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박하고 평화로운 멋을 지닌 외암민속마을
어린 시절을 시골 한옥에서 보낸 나에게 오래된 한옥마을은 역사적 장소이기보다는 고향의 풍경을 떠올리게 하는 여행지다. 그래서일까. 아산으로 향하는 발길이 생에 첫 나들이에 나선 아이처럼 설레었다.
아산 시내를 지나 외곽도로를 조금 달리자 외암마을(중요민속문화재 제236호)을 알리는 이정표가 눈에 들어온다. 그 이정표가 ‘이곳부터는 변하는 세상과 변하지 않는 세상의 경계입니다’라고 말하는 듯하다.
외암민속마을은 아산시내에서 남쪽으로 약 8㎞ 떨어진 설화산 동남쪽 기슭에 위치하고 있다. 이 마을에 관한 정확한 기록은 없지만 400여 년 전 예안 이씨 일가가 정착하면서 집성촌을 이루었다고 한다.
마을로 들어서는 길은 마을 입구를 적시는 큰 개울 위에 놓인 반석정이라는 돌다리에서 시작된다. 다리를 건너기 전 마을을 향해 고개를 드니 실제 주민이 거주하고 있는 전통 가옥의 지붕들이 듬성듬성 보이고, 그 뒤편으로 여린 초록빛이 피어오른 설화산이 병풍처럼 펼쳐진다.
반석정을 건너면 오래된 물레방아가 포말을 튕기며 쉼 없이 돌아가고, 그 앞으로 맹렬한 봄볕을 피해 나무그늘에 서있는 한 쌍의 장승이 먼 길을 달려온 여행자에게 반가운 눈인사를 전한다. 장승을 왼편으로 자리한 민속관의 가옥 내부로 들어서니 사람의 길과 자연의 길이 묘하게 얽힌 풍경이 펼쳐진다. 이곳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건물을 지탱하는 네모진 나무 기둥이다. 이 기둥들은 돌의 기초 위에 머리를 맞대고 서 있는데 이 돌은 강에서 난 돌을 쓰지 않고 산에서 나는 화강석 등을 기초로 사용한다고 한다. 강의 돌은 수분이 묻어 있어 나무 기둥을 썩게하기 때문이란다. 새삼 선조들의 지혜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돌담장에 내려앉은 봄빛 느슨하고 정겨운 마을 돌담길
민속관을 나와 실제 사람들이 거주하는 마을길로 들어서 만나는 풍경은 고요하면서도 전체적으로 낮고, 작고, 소박하다. 무엇보다 좁고 굽은 길을 단조롭게 흐르는 지붕의 풍경이 순하다.
이 마을에서는 시각을 자극하는 것이 어떤 것도 없다. 특별히 예쁠 것도, 도드라질 것도 없는 느슨하고 정겨운 품의 마을이다. 대신 이곳에서는 코와 귀가 즐겁다. 집집마다 간장과 청국장을 띄우는 곳이라 돌담길을 걷다보면 매캐한 듯 구수한 냄새가 코끝을 간질인다. 산자락에서 불어오는 생기 넘치는 바람소리는 귀를 시원하게 한다.
외암마을에서 무엇보다도 인상적인 것은 나지막한 돌담장의 곡선이다. 직선의 도시에 익숙한 여행자에게 외암마을의 돌담은 중후하면서도 자연스러운 곡선의 미를 보여준다. 적당히 휘어지면서도 때론 곧은 그 길에는 친근함과 엄격함이 적당히 버무려져 있다. 또한 이 마을의 담은 경계를 이루기 위해 만들어졌지만 서양의 담장처럼 높지도 않으면서도, 그 쌓인 모양 역시 여유가 있고 자연스럽다.
총 5.3㎞에 이르는 이 마을을 돌담장을 따라 걷다보면 수백 년의 세월 속에서도 웅장함을 잃지 않은 고택들과 볏짚을 지붕으로 이은 초가들을 만나게 된다. 마을에는 참판댁(중요민속문화재 제195호)을 비롯해 건재고택(중요민속문화재 제233호)·송화댁·외암종가댁·참봉댁 등의 반가와 그 주변의 초가집들이 비교적 원형 그대로 남아 있다.
