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 공주 고마나루 ■ , ■ 영광 법성진 숲쟁이 ■

이산저산구름 2015. 12. 21. 20:53

 

주 고마나루

 

 

지정번호 명승 제21호
소 재 지 충청남도 공주시 웅진동 산22-1 외
지정면적 889,306㎡
지 정 일 2006년 12월 4일

 

공주 고마나루는 무령왕릉 서쪽으로 펼쳐진 낮은 구릉상의 산록인 금강변 일대와 금강수면, 그리고 연미산 지역에 걸쳐 명승으로 지정되어 있다. 공주시 북쪽에 위치하여 동쪽에서 서쪽 방향으로 흐르는 금강이 연미산에 부딪쳐 깊은 소를 이루면서 방향을 남쪽으로 바꿔 흐르는데, 이렇게 금강이 꺾여 흐르는 곳을 고마나루라고 한다. 고마나루의 금강변 백사장이 있는 강 언덕에 수령 약 60여 년이 되는 소나무 약 400여 주가 아름다운 송림을 이루고 있으며, 현재 송림 안에는 웅진단熊津壇터가 남아있다. 송림의 아래에는 하천의 퇴적작용에 의해 고운 모래가 길게 퇴적되어 강변의 수제부를 빼어난 경관으로 만들고 있고, 이 백사장은 금강의 푸른 물과 어울려 고마나루 경관의 진면목을 보여주고 있다. 고마나루 강 건너에는 연미산이 우뚝 솟아 있으며, 이 연미산에는 고마나루의 설화와 관련된 곰굴이 있다. 연미산은 고마나루를 내려다 볼 수 있는 다수의 조망지점이 있는 곳이다. 현재 폐도가 된 도로의 앞 산 기슭과 연미산 정상을 향하는 등산로의 중간중간에서 바라 보이는 고마나루의 경관이 매우 아름다워서, 이곳의 조망지점들은 고마나루의 활용에 적극 이용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고마나루는 백제 역사의 중심에 있던 곳으로 역사적 가치가 클 뿐 아니라 금강 변에 넓게 펼쳐진 백사장과 솔밭이 금강 및 연미산과 함께 어우러져 아름다운 경관을 자아내고 있는 곳으로, 역사문화적·경관적 가치가 뛰어난 경승지로 평가되고 있다.

 

 

공주 고마나루는 공주의 금강변에 위치한 아름다운 자연경승이기도 하지만, 공주의 태동지이자 곰과 인간에 얽힌 전설이 내려오는 역사·문화경관으로서의 의미가 더욱 큰 명승이라 할 수 있다. 고마나루는 공주의 옛 지명으로서‘고마固麻’는 곰의 옛말이며 한자로는‘웅진熊津’이라 한다. 고마나루를 신라 신문왕(?~692) 때는 웅천주熊川州, 경덕왕 때는‘웅주熊州’라 하였으며, 940년(태조 23)에 공주公州로 고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곰은 백제의 토템으로 백제 초기 한강시대부터 유래되고 있고, 특히 공주 주변에는 고마나루·웅진·웅천주·웅주·공주 등 여러 지명에서 나타나고 있다.


고마나루는 백제 문주왕(?~477)이 웅진 천도 시 이용하였던 교통로였고, 660년 나당연합군의 당나라 장군인 소정방이 백제 공격을 위해 금강을 거슬러 와 주둔했던 곳이다. 또 백제 멸망 후에는 웅진도독부를 설치하였던 곳으로서, 백제 역사의 중심무대이자 국제적 교통의 관문이었다. 고마나루는 금강의 수신水神에게 제사를 올리던 웅진단터가 남아 있는 등 백제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공식적인 국가의 제사 공간이었으며, 일반 서민들의 주요 생활터전이자 수상교통로로 민중의 정서와 애환이 짙게 서려있는 역사적 가치가 큰 곳이다. 이곳에는 처녀곰과 나무꾼 총각에 얽힌 아름답고도 슬픈 전설이 전해 내려오고 있는데, 현재 고마나루 북쪽에 솟은 연미산 중턱에는 전설 속 곰이 살았다는 곰굴이 고마나루를 내려다보고 있으며, 마을에서는 곰의 원한을 풀고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기 위하여 나루터 인근에 곰사당을 짓고 제사를 지내왔다고 한다. 곰사당 안에는 석조로 곰을 제작해서 안치하고 있는데, 이 석조 곰은 송산리 고분군의 왕릉에서 200m 남쪽에서 출토된 웅진 석조 곰상을 바탕으로 제작했다고 한다.

