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화의 수려한 산수와 선비 정신
동아시아에서는 전통적으로 자연을 대신하는 말로 산수(山水)라는 용어를 사용해 왔다. 그러나 산수는 스스로 드러날 수 없고 사람으로 인해 이름을 얻고 그 아름다운 이름이 드러나는 법이다. 그 영검이 있는 산수의 대지에서 걸출한 인물이 태어나고 살아간다. 경북 봉화는 곳곳에 산들이 우뚝 솟아 있고 군소 산봉우리들이 첩첩으로 에워싸고 있다. 이러한 자연환경은 시대와의 불화를 빚은 선비들이 자발적으로 은거해 자신들의 뜻을 추구하기에 최적의 조건을 갖추고 있다. 은거의 이유와 목적은 역사적 상황에 따라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지만 예나 지금이나 ‘고결’과 ‘지조’의 상징으로 인식되어진다.
특히 경치 좋은 곳에 지어진 봉화 지역의 정자(亭子)들은 자연과 문화가 일체화된 조선시대 유학자들의 산수문화의 생생한 현장으로 그들의 정신세계가 깃들어 있는 초월적 공간이다. 건축물 곳곳에서 묻어나는 자연과 인간이 상생하는 이 지역 산수의 공익적 가치는 바야흐로 문화 융성의 시대를 맞아 무가지보(無價之寶)의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시름을 달래던 와선정(臥仙亭)
명나라가 망한 후 나타난 조선 선비의 대명 의식은 의리와 절의를 핵심으로 하는 정신세계를 형성하고 있다. 와선정은 나라의 치욕을 참지 못해 태백산에 숨어 세상을 등진 다섯 사람, 이른바 태백오현(太白五賢)을 만나는 역사적 공간이다. 인조가 1637년 청나라에게 무릎을 꿇고 항복하는 치욕을 당하자, 조선의 뜻있는 선비들은 도연명과 백이숙제의 정신으로 절의를 지키고자 명리를 버리고 은둔했다. 그 중 태백산 줄기 깊은 산골짜기 봉화 문수산을 중심으로 모여 들어 자연을 벗삼아 소요하며 나라를 걱정했던 다섯 명을 태백오현이라 일컫는데, 청양군 심의겸의 손자인 심장세(1594~1660), 만전당 홍가신의 손자 홍우정(1595~1656), 송강 정철의 손자인 정양(1600~1668), 참판 강집의 현손 강흡(1603~1681)과 영의정 홍섬의 증손 홍석(1604~1680)이다. 이들은 각각 봉화 땅에 터를 잡아 정착했지만 서로 빈번하게 교류했는데 그 주된 만남의 장소가 바로 산수가 수려한 와선대였다. 이곳에서 시론을 논하고 풍류를 즐기면서 신선처럼 탈속적 삶을 추구하며 나라 걱정의 시름을 달랬다. 이들 태백오현의 후손들은 계를 결성하여 오늘날까지 조상의 올곧은 선비 정신을 이어가고 있다.
이 가운데 홍우정은 병자호란 이후 봉화 뒤뜨물마을로 은둔하여 다시는 벼슬길에 나가지 않았다. 머리에는 벙거지를 쓰고 해진 베잠방이를 입고 망태기를 둘러메고 하류배들과 섞여 살았다. 때로는 북쪽 하늘을 우러러 눈물을 흘렸으나 사람들은 그 뜻을 알지 못했다. 그의 삶은 뜻이 너무 크고 행동이 자유로워 일반 사람들로서는 짐작하기 어려웠던 외로운 삶이었다. 마을에는 그를 기리는 ‘숭정처사유허비’가 세워져 있는데 ‘대명 천지에 집 없는 나그네 되어, 태백산 속에 승려처럼 살아가네’라는 그의 시구가 새겨져 있다.
소나무와 달을 벗으로 삼은 송월재(松月齋)
주민들에게 시드물이라고 불리는 풍정리 마을에는 군자의 깨끗한 지조를 상징하는 송월재라는 아담한 서재가 있다. 소나무가 늘 푸르고 달이 일정하게 밝다는 뜻을 취해서 이름을 붙인 곳이다. 이곳은 확고한 신념으로 ‘세상이 나를 알아주지 않는다 하더라도 결코 남에게 알아주기를 구하지 않겠다’는 선비 이시선(1625~1715)이 학문을 닦던 사색의 공간이었다. 그는 태종의 아들인 온령군의 후손으로 당대의 큰 선비였지만, 일생 중 단 한 번도 벼슬길에 나간 적이 없었다. 그는 가슴 속에 품은 큰 뜻을 비록 세상에 펼치지는 못했지만, 향리의 숲속에 세 칸짜리 작은 서재를 짓고 독서와 학문 연구에 전념했다. 그는 모범적 지식인으로서 이때의 자신의 생활을 이렇게 시로 읊었다.
고금의 서적과 다양한 학문에 두루 해박한 지식을 갖추었던 이시선은 그의 말대로 활발한 저술 활동을 벌여 유가 경전에 대한 많은 저작을 남겼다. 또한 평생 명리를 멀리한 그는 성품 또한 고고하여 늘 제자들에게 ‘선비의 행실은 마음에 부끄럽지 않아야 한다’고 말하며, 선비의 도덕적 양심을 강조했다. 이것은 호연한 기질을 갖춘 그의 평생의 신조이자 학문정신이기도 했다. 그는 처사적 삶의 전형으로 오로지 학문탐구에 전념하면서 후학을 양성했던 봉화가 낳은 대표적인 유현(遺賢)의 한 사람이다.
