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 안동 문화

정호경 신부님의 생애

이산저산구름 2015. 12. 8. 14:24

 

 

정호경 신부님의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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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봉화에서 정호경 신부. 사진 조현 기자


권정생의 동화 <비나리 달이네 집>의 주인공인 천주교 안동교구 원로사목자 정호경(사진·루도비코) 신부가 지난 4월 27 저녁 7시46분 숙환인 폐섬유화증으로 선종하셨습니다.

“고맙다”는 마지막 말씀을 남기고 일흔 두해 동안 머무시던 육신을 벗고 영원한 안식처로 길을 떠나셨습니다. 가난한 사제이자 부족함이 없는 농부로서 당당하고 멋진 삶을 기쁘게 사시다가 마침내 해방하시는 하느님 품에 안기셨습니다.


정호경 신부는 1941년 일제하 경북 봉화에서 금융조합에 다니던 아버지 정용시(鄭容時, 1916년생)와 어머니 조춘옥(趙春玉, 1918년생)의 3남 2녀 중 둘째로 태어나셨습니다. 여섯 살 되던 해 8 · 15가 되자, 좌익운동을 하시던 아버님은 집을 비우셨고, 어머니마저 막내와 함께 남편을 찾아 나섰습니다. 그때가 ‘6·25 전쟁’ 5일 전, 정 신부님 나이 열한 살이었습니다. 그 뒤로 부모님을 만날 수 없었고 홀로 너무나 끔찍한 전쟁과 분단의 현장을 겪었습니다. 신부님의 어릴 적부터 광주가톨릭대 입학시절까지 겪으신 이야기가 <가톨릭뉴스 지금여기>에 연재된 바 있습니다.


갖은 고생 끝에 1968년 서울 가톨릭대를 졸업한 뒤 사제 서품을 받았고, 안동본당(현 목성동성당) 보좌신부를 거쳐 다인본당 주임신부로 사목활동을 시작했습니다. 1973년부터 1976년 교구 사목국장에 부임하기 전까지 고려대 대학원에서 심리학, 동양철학, 불교 등을 공부하셨습니다. 그 덕에 몸과 마음에 비로소 살을 거느릴 수 있었다고 말씀하시기도 했습니다. 당시 서울에 계셨기에 1974년 민청학련사건 관련 천주교원주교구장 지학순 주교님 구속사태를 계기로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결성작업에 더 적극 참여하실 수 있었습니다. 신부님께서 군사독재문화, 분단과 힘의 논리를 강력히 거부하셨던 것은 어린 시절 체험과도 관계가 있을 것입니다.


신부님이 안동교구 사목국장으로 계시던 1977년 10월 안동에서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주최 <노동자 농민 양심수를 위한 기도회>를 열었는데, 민주적 제 권리를 억압하던 족쇄였던 긴급조치를 해제하라고 주장하는 기도회를 주도한 혐의로 류강하 신부님(2010년 작고)과 함께 긴급조치 위반으로 구속됐다 풀려 나셨습니다. 이어서 1979년 8월 이른바 ‘오원춘사건’ 때 ‘농민운동 탄압과 민주주의 말살 등 허위사실을 유포, 긴급조치를 위반했다는 이유’로 두 번째 옥고를 치르셨습니다.


1982년 6월부터 정호경 신부님은 가농(가톨릭농민회) 전국지도신부를 맡아 한국천주교 200주년기념사업으로 사목회의 의안 작성, 전국공소실태조사, 농민교리서 편찬 등 중요한 역할을 1988년 10월까지 하셨습니다. 6월민주항쟁의 타협물인 대통령선거에서 후보단일화국민협의회 공동대표를 하실 때는 운동권의 분열을 무척 마음 아파 하셨습니다. 그러나 신부님은 긴급조치로 두 차례의 구속과 투옥을 통해서, 그리고 가톨릭농민회 지도신부와 한국공해문제연구소 이사장으로 일하시면서 늘 ‘더불어 사는 길-십자가와 부활의 현장’을 보게 해주신 ‘가난한 사람들 가운데 계신 하느님께 깊이 감사드린다’고 하셨습니다.