은일자의 삶이 오롯이 담겨진 곳, 맹씨 행단(孟氏 杏壇)
설화산을 중심으로 외암마을 반대편으로는 맹씨 행단(사적 제109호)이 자리한다. 행단(杏壇)이란 오직 학문에 정진한 학자의 집에 붙는 진정한 경칭으로, 이곳은 고려 말 최영 장군의 손녀사위였고 조선 개창 이후에도 조정 안팎의 고평을 받았던 고불 맹사성(古佛 孟思誠, 1360~1438)이 살았던 집이다.
맹씨 행단으로 들어서는 길. 유려한 곡선을 그리는 오래된 느티나무 가지가 행자를 먼저 반긴다. 대문을 들어서니 타고난 풍수의 지리적 따짐을 떠나 600년 내력을 지닌 고택의 기품이 행자의 발걸음을 숙연하게 한다.
포근한 땅의 정기가 온전히 스며든 고택의 풍채는 그 명성과 역사에 비해 소박하다. 높지도 화려하지도 않은 건물은 그저 햇살과 바람을 맞이하기에 더 없이 좋은 구조를 지니고 있다. 공(工)자형의 내부 또한 소박하다. 다만 방의 크기가 저마다 다르고 마당과 마루와 뒤란 문도 저마다 다를 뿐이다. 헌데 그 크고 작음이 마치 섬세한 조형 감각을 가진 이가 부러 공들여 빚은 듯한 기하학적인 미를 뽐낸다.
은일자(隱逸者)의 기풍이 흐르는 고택의 멋에 취한 오후. 툇마루에 앉아 봄 햇살에 취하고 있노라니 ‘이것이 자연에 순응하는 삶이구나’라는 깨달음이 자연스레 마음을 울린다.
주민 66명이 꾸린 유럽풍 마을 공동체, 블루 크리스탈 빌리지
서울로 향하는 길에 지중해 마을로 유명한 탕정면의 블루 크리스탈 빌리지를 찾았다. 지중해 마을의 풍경을 옮겨 놓은 듯한 이곳은 사실 원주민들이 고향 공동체를 유지하고 재정착하기 위해 만들어진 ‘프로젝트 빌리지’이다. 포도 생산지로 유명했던 이곳에 몇 해 전부터 대기업 계열사들이 하나 둘 모여들면서 대부분의 주민들이 이주를 하게 됐는데, 그때 고향에 남아 마을공동체를 유지하기로 뜻을 모은 66명의 주민들이 조합을 결성하고 블루 크리스탈 빌리지를 꾸리게 됐다.
이 마을은 비록 전통과는 무관한 유럽의 어느 한 마을 풍경을 옮겨놓은 모습이지만, 국내 어디에서도 보기 드문 이국적인 풍경을 선사한다. 2만여㎡의 대지에 파르테논(Parthenon), 산토리니(Santorini), 프로방스(Provance)의 형태로 세워진 66동의 건물은 유럽풍으로 순백색과 파란색이 조화를 이루며, 내가 살아온 삶의 터전을 지키는 새로운 지혜를 전한다.
블루 크리스탈 빌리지의 특색은 아름다운 풍광에 그치지 않는다. 조성 초기부터 주민들은 이곳을 ‘문화·예술이 넘쳐나는 공간’으로 꾸리길 희망했고 그 결과 블루 크리스탈 빌리지에는 현재 지역문화예술협동조합을 비롯해 도자기 공방과 미술학원 등이 들어섰다.
자연의 섭리를 알고 물러섬의 도리를 아는 이들의 삶이 오롯이 담긴, 그리고 자신과 살아온 땅을 지키는 지혜를 전하는 마을을 만나고 돌아오는 길. 세상 만물이 부풀어 오른 봄날의 설렘으로 시작한 발걸음이 나고 자란 땅에 대한 애정으로 끝을 맺는다.
글 이현주 사진 남윤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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