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

소중한 만남, 스승과 제자

이산저산구름 2013. 8. 19. 14:52

 



서경덕(호: 화담)과 황진이의 특이한 만남

흔히 영화나 드라마에서 서경덕과 황진이의 관계를 두고 일화거리로 삼고 있는 모습을 본다. 하지만 그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허균(許筠, 1569~1618)의 아버지인 허엽(許曄, 1517~1580)은 서경덕의 충실한 제자였는데 허균이 지은 『성옹지소록惺翁識小錄』의 한 대목을 보자. ‘평생에 걸쳐 화담의 사람됨을 숭모했다. 늘 거문고와 술을 싸들고 화담의 거처에 찾아가서 마음껏 즐기고 돌아갔다. 늘 말하길, 지족선사는 30년 동안 면벽面壁을 했다지만 내가 품에 끌어안아 보았다. 오직 화담선생만은 여러 해 아양을 떨어보았지만 끝내 흩트러지지 않았다. 이 분은 참으로 성인이다.’

황진이는 놀이에만 빠졌던 것이 아니라 차분하게 경서를 배우기도 했다. 서경덕(徐敬德, 1489~1546)은 바로 인간 평등을 외친 사상가였으니 이를 배웠을 것 아닌가? 김택영(金澤榮, 1850~1927)은 또 『송도인물지』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내가 죽거든 비단이나 관을 쓰지 말고 옛 동문 밖 물가 모래밭에 시체를 내버려서 개미와 땅강아지, 여우와 살쾡이가 내 살을 뜯어 먹어 세상 여자들로 하여금 나를 거울삼도록 해주시오.’ 그녀는 스승 서경덕이 죽은 뒤, 거지 차림을 하고 스승이 찾아다녔던 금강산 태백산 지리산을 돌아보면서 스승의 체취를 맡았다. 이처럼 애절하고 두터운 스승과 제자 관계가 또 어디 있겠는가?



이달과 허균의 두터운 이해

이달(李達, 1539~1612)은 유명한 시인으로 당대에 명성을 떨쳤지만 서자여서 차별을 받았다. 그는 여기저기 떠돌이 생활을 하면서 낙백의 세월을 보냈다. 허엽은 딸 허난설헌과 막내아들 허균의 스승으로 이달을 초청했다. 두 어린 천재는 이달에게서 당시를 배우면서 무럭무럭 자랐다.
이달은 서자 신분으로 잠시 낮은 벼슬자리에 있다가 전국을 떠돌이 생활을 했는데 한 때는 원주 손곡마을에 살았던 탓으로 호를 손곡이라 했다. 최경창, 백광훈과 함께 당시 3당 시인으로 꼽혔으나 방탕생활을 하면서 걸림이 없었고 속된 예절을 익히지 않았으며 또 떠돌이 생활을 할 적에 밥도 빌어먹었다. 그런 그가 한 때 허균에게 시를 가르쳐 주었던 것이다. 허균은 그가 죽고 난 뒤 『손곡산인전』을 써서 스승의 간단한 행적을 알렸다. ‘신라, 고려 이후로 당시를 짓는 자들은 모두 그에 미치지 못했다. 그의 몸은 곤궁했으나 썩지 않는 것이 있으니 어찌 한 때의 부귀로 이 이름과 바꿀 것인가? 아아, 달의 시는 참으로 기특할진저!’이 보다 더한 찬사가 있을까? 허균은 여기저기 흩어진 스승의 시를 모아 4권으로 묶어냈다. 그러고는 서자들을 평생 친구 또는 동지로 삼았는데 이것이 스승의 삶을 동정해서일까?



평생 뜻을 같이한 박지원과 그 제자들

박지원(朴趾源, 1737~1805)은 많은 제자를 둔 것으로도 행복했을 것이다. 그는 고향 광주를 떠나 운종가 탑골 언저리에서 살았다. 그는 술을 좋아해서 종로의 상인들과 어울려 피막골의 주점에서 술잔을 스스럼 없이 기울였다. 이런 자리에 탑골 뒤편에 사는 이덕무를 비롯해 박제가, 유득공, 서이수, 이서구 등 제자들이 어울렸다.

