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작원관지
임진왜란 당시 작원관 전투의 현장
작원관은 관리가 머무는 원(院) 구실, 외적을 막는 관(關) 구실, 교역하는 나루로서 진(津) 구실을 두루 했던 곳이다. 이제 인적조차 드문 작원관지(鵲院關址, 경상남도문화재자료 제73호)는 한때 한양에서 동래까지 이어지는 동래로의 요충지로 문전성시였다. 작원잔도(鵲院棧道)는 문하나로도 길을 막을 수 있을 만치 지세가 험해 한남문을 두고 남쪽의 적을 막았는데 지리(地利)를 살려 임진왜란 때 왜군의 진격을 막으려는 격전이 벌어진 장소다.
임진왜란 당시 작원관전투는 유명하다. 밀양부사 박진(1560~1597)을 비롯해 300명의 군졸과 지역민 등 700명이 방어진을 치고 항쟁했으나 중과부적으로 400명이 숨지거나 다치고 밀양으로 후퇴했던 아픈 역사의 현장으로 작원관임란순절용사 위령비가 세워져 있다.
작원관과 한남문은 임진왜란이 끝난 뒤에 세워졌다. 한남문은 일제강점기 원래 자리에서 조금 옮겨졌다가 1936년 7월 대홍수에 쓸려나갔다. 지금 여기 작원관은 원래보다 1.2km 정도 북서쪽으로 옮겨왔는데 1995년 밀양시가 만들었다. 작원관 옆 비각에는 가운데에 대홍수로 쓸려간 자리에 세웠던 작원관문기지비(鵲院關門基址碑)가 있고 왼쪽과 오른쪽에 작원진석교비(鵲院津石橋碑)·작원대교비(鵲院大橋碑)가 서 있다. 작원진석교는 2012년 발굴이 됐고 작원대교는 아직 찾아내지 못했다.한편 일제가 기찻길을 닦으면서 덮어쓰는 바람에 끊어진 줄로 알려졌던 작원잔도가 최근 새로 발견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양산 원동의 가야진사 부근 황산잔도와 함께 이제 옛 모습을 찾을 수 있는 근거는 마련된 셈이다. 잔도(棧道)는 강따위를 따라 이어지는 다니기 어려운 험한 곳에 만들어내는 길을 이른다. 때로는 비리(벼랑을 뜻하는 경상도말)길이라고도 하는데 작원 비리길이 얼마나 험했는지는 <동국여지승람> 기록을 보면 알 수 있다.
<작원의 남쪽으로 5~6리를 가면, 낭떠러지를 따라 잔도가 있어 매우 위험한데, 그 한 굽이는 돌을 깨고 길을 만들었으므로 내려다보면 천 길 연못인데 물빛이 푸르고, 사람들이 모두 마음을 졸이고 두려운 걸음으로 지나간다. 예전에 한 수령이 떨어져 물에 빠진 까닭에 지금까지 원추암(員墜岩)이라 한다.> 목숨을 걸고 오갔던 비리길에는 한 시절을 힘들게 살아냈을 민초들의 고단함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원동습지 가운데쯤을 가로지르는 콘크리트길을 따라 낙동강쪽으로 들어가면 가야진사(伽倻津祠, 경상남도민속자료 제7호)가 있다. 뒤쪽 천태산과 강 건너 용산 사이 중간지점으로 풍수지리상으로 땅의 기운이 모이는 곳이라 한다. 여기 나루는 이름이 용당인데 가야시대부터 김해와 양산을 이어주는 통로였다. 기록을 따르면 신라와 가야가 세력다툼을 하던 시절 이 나루를 거쳐 군사들이 오갔다. 낙동강 너비가 바다처럼 넓어져 버린 이곳이 옛날에는 주요한 수운(水運) 거점이었다. 한강·금강·곡천강(포항)과 더불어 철따라 국가 차원에서 제사를 지낸 네 곳(四瀆·사독)이었다. 범람을 막아주고 항해를 순조롭게 해주기 바라며 희생 제물을 바쳤다.
