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이 건너오다
김설희(상주숲문학회)
속을 다 비운 산이 어디 먼데를 돌아 제자리로 왔다
그가 흘린 것들이 무엇인지
어디를 돌아 왔는지
아무도 모른다
당신의 가랑이를 슬쩍 지나간 바람 같은 것
당신의 정수리에 그림자를 드리우다 간 구름 같은 것
교통사고 현장에서 누군가의 피를 밟고 지나간 발자국 같은 것
그런 시간들이 그의 속이었을까
세상 감옥을 벗어난 물렁한 산 하나가 누워있다
산맥 같았던 핏줄이 얇은 살기죽을 겨우 들고 있다
가죽의 파랑사이 흙냄새가 물씬 솟아난다
헐거워진 아랫도리에서 계곡 물소리가 찔찔거린다
속을 다 버린 산에는 슬픈 새소리마저 사라졌다
벌거숭이, 누가 어디를 만져도 부끄러움이 없다
헐렁한 산은 이제 눈을 감고
지나온 대지에 깊숙이 뿌리박을 것이다
그리고 산은 다시 산으로 건너갈 것이다
- 김설희 시집 『산이 건너오다』 (2017 리토피아)
시를 읽으며 '건너오는' 것과 '건너가는' 것의 차이를 생각한다.
이 시의 '산'은 시인에게 산처럼 느껴지는 존재(사람)이다.
짐작하건대 '아버지'가 아닌가 싶다. 혹은 어머니라 하여도 무방하다. 혹은 시어 그대로 의인화한 '산'으로 읽어도 되겠다.
그러나 사람의 존재로 읽으면 더 바특하게 읽히는 시이다.
병상에 누워있는, 현재의 시간을 놓아버린(현재의 시간에서 놓여난) 존재를 바라보며, 이별을 준비하며, 존재의 의미를 여며주는 시간처럼 보이는 시 '산이 건너오다'.
주어진 시간을 다 비워낸 존재는 '산'처럼 살다가 '산'의 속을 다 비워내고, 다시 '산'으로 건너간다.
건너오고 건너가는 산은 흡사 신의 앞에 놓인 모래시계와 닮았다는 생각이 든다.
시계 속의 모래는 거의 남지 않았다. 시계를 다시 거꾸로 세우는 신의 손이 보인다.
어쨌든 산은 다시 새로운 산이 될 것으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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