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말 여행

기다림 망각 - 문인이 말하는 한글, 아름다운 문장 10 시인 오은 편

이산저산구름 2013. 8. 1. 15:41

기다림 망각

 
 
 

기다리는 자, 아무것도 그에게 감추어져 있지 않다. 그는 드러나는 모든 것들 옆에 있지 않은 것이다. 기다림 속에서 모든 것들은 잠재적 상태로 되돌아간다.
 
모리스 블랑쇼Maurice Blanchot 《기다림 망각》 중

 
 

인터뷰에서 종종 받는 질문이 있다. "영감이 언제 찾아오나요?" 나는 웃으면서 대답한다. "영감은 찾아오지 않아요. 자리에 앉아서 어떻게든 첫 단어를, 첫 문장을 써야 합니다. 그건 무턱대고 기다린다고 해서 튀어나오는 게 아니지요." 글을 쓰려면 어찌됐든 '잠재적 상태'로 잠들어 있는 단어들을 적극적으로 깨워야 하는 것이다. 깨우기 전의 단어들은 백사장의 모래알들과 같다. 그것들은 아주 많고, 아주 가까이서 보지 않으면 하나하나 다 똑같은 것처럼 보인다. 그것들은 눈앞에 드러나지만, 스스로를 적극적으로 드러내지는 않는다. 내가 먼저 다가가야 한다. 다가가서 그것들을 손바닥에 올려놓고 하나하나 다 똑같이 보이던 것들에게 제 이름을, 제 색깔을, 제 모양을 찾아 주어야 한다. 그 과정에서, 나는 번번이 그 모래알들과, 그 단어들과 사랑에 빠지고야 만다. 나야말로 사랑에 빠지기 직전의 '잠재적 상태'인 셈이다.

  

오은
1982년 전북 정읍에서 태어났다. 서울대학교 사회학과, 카이스트 문화기술대학원을 졸업했다. 2002년 〈현대시〉로 등단했다. 시집 《호텔 타셀의 돼지들》, 《우리는 분위기를 사랑해》와 산문집 《너랑 나랑 노랑》, 《너는 시방 위험한 로봇이다》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