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절판의 기원
구절판은 주로 옻칠을 하고 자개를 박아서 문양이 다양하고 아름답게 만든 공예품을 칭하기도 하지만 최근에는 도자기나 유리, 플라스틱에서부터 은을 사용하는 등 다양하게 만들어지고 있다. 구절판의 원형은 어디에서 볼 수 있을까? 구절판의 기원은 상당히 오래 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삼국시대 한강유역의 고구려 요새인 아차산 일대 15개 요새 각각의 보루에서 토기 및 철제 무기류와 솥, 시루, 부뚜막 등의 생활도구가 다량으로 출토된 적이 있는데 이 중 하나가 구절판의 일종으로 볼 수 있는 오절판의 원형 토기였다. 이 그릇으로 보아 그 연원은 고구려시대로 올라갈 수 있는데, 그 옛날 물과 초목을 따라 옮겨 다니던 고대인들의 간편하면서도 한 그릇에 여러 음식을 담아 먹던 지혜가 엿보인다. 또한 확실하지는 않지만 칠기구절판의 원형으로 생각되는 칠기그릇이 통일신라시대의 안압지 고분에서 출토되기도 하였으니 고급 그릇에 기울인 선조들의 정성을 알만하다. 그런데 최근에 알게 된 사실로 고려시대에도 청자구절판이 있다니 놀랍다. 이 청자구절판은 10~11세기 경 전북 고창에서 구워진 것으로 추정된다고 하니 고려시대에도 구절판 음식이 있었으리라는 추측도 가능하게 한다.
구절판의 조리법은 언제부터 나타나기 시작했을까? 1930년대 이후의 문헌인 방신영의 『조선요리제법』, 홍선표의 『조선요리학』 황혜성의
『이조궁정요리통고』 등에 기록되어 있고, 그 이전 문헌에는 보이지 않는다. 즉 조선시대 조리서에는 보이지 않다가 일제강점기인 1935년이 되어야
비로소 신문에 구절판이란 음식이 나온다. 바로 동아일보 1935년 11월 9일자 ‘가을요리(6) 내 집의 자랑거리 음식 구절판, 배추무름’이란
기사가 그것이다. 그 이전 1931년판의 방신영의 『조선요리제법』에는 칠전판으로 나와 있고, 1940년의 홍선표의 『조선요리학』에도 구절판이
나온다. 즉, 구절판이라는 음식은 일제강점기에 대단히 유행했던 음식으로 더불어 아름다운 칠기구절판 그릇도 많이 만들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신선로와 함께 한국음식에서 빼 놓을 수 없는 중요한 위치를 이 구절판이 차지하게 된다.
쌈문화의 결정판
구체적으로 구절판이라는 요리에 담긴 우리 문화의 의미는 무엇인지 찾아보자. 우리 민족의 중요한 특징이 쌈의 민족이라고 한다. 보자기문화라고
설명하기도 하는데 우리 음식에는 주로 나물 잎에 싸먹는 문화가 일반적이지만 거꾸로 얄팍한 밀전병에 여러 가지 나물들을 싸서 먹는 음식이 있으니
바로 우리가 한국의 대표음식으로 알고 있는 ‘구절판’이다. 깨끗한 교자상 차림에 올라가 있는 구절판을 보고 있노라면 참 아름답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구절판이란 9개의 칸으로 나뉘어져 있다는 그릇을 뜻하고 각각의 칸마다 제각각의 개성이 다른 음식들을 담게 된다. 반질반질한 칠기 찬합에
색 맞추어 담긴 음식재료들을 어찌 먹어치울 수 있을까하는 비장한 마음까지 든다. 아, 하는 감탄사가 나오는 그야말로 먹기에 아까운 음식이
구절판이다. 그러므로 이 음식이 가진 음식철학의 의미를 알고 먹어야 최소한의 예의가 아닌가 생각한다.
음양오행의 음식
음음양오행설은 중국에서 시작된 것으로 우리나라의 모든 정신세계에 깊이 들어와 있는 사상이다. 특히 한국 전통 음식 중에는 이를 실천하고
있는 음식들이 많다. 그러나 그중에서도 음양오행의 철학을 극도로 잘 실천하고 있는 음식이 구절판이라고 생각된다. 즉, 음(식물성 식품)과
양(동물성 식품)의 음식들을 적절히 조화하고, 오색(청, 적, 황, 백, 흑)과 오미(酸, 苦, 甘, 辛. 짠맛)의 적절한 조화를 아낌없이
보여주는 음식이다.
이러한 음식을 한 번에 어우러지게 느끼며 먹을 수 있도록 가운데 칸에는 밀전병을 놓아 함께 싸먹도록 했다. 먹는
방법은 빈 접시에 밀전병 한 장을 놓고, 그 위에 여덟 가지 재료를 마음대로 조금씩 집어 놓고 겨자장이나 초장을 조금 치고 양쪽에서 접어 싸서
먹는 것이다. 궁실宮室이나 반가班家에서 유두流頭절의 시절식으로 이용되었다. 서로 모여 구절판을 싸먹으면서 우의를 두텁게 할 수 있는 정겨운
음식이다.
