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여행길 10 - 옛집 옛마을 속 터무니를 찾아

이산저산구름 2014. 6. 10. 14:12

 

 

 

몇 백년 풍상을 지나오면서도 저토록 의연하게 너른 하늘 이고 있는 저 커다란 나무들같이 의젓한 사람들이 살고 있는 마을. 한 시절 우리를 잠시 빛나게 하던 허명(虛名)일랑 모두 벗고 돌아가도 등 두드려 줄 것 같은 고향을 찾아 간다.

 


- 함평 모평마을
500년 전 조성된 풍수비보림

 

 

품 넓고 속 깊고 차곡차곡 쌓은 연륜이 당당한 거목들의 숲이 있는 마을. 낮은 돌담들이 나란히 어깨를 맞대고 있는 모평마을(전남 함평군 해보면 상곡리).
고려시대부터 치소(治所)가 있던 모평(牟平)현이 함풍(咸豊)현과 합쳐치면서 함평(咸平)이 된 것은 1409년(태종 9년)의 일이다. 이렇듯 함평의 뿌리가 닿아 있는 모평마을은 1460년께 윤길이 제주도로 귀양갔다 돌아오다 이곳의 산수에 반해 정착하면서 파평윤씨 집성촌이 됐다.
바깥세상의 속도에서 벗어나 한없이 고즈넉한 이 마을엔 고택만도 일곱 채. 새로 지은 한옥들까지 더하면 스무 채 남짓 고풍스런 전통한옥이 들어서있다.

집과 집을 잇는 고샅길 끝 무렵엔 숲이 있다. 해보천을 따라 늘어선 마을숲은 500여 년 전에 조성된 풍수비보림이다. ‘마을나무’로 대접받는 500살 느티나무는 둘레만도 5m. 조무래기 열 명쯤은 그 나무할아버지 뒤로 꼬랑지도 안 보이게 숨을 만한 둘레다.
오래 전부터 거기 살아오신 느티나무, 팽나무, 왕버들나무가 40여 그루 모여 선 울울창창한 숲. “그네 매고 그네 뛰는 것이 제일 재미졌제. 나무 아래 큰 독(돌)이 있어. 마을에 처음 들어오는 남자들은 그 들독 들어야 지나가고 못 들문 우세 사고….”
울울창창한 숲이 거느린 푸르디푸른 그늘 아래 이 마을에 살았던 이들의 작은 역사가 그렇게 흘러갔다.

 


- 귀령재와 안샘
동네사람들 모임터

 

솟을대문 앞에 둔 귀령재(歸潁齋)는 대사헌을 지낸 윤자화(1825~1884)가 부모 3년상을 치르기 위해 지었다는 집. 다락방처럼 들어앉힌 공루 안엔 “금의환향하실 적에 쓴 일산(日傘)”이 이 집의 내력을 전한다.
“들보가 요렇게 큰 것 봤는가. 들보가 말래(마루)까지 나간 것은 아주 드문 것이여. 말래도 뺑뺑 둘러 있고.”
귀령재는 마을회관이 없던 시절엔 동네사람들 쉼터였다. 안채 또한 문화재적 가치가 높은 고택. 뜨락에 영산홍은 백 년이넘었다. 그 꽃 피는 계절엔 담장 밖 고샅길까지도 꽃등 단 듯 환하겠다.
이 마을 박계순 할머니가 ‘우수 시암(샘)’이라고 추천한 안샘. 귀령재 옆 고샅 안쪽으로 성벽 같은 담장을 두르고 있다. 지나가던 산개구리 또록또록 눈뜨고 치어다보는 우물은 맑고 깨끗하다.
사또 살던 관아터가 바로 옆이다. 이 우물가에서 마을 사람들은 속깊은 얘기를 나누었다. 이 우물가에서 나누는 쓰고 달고 서러운 이야기들은 그대로 담장을 넘어 관아로 전해졌다.
그렇게 마을공동체의 중심에서 천년 세월 마르지 않고 살아 있는 우물. 찰랑찰랑 옛이야기 고여있는 듯 싶다. 그 물 길어다 밥 지어 ‘아배 앞에는 왕사발, 아들 앞에는 새끼사발’ 놓던 어미들의 발자취가 서늘하게 떠오르는 자리다.