1994년부터는 ‘입품 그만 팔고 몸으로 살련다’고 작심하시고는 일체 출입을 마다하시며 봉화군 명호면 비나리 풍락산 자락에서 낮에 농사짓고 밤이나 겨울 농한기에 책을 쓰시며 ‘돈 없이도 즐겁게 사는 삶’을 보여주셨습니다. 동창신부님들이 돈을 모아 산기슭 땅을 사주셨고 집은 기술자의 도움을 받아가며 자신이 직접 지으셨습니다. 그리고 손수 집짓는 이야기를 책으로 냈는데, 도면부터 같이 일을 거들었던 사람들의 전 과정을 상세히 기록하여 대학 건축학과에서 부교재로 이용되기도 했다고 합니다. 거의 20년 동안 이천 평의 논과 밭을 혼자 힘으로 유기농법 농사를 지으시며 교구청에서 주는 경제적인 도움도 거절하고 ‘은수자’처럼 청빈한 생활을 하셨습니다.


동창이시자 가톨릭노동청년회 지도신부이셨던 인천교구 원로사목자 황상근 신부님은 조사(弔詞)를 통해 정 신부님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는 제도 교회 안에만 머무르려 하지 않았다. 진리는 넓고, 어떤 종교가 진리를 독점하지 않으며, 여러 종교에 진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불교, 유교에도 관심을 갖고 연구했다. 작은 책자이지만 불교의 ‘반야심경’과 인도의 ‘우파니샤드’ 등을 해석한 책들을 펴내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성서를 깊이 읽고 말씀대로 살려고 했다. ‘전각 성경 말씀을 새긴다’라는 책을 통해 발표되었지만 마음에 깊이 닿은 성경말씀을 목각에 새겼다. 우리가 가장 많이 하고 있는 시편 기도를 이 시대 우리 마음의 기도로 만들기도 하였다. 시편 기도가 수천 년 전 그 시대 현실에 따라 변천하고, 그 시대 사람들의 기도로 만들어졌듯이, 우리 현실에서 보다 더 우리 마음에 맞는 기도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였다. 세상을 떠나기 전에도 불편한 몸을 이끌고 성서를 일어로 필사하고 있었다. 몸과 마음의 건강을 위해서 하루 두 시간 정도 쓰고 있다고 했다.


그는 농민회 지도신부로 있을 때 농촌사람들이 하느님을 잘 받아들일 수 있도록 ‘농민교리서’를 집필하였다. 여러 사람들과 회합을 통해 작성하고 그 후 많은 사람들과 평가모임을 갖기도 하였다. 신학자 신부 중에는 그 책을 읽고, 농민들이 쉽게 하느님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만들었다고 하면서 수 세기만에 나올 수 있는 책 같다고 말했다. 그러나 별로 선전도 하지 않고 보급도 되지 않아 많은 사람들이 알지도 못한 채 묻히고 말았다.

70세를 맞으며 전국 도보 순례를 하였다. 120일 동안 전체 3천 킬로, 하루 30킬로 걷는 경우가 많았다고 했다. 은인 한 분이 비용을 부담해주었는데 비용이 남아 되돌려 주었다고 했다.


비록 몸은 쓰러지고 사라졌지만, 그는 하느님이 주신 삶의 소명을 완성한 승리자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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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호경 신부님과의 추억을 따라서


누구나 추억을 간직하고 살아갑니다. 고향이나 어머니 품처럼, 생각하면 마음이 따뜻해지고 고마운 분들이 떠오르는, 그래서 미소를 지으며 감사하고 힘을 낼 수 있는 그런 추억 말입니다. 내게는 정호경 신부님과 함께 했던 안동시절이 그런 추억입니다. 암울했던 시대상황 속에서 부족하고 잘못한 것도 많았지만 모든 것을 감싸주고 받아주신 좋으신 분들과 수많은 분들의 기도 덕분에 열정과 패기를 잃지 않고 제 인생에서 가장 치열하게 일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가장 행복했던 시절이었고 지금도 하느님께 감사드리고 있습니다.