원동습지는 경부선 철도 제방과 1022번 지방도로 둘러싸여 있는데 넓이는 20만평 가량이다. 옛날에는 습지에서 논농사도 많이 했다. 홍수가 심했지만 3년에 한 번만 거둬도 소출이 많고 일손이 많이 가지 않아서였다. 요즘은 겨울 한철 딸기나 채소 농사가 많다. 민물과 짠물의 범람이 잦은데도 생태계가 풍성하다.
- 임경대
최치원이 정자 짓고 둘레 풍경 누린 곳
낙동강 물길을 따라가는 어귀에 임경대(臨鏡臺)가 있다. 임경대는 최치원이 정자를 짓고 둘레 풍경의 아름다움을 누린 장소다. 밀양 삼랑진에서 1022번 지방도를 따라가다 보면 물금과 원동의 경계 지점 오른편에 육각정자가 있다. 양산시에서 만든 것이다. 임경대는 여기서 200m 정도 떨어진 황산강(낙동강의 옛 이름) 동쪽벼랑에 있다. 고운대, 최공대(崔公臺)라고도 하는데 바위벽에 최치원의 시가 새겨져 있었으나 오래되어 살펴보기 어렵다. 여기서 물줄기를 내려다보면 풍경이 고고하다.
양산 용화사 석조여래좌상(보물 제491호)은 임경대 가까이에 있다. 불상은 대체로 온전한 편이며 광배에 비천상이 새겨져있다. 근방 불상 중 가장 오래된 양식으로 호분(胡粉)을 발랐다가 지워낸 자죽이 남아 있다.
용화사는 부산에서 활동한 소설가 요산(樂山) 김정한(1908~1996)의 소설 <수라도(修羅道)>의 배경지로 더 알려져 있다. <수라도>는 일제강점기부터 광복까지 용화사 일대 민중들이 겪은 고초를 실감나게 표현한 작품이다.
부산에 수돗물을 대어주던 물금취수장 물문화전시관도 둘러볼 수 있다. 물문화전시관 바로 아래 굴다리를 지나면 용화사인 것이다. 1969년부터 2001년까지 운영하던 취수장을 바꿔서 수돗물이 만들어지는 과정과 물의 순환을 알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들었다.
- 철새도래지
새들의 낙원에서 돌아보는 공존·공생의 의미
낙동강 끝자락 을숙도를 비롯한 낙동강 철새도래지(천연기념물 제179호)는 새들의 낙원이다.
새들은 모래언덕을 중심으로 둘레 갯벌을 따라 먹이를 찾아다닌다. 낙동강 철새 도래지는 부산과 김해평야 사이 넓은 하구지역으로 수많은 삼각주와 모래언덕이 있다. 아직 개간하지 않은 넓은 갈대밭과 물 속 생물들이 풍부해 물새들에게는 안성맞춤이다.
봄가을에는 도요새와 물떼새들이 거쳐가고 겨울에도 거의 얼지 않아 11월부터 3월까지 겨울철새가 많이 모여든다.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재두루미·저어새 등이 보이며, 제비물떼새, 넙적부리도요 같은 보기 드문 새들도 있다.
일본과 러시아를 잇는 지역으로 철새들의 국제적인 이동에 매우 중요한 구실을 한다. 그러나 철새들의 종류나 규모가 예전만 못하다. 환경이 오염됐음은 물론이고 하구둑 공사로 짠물과 민물이 뒤섞이는 기 수역이 사라졌다. 하구둑 아래는 바닷물이 넘실거리지만 하구둑에 막혀 위로 올라오지 못한다. 그래서 하구둑 위는 민물 호수가 되고 말았다.
철새들이 자꾸 줄어들고 있는 낙동강 끄트머리에서 자연과 인간의 공존 필요성을 더욱 절실하게 느끼게 된다. 여기에 낙동강하구에코센터도 있다.