 


- 충노(忠奴)도생비 충비(忠婢)사월비
옛 사람의 정신을 새기다

 

마을을 보듬고 앉은 임천산 비탈, 돌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고요하게 들어앉은 영양재(潁陽齋)가 있다. 정면 3칸, 측면 2칸에 팔작지붕을 얹은 단아한 자태는 이 정자를 세운 윤상용의 검박한 속내를 짐작케 한다. 빛바랜 편액 속 말씀들은 오늘에도 낡지 않았으니 ‘非禮勿視 非禮勿聽 非禮勿言 非禮勿動(비례물시 비례물청 비례물언 비례물동)’ 하라 한다. 예가 아닌 것을 보기도, 듣기도, 말하기도, 행하기도 하고 사는 이의 삶에 부끄러움을 일깨운다.
오죽(烏竹) 둘러싼 영양재 옆으로는 임천산 산책로가 있다. 왕대나무 검푸른 죽림에 야생녹차나무가 군락을 이루고 있으며 이곳에서 대이슬 먹고 자란 ‘죽로차’는 향기가 일품이라 한다.
영양재 아래 신천강씨 열녀각은 정유재란 때 남편 윤해가 왜병에게 살해당하려는 것을 막으려다 함께 처참한 죽임을 당한 신천강씨의 정신을 기리는 비각이다. 그 옆으로 나란한 ‘충노(忠奴)도생비 충비(忠婢)사월비’는 신천강씨 부부의 두 아들 성립·정립을 충심으로 보살펴 가고 없는 이와의 의리를 지켜낸 귀한 뜻에 바치는 비(碑)다.
비각 거리 지나면 파평윤씨 5대손인 고려 윤관(?~1111) 장군의 위패를 모신 수벽사(함평군문화재 제3호)가 있다. 해마다 음력 3월6일에 제를 올리는데, 음식을 나르는 제관은 제물을 청결히나르기 위해 얼굴을 수건으로 가릴 정도로 옛 풍습을 충실히 따르고 있다 한다. 옆에 나란히 자리한 임천정사는 수벽사의 제실이다.
마을 끝자락 해보천 옆으로 초가지붕 쉼터를 만들고 그 옆에 복원한 물방앗간은 지금도 곡식 찧는 체험을 할 수 있는 곳이다.
“이 물방앗간 있기 전에는 소가 연자방아를 찧었어. 뱅뱅 돌문 어지럽다고 눈을 개려(가려) 줬제.” 그렇듯 말 못하는 짐승의 사정을 헤아릴 줄 알았던 사람들의 맘씨가 꽃처럼 피어나는 곳, 모평마을이다.

 


- 명하둥지생활사박물관
고샅길 따라 ‘집 전시관’

 

 

밝을 명(明), 연꽃 하(荷). 이름만큼 어여쁜 명하마을(전남 나주시 문평면 북동리).
“오고 가는 이여! 마을 곳곳 소중한 보물을 만나시라”고, 환영의 말씀을 마을 들머리 표석에서 읽는다. ‘명하둥지생활사박물관’. 고샅길 따라 네 개의 ‘집 전시관’과 한 개의 ‘비닐하우스 전시관’이 자리해 있다.
지나온 풍파를 고스란히 제 몸에 아로새긴 낮고 낡고 작고 오래된 집들을 박물관 삼고, 삶의 내력과 추억을 편편이 간직한 손때 묻은 살림들을 전시품 삼아 너무 빨리 변해가는 세상에서 변하지 않고 남아 있어 준 고마운 것들에 온기를 불어넣었다.

 

 

정자나무 옆에 있는 ‘다래기댁’네 집. 1996년 배점동·정춘님 부부가 윗마을 명동에서 이사와 2남3녀를 키운 집이라고 설명판이 있다. 함평 다래기마을에서 시집 와서 ‘다래기댁’이다.
마당에 빗자루 자국 난 모양새를 뒤돌아볼 제 흡족해 하던 다래기댁, 스쳐가는 자리 정하게 하는 일에 자신을 다 써서 닳아뜨려야 한다는 듯 자신의 몸을 공양하는 빗자루처럼 살다 간 다래기댁. 노상 벗은 발에 흙 묻은 고무신 꿰고 들로 밭으로, 낮으로 밤으로, 일자리에서 일자리로만 발자국 놓던 다래기댁의 유물은 방안살림이 아니다. 헛간 벽엔 눈 벌어지면 밭고랑 타고 앉아 풀 매던 다래기댁 손에서 놓일 날 없던 호미들, 마른 땅파들어가던 삽과 묵은 논 갚아엎던 쟁기들 나란하다. 귀퉁이가 헐어서 베를 대고 얼기설기 꿰맨 키, 빗자루 같은 것들이 조르라니 걸려 있다.
‘문암댁’이라고 전시관 문패를 건 집. 1954년 동갑내기 윤병두 어르신과 혼례식을 올리고 마흔 여섯 살부터 혼자 되어 2남3녀를 키운 조해님 할머니의 이력을 만난다.
“전에 우리집 어른 살아계실 적에 우리가 배냇소를 키웠어. 남의 소 째깐헌(작은) 놈 시앙치(송아지)를 갖다 키워. 그래갖고 큰 소 맹글어서 새끼 나문 그 놈 새끼는 차지하고 애미는 도로 주인한테 주제.”
송아지가 생기면 식구가 새로 생긴 것처럼 기쁘게 맞아들였다. 짚덤불 앞에 작두며 거름 푸던 똥지게와 똥바가지들. 얼마 전까지 혹은 지금도 쓰는 것이 생생하게 전시돼 있으니, 그야말로‘박물관은 살아 있다’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