저는 학생 때 ‘민청학련’사건으로 복역하다 형집행정지로 나와 고향 강촌에서 농사일을 하다가 가톨릭농민회에 입문하였습니다. 처음에는 원주를 드나들며 가농 강원연합회 창립에 참여하였고 1977년 봄 안동교구로 가게 되었습니다.


가톨릭노동청년회 총재 주교님을 역임하셨던 천주교안동교구장 두봉 주교님과 사목국장 정호경 신부님께서 농민사목과 공소사목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계셨기 때문에, 저는 가톨릭농민회 전국본부와 안동교구 둘 중에 안동에서 일할 것을 선택했습니다. 경북지방이 독재자 박정희의 안방이기도 했고, 안동교구는 열악한 농촌지역이 많아 생생한 현장을 접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그 무렵 사목국에 농민사목부를 설치했고, 두봉 주교님께서 <농민문화>라는 잡지에 ‘농민에게 고함’이란 글을 쓰시고 <이웃 안에서 하느님을 찾자!>는 사목방침을 내걸기도 했습니다.


1970년대 당시 경북지역 농업농민은 보릿고개를 막 넘겨 절량농가는 면해가고 있었지만, 새마을운동과 다수확품종 경작강제에 의해 자주적 영농권마저 빼앗기고 고도성장과 자본축적을 위한 저노임-저곡가 정책으로 한창 어려웠습니다. 유신독재체제 아래 농민의 민주적 제 권리가 극도로 억압당하는 상황 아래서 가톨릭농민회(이하 가농)를 중심으로 깨우친 농민들이 비로소 농민운동의 싹을 틔워 갈 때였습니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그때는 농가에서 술을 담가먹으면 주세법 위반이라 ‘술 조사’를 하였고, 나무를 때서 난방을 하던 때라 ‘솔가지 조사’를 해서 산림법 위반으로 처벌하므로 이를 수단으로 농민회원을 겁주고 탄압에 이용하였습니다. 지금은 상상하기도 어려워졌지만 공무원들이 새마을 운동 미명 아래 초가지붕을 강제로 뜯어내고, 증산을 위해 일반볍씨를 담근 함지를 엎어버리거나 일반벼 못자리를 짓밟기까지 하며 통일벼 경작을 강제하였습니다.


당시만 해도 경북지방에는 한국전쟁 시기에 남편이나 아들들이 빨치산으로 산에 갔다가 죽거나 월북하여, 한 날 제사가 있는 집들이 많았고 과부들만 사는 집도 여럿이었습니다.

해마다 장을 담을 때, ‘할매요, 식구도 없는데 왜 그리 많이 담그나?’하고 물으면 ‘언제 올똥 아노!’하며 수십 년 세월 북에 간 식구를 기다려오면서도 빨갱이로 몰릴까봐 제일 두려워하였습니다.


탄압 양상은 친인척을 동원한 회유, 정보기관원의 협박, 말단관료 경찰 농협직원들의 다양한 직간접 방해, 경제적 압박, 회유, 정권차원의 직접 탄압 등 동원가능한 모든 수단을 강구하였습니다. 심지어 상주 중동 공소에서 현지교육을 하는데, 류강하 신부님 강의 중에 상주경찰서 정보과 직원이 참석해서 받아 적고 있는 것을 적발하고 나가라고 했다가 멱살잡이를 당한 적도 있었습니다.


겁 안내고 활동하기 위해 오죽했으면 당시 활동과제로 ‘지서(경찰서) 똑바로 쳐다보고 지나가기’, ‘하는 말 받아 적기’, ‘엄살작전’, ‘첫 싸움은 꼭 이겨라’ 등을 삼았겠어요! 그래서 회원 한 사람, 분회 하나가 모두 탄압을 먹고 자랐습니다.