- 구포시장
물 좋은 땅이 낳은 '구포국수'의 명성
낙동강 따라 가는 마지막 여정은 구포시장이다. 이를 두고 뜻밖이라고 여기는 이가 많을 듯하다. 하지만 물과 연관해 생각해보면 전혀 뜻밖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지금은 아니지만 구포는 옛적에 국수로 널리 이름을 알렸다. 국수공장은 물이 풍부하고 좋은 곳에 들어선다. 옛날 구포는 물이 아주 좋기로 유명했다.
400년 전부터 감동나루와 감동창이 있던 강가에 장이 섰기 때문에 이름도 감동장이었다. 감동(甘東)은 구포의 옛 이름이다. 부산의 감동나루는 합천 밤마리나루, 상주 낙동나루와 더불어 낙동강 3대 나루로 꼽혔다. 1920년대까지 있었던 구포나루로 양산·김해·밀양에서 사람들이 많이 오갔으나 구포역이 생기면서 시장도 줄었다. 1919년에는 여기 구포장터에서 3·1독립만세 시위가 일어났다. 청년들의 주도 아래 장날에 모인 사람 1000명 남짓이 함께 외친 만세소리가 천지를 울렸다고 한다.
구포시장에 왔으면 구포국수 한 그릇은 먹어야 제대로 장터 구경을 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구포국수는 구포에서 만들어질까
구포는 부산광역시 북구에 있는 동네다. 사람들은 '구포국수'라 하면 부산 구포에서 만드는 줄 안다. 2008년에는 "부산 전통 식품인 구포국수가 옛 명성 되찾기에 나섰다"는 기사가 신문 방송에 나기도 했다.
기사는 이렇게 이어졌다. "구포국수는 동래파전과 함께 부산을 대표하는 전통식품으로 일제강점기 근대 국수류의 생산 메카였던 구포에서 생산·판매되던 국수를 통칭하는 것이다. 교차해 불어오는 바닷바람과 낙동강 강바람으로 자연건조해 쫄깃해진 면발로 전국적으로 유명해졌지만 상표 분쟁과 대기업 식품회사와 경쟁 등으로 현재는 (주)구포국수 한 곳만이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물론 지금도 부산 구포에 (주)구포국수가 있다. 하지만 거기에는 영업본부만 있고 국수를 만들어내는 공장은 경남 합천 가회면에 있다. 부산을 대표하는 전통식품인 구포국수가 구포에서 만들어지지 않고 있는 셈이다. 게다가 구포국수를 만들어내는 업체가 (주)구포국수만 있지도 않다.
구포식품이나 구포특면국수라는 상호로 구포국수를 생산하고 판매하는 업체가 여럿 있는데 다들 공장이 구포에 있지 않다. 경남으로 보자면 합천, 산청, 밀양 등에 있다. 세 곳의 공통점은 낙동강 지류의 상류 지역이라는 점. 상류라서 아무래도 물이 깨끗하겠고 그 깨끗한 물로 국수를 뽑아내고 면발을 만드는 것이다.
구포국수가 한창 널리 알려지던 일제강점기에서 1970년대까지는 구포의 낙동강 강물도 나름대로 깨끗했겠다. 그 뒤 잇따른 수질오염사고와 낙동강 유역 공장 설립 따위로 구포 강물이 더러워졌고 구포의 국수 공장 대부분은 문을 닫았다. 그러면서 찾아간 데가 상류 지역이다.
구포국수가 지금도 이렇게 이름을 떨치는 것을 보면 옛날 진짜 구포국수는 참으로 대단했겠다 싶다. 물론 가난하고 어려운 시절이라 값싸게 끼니를 때울 수 있는 수단으로 국수를 찾은 까닭도 있겠지만. 지금 구포시장에서 끓여 내다파는 국수에는 이런 속사정까지 담겨나오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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