辛)’을 표현하였고, ‘계(鷄)’는 12지가운데 하나였던 ‘유(酉)’를 상징한다. 또한 ‘중광’은 ‘신(辛)’을, ‘작악’은 ‘유(酉)’를 뜻하는 고갑자(古甲子)였다. 한편 ‘창월(暢月)’은 음력 ‘동짓달’을 의미하고, ‘재생백(哉生魄)은 문자 그대로 달에 혼백이 처음으로 생기는 날인 ‘열엿샛날’을 일컫는 말이다. 그러니 선비는 어느 신유년의 겨울이 깊어가는 동짓달의 19일에 공들여 써왔던 작업을 마치고 그 감회를 책의 말미에 적어놓은 것이다. 동짓달은 겨울이 가장 깊어가는 달이라 한다. 그래서 24절기의 하나인 동지에는 밤이 가장 길고 낮이 가장 짧은 날이 된다. 그러나 ‘음(陰)’이 가장 극에 이르는 이 날은 오히려 이제까지 짧아졌던 해가 다시 길어지기도 하는 이른바 ‘양(陽)’이 다시 시작되는 때로 이해되었다. 그래서 옛사람들은 ‘작은 설’이라 하여 소중하게 생각하고, 동지팥죽을 쑤어 온 가족이 나누어 먹으면서, 집안 곳곳에 한그릇씩 놓아 삿된 기운을 피하고 귀신을 쫓고 무사태평을 기원하는 마음을 담았다. 동짓달에 이루어진 이 책의 정성스런 글씨를 보며 선비의 마음을 생각해본다. 아마도 선비는 새로운 시작을 준비하고 있었을 것이다. 주자는 『중용』에서의 ‘중(中)’을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기울어지지 않으며, 지나침도 미치지 못함도 없는 것〔不偏不倚無過不及〕’이라 하고, ‘용(庸)’이란 ‘떳떳함〔平常〕’이라 말하였다. 선비는 그 말에 깊게 동감했으리라 보인다. 그래서 내년에 세상을 살아가는 마음자세를 『중용』에서 찾고자 했을 것이다. 그리고 한겨울 내내 책을 읽어 내려갔을 것이다.
선비의 곁에는「서산(書算)」이 있다. 손때 묻은 서산은 겨울이 깊어가면서 하나 하나 세워지고, 또다시 접혀져갔을 것이다. 18세기를 살았던 홍대용(洪大容)은 「여매헌서(與梅軒書)」라는 글에서 책을 읽는 마음에 대해서 밝혀 놓았다. 그곳에는 “매일 배운 것을 먼저 정확하게 외고 음독(音讀)에 착오가 없이 한 뒤에 비로소 서산(書算)을 세우고, 먼저 한번 읽고 나서 다음에는 한번 외고, 그 다음에는 한번 보며, 한번 보고 나서는 다시 읽어 모두 30,40 번 되풀이한 뒤에 그친다.”는 내용이 있다. 또한 기운이 떨어지기에 소리로 읽어서는 안되고, 마음이 달아나기에 눈을 돌려서도 안된다고 경계하고 있다. 결코 쉽지만은 않은 옛선비들의 책읽는 마음을 본다. 2007년의 마지막 달인 12월, 음력으로는 동짓달이니 모두 새로운 마음을 준비해야 할 시기이다. 작은 설을 보내며 정성들여 준비한 필사본책이 아니더라도, 옛책으로부터 전해받은 선비의 마음이라도 간직했으면 하는 바램이다. 그럼 내년은 조금이나마 더욱 풍족하리라. ▶ 문화재청 청주국제공항 감정관실 정제규 감정위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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