그 때는 전국적 조직역량이 적었기 때문에 어느 한 곳에서 문제가 발생하면 전국에서 몰려가 집중투쟁을 통해 끝장을 보고 헤어졌습니다. 그래서 가농은 악명(?)이 높아갔고 무서워하기도 했지만 의식있고 억울한 농민들이 깃들기도 했습니다. 당시는 신자가 아니어도 회원이 될 수 있도록 개방적이었습니다.


농민과 함께 춤추시고 - 추수감사제


정 신부님은 농민과 함께 막걸리와 말씀을 나누며 토론하고 함께 춤추는 걸 좋아 하셨습니다. 1975년부터 실시한 쌀생산비조사는 안동에서도 해마다 여러 회원이 참여했는데 나중에 생산비조사보고대회와 생산비보장서명운동, 추곡수매가요구투쟁으로 자연스럽게 발전했습니다.


유신독재 때 ?쌀생산비 조사보고 농민대회 및 추수감사제?라는 집회 형식은 가톨릭 전례와 함께 천주교회 마당에서 합적으로 치루는 민중집회의 원형이자 일종의 축제였습니다. 요즘 집회나 시위 때 풍물에 맞춰 농기와 구호를 쓴 만장깃발을 들고 입장하는 것도 다 이 때부터 유래한 것입니다.


당시 지역별로 1천여 명 정도가 모이는 큰 잔치인데도 많은 비용이 들지 않은 것은 가농의 마을조직인 분회가 서로 음식을 만들어가지고 참여했기 때문에 가능했고, 또 신자들의 집에서 민박을 해서 각 지역에서 온 사람들의 마음을 따뜻하게 해주었습니다. 정 신부님은 이럴 때마다 지도신부로서 농민과 막걸리도 나누고 같이 춤추며 앞장서 어울리셨습니다.


1978년 영남지역 <쌀생산자대회>를 상주 함창에서 1박2일로 개최했는데 그 일대에 농민들이 몰려오는 소리가 들릴 만큼 농민회가 확장되어, 그해 12월28일 안동문화회관에서 가농안동교구연합회를 창립하였습니다.

초대회장에 당시엔 신자가 아님에도 권종대 회장이 선출될 수 있었던 것은 농민과 함께 하고자 하셨던 정호경 신부님과 두봉 주교님의 너른 품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싶습니다.


농민과 같이 짓밟히고 갇히시다 - 영양 감자피해보상운동


정 신부님은 농민과 같이 짓밟히고 갇히셨습니다. 저와 공범이 되는 것도 감수하셨습니다. 1978년 함평 고구마농협수매불이행피해보상운동이 8일간의 단식투쟁으로 승리한데 이어, 79년 영양군과 농협에서 공급한 감자(시마바라)불량종자피해보상운동이 안동교구사제단의 지원에 힘입어 승리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에 앞장섰던 오원춘 청기분회장이 기관원에 의한 납치폭행사실을 고백하고 성당에서 양심선언까지 했습니다. 이를 가농 전국조직과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을 통해 전국에 알리자 세칭 ?오원춘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가농과 도시산업선교회에 대한 대통령특별조사령이 떨어지고 대검에서 헬기를 타고 다니며 전체 회원에 대한 탄압이 자행되었습니다. 오원춘 형제는 물론 대죽공소에서 현지교육을 하던 나와 권종대 회장, 교구청에서 정호경 신부님을 차례로 구속하고, 두봉 주교님까지 추방하려 했습니다. 대구 대공분실에서 만난 정 신부님은 묵비권을 행사하시며 단식으로 맞서고 계셨습니다. 같이 대구교도소로 이송되면서 송구스럽기도 하고 한편 혼자가 아니라 든든하기도 했습니다.