색이 화려하고, 영양소를 고루 섭취할 수 있다. 구절판은 주안상이나 다과상에도 이용되고 있다. 주안상에는 생밤, 호두, 은행, 대추, 잣,
땅콩, 곶감 등의 마른안주를 담고 다과상에는 각종 강정, 정과, 다식, 숙실과 등을 색을 맞추어 담는다. 특히 이것을 건구절판이라고 한다. 이는
서울 풍속에 산언덕 물굽이에 나가 노는 것을 화류라 하는데 구절판은 조선시대에 들놀이를 가거나 여행을 갈 때 술안주로도 먹었다고 한다. 만드는
법은 밀가루를 물에 개어 종이처럼 얇게 부친 뒤에 식혀서 구절판의 중앙 칸에 맞도록 둥근 모양으로 만든다. 가늘게 채를 썬 쇠고기는 양념해
볶고, 달걀은 황백으로 나누어 알지단을 부쳐서 식힌 다음에 곱게 채친다. 오이채나 애호박채를 소금에 잠깐 절였다가 꼭 짜서 기름에 볶는다.
불려놓은 표고와 석이버섯을 채쳐 양념해 각각 볶는다. 천엽이나 전복을 채 썰어 양념해 볶고, 당근도 채쳐 소금간을 하면서 기름에 볶는다.
구절판의 가운데 칸에는 밀전병을 서로 떼기 좋도록 사이사이에 잣가루를 넣거나 잣을 두어 개씩 넣어 담고 가장자리에는 준비해 둔 나머지 재료들을
색을 맞추어 소복하게 담으며 잣가루를 위에 뿌린다. 이밖에 닭 가슴살이나 새우 등 계절과 기호에 따라 다양한 재료를 쓸 수 있으며 모두 가는
채의 형태로 써는 것이 특색이다. 찹쌀가루로 찰 전병을 부치기도 한다. 구절판은 여러 종류의 채소와 쇠고기볶음, 석이나 표고버섯류, 계란지단,
고급재료로는 천엽, 전복 등을 밀전병에 싸서 겨자장이나 초간장에 찍어 먹는 음식인 것이다.
최고의 영양궁합
구절판의 영양균형을 말하고 지나가지 않을 수 없다. 우리 한식은 건강식품이라는 말을 많이 하는데 이는 식재료의 균형에서 나온다. 하루에
먹는 음식 중 동물성 식품과 식물성 식품의 비율이 2:8 정도일 때 가장 영양학적으로 궁합이 맞는다고 한다. 구절판은 재료로는 동물성 식품과
식물성 식품이 골고루 들어가 영양의 균형을 맞추어 준다. 즉, 그 비율이 대략 2:8 정도로 건강에 아주 좋다. 쇠고기나 계란의 단백질 성분,
그리고 다양한 채소류를 통한 비타민과 무기질은 건강에 아주 좋다. 거기에 밀전병은 당질 식품으로 하루 5대 영양소의 균형을 잘 갖추고 있는
음식이다.
다양한 채소류오이, 숙주나물, 당근, 육류쇠고기, 천엽 버섯류석이버섯, 표고버섯, 해산물해삼, 전복 황백의 달걀지단을 함께 넣어 얇디얇게
부친 밀전병에 싸서 새콤한 초간장에 찍어먹는 맛을 어디에다 비길까? 이는 그야말로 탄수화물밀전병, 단백질쇠고기, 달걀, 지방볶기 위한
식물성기름, 비타민각종 채소와 버섯류, 무기질천엽과 수산물의 5대 영양소가 함께 어우러진 최고의 음식이다.
구절판에는 이런 일화도 전해 온다. 오래 전 우리나라를 방문한 펄 벅 여사(미국 소설가, 대표작 『대지』)가 식사대접을 받는데, 상 한복판에 팔각형의 칠흑 상자가 놓여 있었다. 뚜껑을 열어보니 새까만 뚜껑과는 대조적으로 아홉 칸 빨간 틀 속에 아홉 가지 원색의 식품이 조화를 이루고 있는 것을 보고는 “나는 이 작품을 파괴하고 싶지 않다”면서 끝내 젓가락을 대지 않았다고 한다. 구절판은 조선시대의 조리서에는 보이지 않기 때문에 일제강점기 이후 음식으로 생각하기도 한다. 그러나 고구려의 토기 오절판, 통일신라의 칠기찬합, 고려의 청자오절판의 출토로 미루어 보아 사실은 아주 오래된 음식일 수도 있다고 보인다. 세월이 흘러 내려오면서 아마 구절판은 전혀 다른 모양으로 전개되었을 수도 있다. 신라시대의 칠기찬합에는 전혀 다른 음식재료들이 담겨 있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천 년을 이어져 오는 비슷한 식기를 보면서 우리는 무엇을 느껴야 할까? 천 년 전에 이미 이렇게 아름다운 그릇을 만들어낸 장인의 마음, 그리고 이 그릇에 담길 아름다운 음식을 만들었던 여인네의 마음씀을 한 번이라도 생각하면서 이러한 음식들을 먹어야 하지 않을까?
글. 정혜경 호서대학교 식품영양학과 교수 사진. 문화재청, 국립경주박물관, 서울대학교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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