북쪽으로 창을 낸 공북정(拱北亭)
도촌의 사제 마을은 우계 이씨가 세거하는 집성촌인데 종가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공북정이라는 정자가 있다. 이 지역은 수양대군이 단종을 폐위시키자 벼슬을 버리고 궁벽한 시골 봉화로 낙향한 이수형(1435~1528)이 은거하던 곳이다. 그는 생육신 중 한 명으로 꼽히는 어계 조려 등과 원주 치악산에 있는 바위에 충절을 맹세하며 나란히 이름을 새겨 놓고 당시 순흥 땅인 이곳으로 내려왔다.
그는 거실을 지으면서 북쪽에 창을 두었는데 그 이유는 다름 아닌 북쪽 방향에 단종이 유배된 영월의 청령포가 있기 때문이었다. 그는 영월에 있는 단종을 사모하여 북쪽으로 문을 내고 북극성을 바라보듯 일편단심의 마음으로 일생을 보냈다. 나중에 이광정은 단종에 대한 이수형의 충절을 기려 ‘우계 이씨 공북헌’이라는 현판을 달았고, 권두경은 그 방에 ‘천인실(千仞室)’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사제 마을의 우계 이씨는 조상 대대로 충절을 가장 중요한 덕목이자 가치로 받아들였다.
이수형의 충절은 한 번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는 이 마을의 괴화나무에 의해 상징되기도 한다. 공북헌의 서남쪽 지점에 서 있는 이 괴화나무는 이수형이 손수 심은 나무라 전해지는데, 이수형이 죽은 후 저절로 말라 죽었다가 단종이 신원되자 다시 살아났다. 배운 것을 그대로 실천하는 지식인의 책무에 누구보다 엄격했던 선비 이수형. 단종에 대한 무한한 충정과 신의가 무정물인 나무까지도 감동케 했던 것이리라.
애민의 정신이 깃든 노봉정사(蘆峯精舍)
물야면에 자리 잡은 오록마을은 풍산 김씨 문중이 대대로 살고 있는 전통 양반 마을이다. 뒤에는 우뚝하게 갈봉산이 솟아 있고 앞에는 두 자락의 산이 마을을 둘러싼 어림으로 짐작해도 아늑한 형국의 명당 지역이다. 마을 입구에는 울창한 솔숲이 있는데 전하기로는 이곳에 터전을 잡은 노봉 김정(1670~1737)이 심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마을의 초입에 자리 잡은 노봉정사 또한 김정이 후학을 양성하기 위해 지은 건물이다. 8형제가 모두 사마시에 합격하고 그중에 5형제가 문과에 급제해서 ‘팔련오계(八蓮五桂)’라는 미칭으로 유명한 풍산 김씨는 영남지역에서 뿐만 아니라 전국적으로도 손꼽히는 명문가이다.
오록의 풍산 김씨 문중은 비록 자손이 크게 번성하지는 않았으나 학문과 덕업으로 문명을 떨친 문인 학자가 상당수 배출되었다. 오록마을의 입향조가 되는 김정은 한성부 우윤을 지낸 김응조의 증손자로 ‘이인좌의 난’ 때 의병을 일으켜 공신록에 오르고, 지방관이 되어서는 교육을 진흥하고 풍속을 순화하는 등 치적을 남겼다.
특히 제주목사로 나가서는 녹봉을 털어 항구를 증축해 도민의 근심을 덜어 주는 등 선정을 베풀었다. 방파제를 쌓을 때는 백성들과 함께 직접 등짐으로 돌을 지어 날랐다고 하는데, 그것이 탈이 되어 부임지에서 세상을 떴다. 부고를 전해들은 영조는 특별히 지방관에게 장사 행렬을 호송케 하여 고향에서 장사 지낼 수 있도록 배려를 아끼지 않았다. 나라와 백성을 위해 애민정신을 일관되게 실천한 김정은 어진 목민관의 표상으로서 오늘날까지 공직자의 귀감이 되는 인물이다.
산수를 다시 보기
조선시대의 유학자들은 자의든 타의든 현실정치에 직접 참여하기보다는 향촌에 은거하기를 원했다. 그들의 은거지는 대부분 산수 경치가 빼어난 명소이자 현인군자의 자취가 배어있기에 장소적 의미가 특별한 곳이다. 평생 절조를 지켜 은거한 산수자연은 인간의 문화적 심미 평가의 대상이 된다.
따라서 산수 경관을 올바르게 감상하기 위해서는 그 장소에 있었던 인물의 정신세계와 교감할 수 있어야 한다.
산수와의 교감은 정신을 화창하게 하고 자연에 대한 신선한 체험을 얻게 한다. 봉화는 자연과 문화가 일체화된 조선시대 유학자들의 산수문화의 생생한 현장으로 그들의 정신세계가 깃들어 있는 초월적 공간이다. 자연과 인간이 상생하는 이 지역 산수의 공익적 가치는 문화 융성의 시대를 맞아 무가지보의 의미를 지닌다.
글 임노직(한국국학진흥원 수석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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