8월6일 목성동성당에서 김수환 추기경님께서 강론하신 기도회를 마치고 안동 최초로 촛불시가행진을 하며 긴급조치와 유신헌법 철폐 구호가 나오기도 했습니다. 국민권익위원회 위원장과 특임장관을 지낸 이재오 의원(당시 앰네스티 한국지부 사무국장)도 그 때 발언으로 구속되고, 점점 전국적으로 번지자 문정현, 함세웅 신부님도 재구속, 최병욱 당시 가농전국회장, 서경원 전남연합회장까지 구속되었으며, 많은 회원들이 구류처분을 받았습니다.


유신독재와 가농, 천주교, 민주화세력 간의 전면전은 YH사건과 함께 유신독재의 종말을 재촉한 사건이 되었습니다. 이 안동가농 사건은 농민의 정치투쟁으로서는 70년대의 절정을 이루는 것이었습니다. 덕분에 나도 결혼 반 년만에 감옥신세를 지게 되었지만 10.26사건 후 대통령긴급조치 9호가 해제되어 구속집행 정지로 다른 구속자들과 함께 출옥하였습니다. 한 달 간 목성동성당에서 농성할 때 탄압에도 굴하지 않고 날마다 기도해주신 수많은 이들의 은혜는 평생 갚을 길이 없을 것입니다.


광주민주항쟁 - 같이 아픔을 겪으시고


1980년 소위 ‘서울의 봄’ , 대전에서 열린 「강제농정철폐 민주농정실현 전국농민대회」(4.11)에 이어, 광주에서도 「민주농정실현 전국농민대회」(5.18)를 계획했으나 계엄군의 광주시민학살 만행으로 무산되었습니다.


저도 집회에 참석하러 광주에 갔다가 목격한 초기 광주항쟁의 진상을 대구사람들에게 알린 것이 ‘대구에서 제2의 광주사태를 획책했다’ 하여 얼마 후 계엄포고령 위반으로 또 구속되었습니다.


그 때는 대공분실, 보안사, 중앙정보부 등이 합동수사본부를 꾸려 조사하던 중이었는데, 발가벗겨 매달고 별의 별짓을

다하며 손발이 탱탱 붓도록 때리기에 수사관더러 ‘내가 묻는 말에 대답을 안 하더냐, 아니면 거짓말을 했느냐? 왜 이리 때리는가?’하고 항의했더니 ‘그냥 미워서’라고 대답해 어이 없었습니다. 많은 분들의 기도 덕분에 한 달 만에 석방되었고 나중에 광주민주화운동 유공자가 되었습니다. 정 신부님도 광주 참상에 너무나 맘 아파하시며 입술이 부르트도록 몇날며칠을 괴로워 하셨습니다.


이 시기에 창립 첫 해 이른 바 오원춘 사건, 안동사태로 인한 집중적인 탄압과 유신독재의 종말, 그리고 광주민주화운동 등 숨 가쁜 정국을 통과해온 안동가농은 조직정예화에 치중하며 중점적으로 회원들의 교육과 학습회운동을 하게 되었습니다. 학습회는 필요로 하는 자료나 문건(예, 전국성명서)을 돌아가며 읽고 단어 하나라도 서로 이해하는 바를 돌아가며 얘기하는 상호교육 형태로 진행했습니다.


정 신부님 가르침을 따라 복음대화도 그런 방식으로 했습니다. 생활 속에서 말씀을 나누는 참 살아 숨 쉬는 말씀나누기였지요. 그즈음 1981년 네덜란드 세베모의 지원으로 용상동 과수원 끝 뚝방 밑에 정신부님이 직접 설계하신 안동농민회관을 건립하여 <농민도서관>도 운영하며 교육활동을 더욱 활발히 전개할 수 있었습니다.


지역운동과 함께 하시다


정 신부님이 만드시던 <공소사목>지는 교구주보처럼 원격지 홍보교육수단이자 많은 이들을 엮어주는 촉매역할을 했습니다. 당시는 일체의 보도가 통제되고 사람이 그리운 시절이라 어느 지역에 누가 있다는 걸 서로 알려줘 만나는 게 즐거움이고 숨통을 트는 일이었습니다.