 

 

 

■ 영광 법성진 숲쟁이

 

 

지정번호 명승 제22호
소 재 지 전라남도 영광군 법성면 법성리 821-1 외
지정면적 27.397㎡
지 정 일 2007년 2월 1일

 

영광 법성진 숲쟁이는 법성포法聖浦마을에서 흥농방향으로 연결된 842번 지방도로의 고갯마루 부분에 좌우측으로 산 능선을 따라 법성리와 진내리에 걸쳐 조성되어 있다. 법성포의 후면을 둘러 싸고 있는 산세는 인의산(157m)부터 좌측 능선은 남측의 대덕산(240m) 방향으로 이어지고, 우측 능선은 진내리 방향으로 뻗어 내린다. 서쪽의 진내리 방향으로 인의산의 자연림이 끝나는 남쪽부분에서 시작되는 숲쟁이는 842번 지방도로가 가로 지르는 부분까지 완만한 하향 경사면에 조성되어 있으며, 다시 도로 건너편으로 연결되어 오르막 경사로 이루어진 산 능선을 따라 길게 선형으로 마치 두 개의 산을 연결한듯이 숲이 조성되어 있다. 이 숲은 본래 하나로 연결되어 있었던 것인데, 지방도로가 개설되면서 2개로 나누어 졌으며, 현재는 도로 위에 두 개의 숲을 연결하는 다리(부용교)가 놓여 있다. 숲쟁이는 진내리의 산 능선을 따라 축성된 법성진성의 윗부분에 줄을 지어 심어져 성이 끝나는 산 아래까지 조성되어 있고, 전체 길이가 300m에 이른다. 이 숲에는 와우정과 부용교가 조성되어 있으며, 진내리 숲에는 야외무대·그네·씨름장 등이 조성되어 있었으나, 시설설치를 위해 행해진 복토와 변경된 숲 지반을 원상 복원하는 공사와 함께 현재는 복토를 제거하고 시설들은 철거된 상태이다.


영광 법성진 숲쟁이는 고려시대 이래 전라도에서 가장 번창한 포구였던 법성포와 마을을 보호하기 위한 법성진성法聖鎭城과 성 위에 조성된 숲을 이르는 것이다. 법성포는 삼국시대부터 구한말에 이르기까지 중국, 일본과의 해상 교통로 상에 위치하는 우리나라 서해안의 대표적인 항구였을 뿐 아니라, 서해에서 가장 품질 좋은 조기가 잡히는 칠산 앞바다에서 들어오는 조기 배로 파시를 이루었기 때문에“영광 법성으로 돈 실러 가세”라는 말이 생길 정도로 많은 보부상들이 모여들어 매우 번창했던포구였다.‘법성진法聖鎭’이란 법성지역에 구축된 수군의 행정구역으로 조선 1398년(태조 7)부터 조창을 방비하기 위하여 수군 만호의 지휘 아래 수군의 상비 병력이 배치된 이후 1485년(성종 16)에『경국대전』에 보이는 수군편제상 법성진의 모습을 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법성진성은 1514년(중종 9)에 돌로 쌓은 석성으로 성의 전체 둘레는 약 462m이며 현재는 북벽만 전구간이 남아 있고 나머지는 서쪽과 동쪽 일부만이 남아 있으나, 그 성벽의 보존상태가 양호하고 성벽에 새겨진 글 등은 조선시대 진성을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숲쟁이의 ‘쟁이’ 란 ‘재’, 즉 ‘성城’의 뜻으로 ‘숲쟁이’란 숲으로 된 성을 의미하며, 또 다른 의미로는 인위적으로 조성한 마을 숲에 대한 명칭인 숲정이의 방언으로 보기도 한다. 법성진 숲쟁이는 법성포구와 마을을 보호하는 방풍림의 역할을 해 왔으며, 예로부터 파시로 몰려드는 보부상들이 이 숲에서 단오행사를 개최하였는데, 이것을 시작으로 용왕제와 단오날 선유놀이 등 지금 의‘영광 단오제’와 지역의 각종 민속행사가 이 숲에서 열려오고 있다. 영광 법성진 숲쟁이는 법성진성과 숲이 포구와 어우러져 특이하고 아름다운 경관을 자아내고 있을 뿐 아니라 각종 민속행사가 행해지고 있는 장소이며, 조선시대 수군 진의 모습과 파시로 번창했던 법성진의 영광을 현재까지 전해주는 등 역사적·문화사적 가치가 매우 뛰어난 명승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