이들은 청년 문사로 거의 서자들이었는데 정조의 배려로 창덕궁에 있는 규장각의 검서로 발탁되어 근무하다가 틈만 나면 박지원을 찾아와서 고담준론을 벌였던 것이다. 특히 서자로 청년문사인 박제가가 자주 찾아 문장을 논하고 이용후생의 학문을 물었다. 곧 청나라의 실질 있는 문물을 재워 우리나라를 부강하게 한다는 이론이다. 박지원이 청의 수도 북경에 다녀와서 명저 『열하일기熱河日記』를 저술했을 때 이들 제자들이 모여 열띤 토론을 벌이기도 했다. 이 자리에서는 비판의 말도 서슴없이 나왔다. 박지원은 이들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박지원은 가난해서 제자들을 도울 재물이 없었고 되레술을 얻어 마셨다.

이들 제자들은 당시에도 주옥같은 많은 시문을 남겼고 훗날에는 박제가의 『북학의』와 같은 이용후생의 학문을 담은 책도 저술했다. 특히 박지원은 여느 경우와는 달리 당파나 신분을 가리지 않고 뜻을 같이한 것만으로도 제자를 삼았다.



외로운 처지의 정약용과 황상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은 20여 년 동안 강진에서 귀양살이를 했다. 세도정치세력에 줄을 대던 고을 수령들도 무서워 그를 가까이하지 않았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강진의 이웃 고을인 해남 등지에서 젊은이들이 그의 명성을 듣고 찾아들었다. 그들 속에 황상이란 젊은이가 있었다. 열다섯 살짜리 소년인 황상(黃裳)은 “제가 너무 우둔하고 융통성이 없고 답답하다고들 합니다. 저 같은 애도 공부를 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조금 당돌하게 말했다. 그러자 정약용은“배우는 사람은 세 가지 결함이 있다고 전제하고 이렇게 말했다. 첫째는 민첩하게 금방 외우는 것이다. 둘째 날카롭게 글을 짓는 것이다. 셋째 재빨리 깨닫는 것이다.”이렇게 말하고는, 무엇보다 첫째도 둘째도 셋째도 근(勤,부지런함)해야 한다고 이르고는 「삼근계三戒勤」를 지어 주었다. 황상은 이를 평생 지키면서 정약용을 받들었다.

정약용은 영특하고 예리하고 아이디어가 번쩍이었지만, 그것만이 아니라 근면을 통해 불후의 명작을 양산해냈다. 그리해 우리나라 최대의 사상적 학문적 업적을 남겼다. 하지만 황상은 근면했으나 별 저술을 남기지 못했던 것이니「삼근계」를 꼭 성취한 것만은 아닌것 같다. 그래도 황상은 충실한 제자였다. 그런데 정약용은 잦은 귀양살이 끝에 늙어서야 마재(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집으로 돌아왔으니 제자를 제대로 기를 시간 여유가 없었다. 안타까운 일이었다.

빛바랜 오늘날의 스승의 모습

우리나라 전통시대의 교육열은 중국인도 감탄할 정도로 높았고 스승을 받드는 법도도 있었다. 한데 오늘날에는 공리교육의 탓으로 사도師道가 얕보임을 받고, 졸업을 하고나면 관계가 단절된다. 예전 스승은 제자를 찾아 나서, 문하생으로 끌어들이기도 하였고, 장학금도 대주고 생활을 돌보기도 했다. 또 제자는 바른 스승을 찾아 헤매기도 한다.
어떤 경우는 스승은 제자를 자식보다 더 아꼈고 제자는 스승을 어버이보다 더 받들었다. 왜? 바로 스승은 성현의 가르침을 일러주고 실천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는 데 비해 제자는 그 가르침을 스승의 뜻에 어긋나지 않게 굳게 잇는 것이다. 그러니 가정의 효도보다 더 중시하는 경향이 있었다.
부처의 법을 전한 사리불 등 10제자, 공자의 도를 받든 안연 등 10철, 예수의 진리를 전파한 베드로 등 12사도는 저절로 만들어진 게아니었다. 스승과 제자의 만남은 우연한 인연관계가 아니라 사상이나 이념으로 맺어진 것이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스승이 제자의 취직자리를 마련해 주는 게 스승의 길로 잘못 아는 풍토로 바꾸어지고 있다. 새로운 스승과 제자의 만남을 통해 새 사조와 가치관을 이룩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하겠다
글·사진. 이이화 (역사학자) 사진. 문화재청,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연합콘텐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