처음에 서울 창작과비평사에서 얘기 들었다며 이오덕 선생님(당시 안동 대성초 교장)이 교구청으로 찾아오시고, 또 크리스찬아카데미를 통해 이현주 목사님(당시 울진 죽변감리교회)을 만나면서 권정생 선생님(아동문학가, 당시 일직교회 종지기)과 이철수 (판화가)를 알게 되어 만나고, 창비 독자편지에 가명으로 쓰신 글을 보고 만나고 싶어 했던 전우익 선생님(봉화 상운)이 교구청으로 찾아 오셨습니다. 또 이동순 교수(당시 간호대), 조동걸 교수님(당시 안동교대)도 한길사에서 얘기 들으시고 찾아오셨습니다.


이렇게 만난 분들께 당시 접하기 어려운 정보나 자료를 게재해 인기가 높았던 ‘공소사목’지를 보내드리기도 하고 종종 식사모임도 했습니다. 제가 한 열흘 현장을 한 바퀴 돌아오면 정신부님께선 좋은 분들과 한 잔 하자고 하시곤 하셨습니다. 그러면 피로가 풀리고 다음 날 거뜬하게 일어나 즐겁게 일할 수 있었지요.


그래서 처음으로 안동문인협회나 지역인사들과 함께 <육사 문학의 밤>과 <권정생 동화의 밤>을 안동문화회관에서 열기도 하고, 마리스타학생회관에서 <이철수 판화전>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 땐 초대장을 가리방을 긁어서 엽서에 찍어 보내곤 했어요. 또 백기완 선생님 초청강연회를 안동교회나 문화회관에서 갖기도 했습니다.


대중적인 활동 뿐 아니라 정 신부님이 주동이 되어 장자공부모임, 채플린영화감상모임, 단소교습모임 등 서클도 활발히 조직했습니다. 또 일본어 공부모임을 시작하여 일부는 나중에 안동YMCA교사회를 추동하고 나아가 전교조의 전신이라 할 수 있는 교사협의회로 발전하여 갔습니다.

정영상, 김헌택, 차영민 선생이 초기부터 하셨습니다.


당시 안동대 임세권, 임재해 교수님은 영화모임을 ‘안동의 오아시스’라고 할 만큼 갈증을 푸는 장이 되기도 했습니다. 채플린 영화시리즈를 다 볼 수 있도록 왜관 분도수도원 임 세바스찬 신부님께서 감사하게도 한 달에 몇 번씩 필름과 장비 일체를 가져오셔 상영하시고 밤늦게 돌아가시곤 하셨습니다.

그런데도 차 기름값 한 번 못 드렸던 게 늘 마음에 빚진 것 같았습니다. 이런 과정에서 안동대 학생운동 1세대가 형성되어 농민회관에서 하는 교육프로그램에 참여하기도 하고 또 문화활동을 지원하기도 하면서 농민운동이나 노동운동에 투신하는 연대도 이뤄졌습니다.


특히 농민운동은 농민권익의 제도적 보장을 위해 전체 민족민주운동 안에서 주요역량으로서 역할해야 하지만, 아울러 지역을 변화시키는 임무도 있기 때문입니다. 점차 학생운동, 전교조, 정의평화위원회, 농민회 등 지역운동의 흐름이 비로소 형성되었습니다. 이른바 민주화 이후 경실련, 시민연대, 평화와 통일을 여는 사람들, 참교육학부모회, 학교급식운동 등의 지역운동이 태동할 토양을 만들어 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뿐 아니라 한국글쓰기연구회도 시작을 안동농민회관에서 이오덕 권정생 이현주 전우익선생님들이 하신 겁니다. 그 뒤에도 몇 차례 농민회관에서 그 모임을 했구요. 오늘날 우리가 즐겨 부르는 <농민의 노래(나 태어나)>가 그 때 거기서 만들어졌습니다. 이오덕 권정생 선생님이 개사하신 것입니다.


