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있는 우리 속담

재미있는 우리 속담 18 사람이 그리워 살 만한 겨울 더우면 물러서고 추우면 다가든다

이산저산구름 2013. 11. 27. 13:32

재미있는 우리 속담 더우면 물러서고 추우면 다가든다
 

찬 바람 부나 싶더니 어느새 눈발 날리는 겨울입니다. 올해도 이제 겨우 한 달 남짓 남았네요. ‘더우면 물러서고 추우면 다가드는’ 것이 사람 인심이라는데 겨울은 살을 에는 추위가 있어도 그 곁을 지키는 사람이 있어 살 만한 계절입니다. 아니, 어쩌면 바람이 찰수록 사람 살이의 온정을 더 뜨겁게 느낄 수 있는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추풍낙엽秋風落葉’이라던가요? 절정은 언제나 최후를 예감하는 순간에 오는 것인지 가장 아름답게 제 빛깔을 뽐내던 나무들도 어느새 마른 가지만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앙상하게 뼈대를 드러낸 나무들처럼 추운 겨울에는 마른 살림살이에 발을 동동 굴려야 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추울 때 다가드는 진정한 사람의 온기가 정말 필요한 때가 바로 지금이 아닌가 싶습니다.

 

겨울 들판을 바라보며 황량하다고 말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눈에 보이는 풍경은 어쩌면 쓸쓸하고 텅 빈 것 같은 느낌을 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겨울 들판은 잉태의 공간입니다. 봄날의 탄생을 준비하는 만삭의 배처럼 풍요를 간직한 공간이지요. 겨울 땅의 잉태 없이는 봄날의 탄생도 없습니다. 세계의 여러 시인들이 노래한 것처럼 죽음의 계절이야 오히려 가을이지요. 겨울은 대지의 어머니가 자신의 자궁 속에 봄날 만개할 무수한 생명의 씨앗을 품고 탄생을 준비하는 시간입니다.

 

그러니 ‘겨울 지나지 않고 봄이 오랴’는 옛말에도 깊은 뜻이 숨어 있습니다. 그저 추운 날이 지나야 따뜻한 날이 온다거나 시련의 시간을 견뎌야 좋은 날이 온다는 의미 이상의 뜻을 품고 있는 말이지요. 봄이 오기까지 그저 기다리거나 시간을 보내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탄생과 생명 맞이를 위한 보이지 않는 노력과 분투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한겨울의 추위는 그 노력과 분투의 눈물과 고통을 보여 주는 결과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열 달의 잉태와 장시간 산고를 마치고 탄생을 맞이하는 임산부의 땀과 눈물, 고통과 환희의 그것처럼 말입니다.

 

그래서인지 들머리 추위가 날머리 추위보다 더 매섭기만 합니다. ‘춥지 않은 소한小寒 없고 추운 대한大寒 없다’는 말도 그래서 생긴 것이 아닐는지요? 대한 무렵에는 오히려 날이 푸근해질 기미를 보이고 소한 무렵에 오히려 칼날처럼 매서운 추위가 몰아치니 말입니다. 더구나 아직 추위에 적응하지 못한 이 무렵 초겨울의 추위가 더욱 옷깃을 여미게 합니다.

 

두꺼운 이불을 꺼내 덮었는데도 밤새 품속을 파고드는 찬 기운은 어찌 할 수가 없습니다. ‘춥기가 사명당 갇힌 방이다’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이 속담은 임진왜란 때 승병을 이끌고 왜군을 물리친 사명당이 일본에 가서 조선 포로들을 구해 왔다는 옛 이야기와 관련이 있지요. 조선 포로를 구하러 간 사명당을 왜군 병사들이 잡아 죽이기 위해 얼음으로 가득 채운 방에 넣었더니 몸에서 더운 김이 나고 뜨거운 가마솥 안에 넣었더니 수염에 고름이 달렸다는 내용의 이야기입니다. 얼려 죽이려고 만든 방이니 얼마나 추웠을까요? 그러니 ‘사명당 갇힌 방’이야말로 춥기로는 으뜸인 방이겠습니다.

 

얼음으로 가득 찬 방의 한기寒氣를 물리친 것은 어쩌면 사람을 살리겠다는 사명당의 의지였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모든 사물을 꽁꽁 얼어붙게 만드는 찬 기운을 모두 녹일 정도의 뜨거운 열정과 의지 말입니다. 봄날의 탄생을 예감하는 이 겨울 잉태의 고통, 이 한파를 이기는 것 또한 ‘죽임’이 아닌 ‘살림’의 뜨거운 열정이기를 간절히 소망해 봅니다.


글_김영희
경기대학교 교양학부 교수. 연세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구비 문학을 전공하여 박사 학위를 받았다. <비극적 구전 서사의 연행과 '여성의 죄'>, <한국 구전 서사 속 여성 섹슈얼리티에 대한 신경증 탐색>, <한국 구전 서사 속 '부친살해' 모티프의 역방향 변용 탐색> 등의 논문과 <구전 이야기의 현장>, <숲골마을의 구전 문화> 등의 저서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