전국에서 최초로 <농촌아동순회문고>를 설치 운영할 수 있었던 것도 당시 이오덕 선생님께서 창작과비평사로부터 창비아동문고 수십 권씩을 몇 차례 기증받아주신 덕분이었습니다. 그 때 농민회관 개관 기념으로 전우익 선생님은 나무전각을 해주셔 사무실에 걸어뒀는데, 그 내용은 <희망은 길과 같은 것이다. 길이 처음부터 있던 것이 아니다. 다니는 사람이 많아지면서 길이 난 것처럼, 희망도 이와 같다>는 노신(魯迅)의 글귀였습니다.

정 신부님께서 저승에 가시어 먼저 가신 이오덕, 전우익, 권정생 선생님도 만나시고 든든한 벗이셨던 류강하 신부님도 만나실 걸 생각하니 옛날 추억이 더 그리워집니다.


명강의 - 불취외상 자심반조(不取外相 自心返照)


정 신부님은 또 명강사이셨습니다. 당시는 사제총회나 연수회 때 농촌농업농민문제를 자주 다루기도 했습니다. 정 신부님이 그 때 강의하시기도 하고 또 농촌지도자연수 때도 강의하신 <인간관계론>은 지금 생각해도 명강의셨습니다. 사람의 성숙도에 따라 의존적, 독립적, 상호협력적 단계로 성장한다는 것입니다.


의존적인 단계는 모든 걸 남 탓으로 핑계 대거나 변명을 하고 이기거나 일등하는 것에 집착이 심하고 의존성이 크답니다. 동에 가서 뺨 맞고 서에 와서 화를 푸는 격이지요. 심하면 노이로제나 정신분열증으로 발전할 수도 있는 단계입니다. 독립적인 단계는 내 문제를 내 탓으로 인정하고 책임지는 주인다

움이 생기고 당당하고 떳떳하게 정면대결을 할 수 있는 단계입니다. 상호협력적 단계는 독주를 잘 할 수 있어야 합주를 잘 할 수 있는 것처럼 독립적인 힘을 기초로 상호 이해하고 수용하며 조화롭게 협력을 잘 하는 단계입니다. 이 단계에서 계속 쇄신하고 노력하면 성인이 되거나 도(道)에 이른다고 합니다.


그러나 사람을 이렇게 성장하지 못하게 하는 안팎의 장애가 있으니 바로 소유욕·지배욕·복수심·죄책감 등과 같은 내 안의 굴레와, 독점과 억압의 구조악과 같은 세상의 죄, 이런 이중굴레를 쓰고 있기 때문이라고요. 구원과 해방을 위해서는 이러한 안팎의 이중굴레와 대결하면서 나눔(밥을 제대로 먹고)과 섬김(참된 말을 제대로 나누자)의 공동체를 스스로, 함께, 지속적으로 실천해야 한다고 하셨지요.


농촌과 도시에서 생활공동체를 건설하되, 겨자씨처럼 작게, 누룩처럼 확산되게 연대하자는 신부님의 생활공동체운동은 올해 유엔이 정한 세계협동조합의 해를 맞아 협동조합과 사회적경제 운동가들의 화두이자 길잡이가 되고 있습니다. 특 내 안의 장애를 살펴보는 방편의 하나로 자신의 기분이 나쁘거나 좋을 때 왜 그런지 감정의 흐름을 잘 들여다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해주신 말씀이 ‘불취외상 자심반조(不取外相 自心返照)’, 밖으로 드러난 모양을 취하지 말고 내 마음을 돌이켜 비춰보라는 팔만대장경의 경구입니다. 그 경구를 당시 안동문화회관 유한상 관장님이 써서 족자로 만들어 정 신부님께 드리기도 했는데, 늘 잘 보이는 곳에 걸어두시곤 하셨습니다. 저도 두고두고 마음에 새기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정재돈 / 한국협동조합연구소 이사장, 전 가톨릭농민회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