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야외 미술관
크라쿠프 여행의 시작점이라 할 수 있는 곳은 말발굽 모양의 바르바칸 성벽이다. 견고한 성벽이 견고하게 도시를 비호하고 있다. 바르바칸을 지나 성으로 진입하는 8개의 문 중 유일하게 남아있는 플로리안스카 문을 통과하면 비로소 올드타운이 시작된다. 이 성벽을 따라 아름다운 그림들이 전시되어 있는데, 이름 없는 화가들이 혼을 다해 정성스레 그린 그림들이 여행자의 시선을 끌고 발걸음을 멈추게 한다. 작은 공간도 허투루 사용하지 않는 크라쿠프 시민들. 오래된 시간의 냄새가 풍기는, 오래된 시간의 온기가 느껴지는 성벽 미술관에서, 거장들의 그림이 빼곡한 루브르 미술관에서 받았던 것보다 더 진한 감동을 받는다.
크라쿠프의 중심, 리넥
성벽 미술관을 지나 일직선으로 뻗은 플로리안스카Florianska 거리를 걷다보면 널찍한 광장을 만나게 된다. 폴란드에서는 중앙광장을 ‘리넥Rynek’이라 부르는데, 귀족들의 저택으로 둘러싸인 크라쿠프의 리넥은 유럽에 남아 있는 중세의 광장 중 가장 넓은 광장이라고 한다. 리넥의 왼편으로는 13세기의 건축물인 크라쿠프의 랜드마크 성 마리아 성당이 위풍당당하게 서 있다. 거의 800년 가까운 시간을 흘러온 성 마리아 성당의 입구에는 이런 안내글귀가 붙어있다. ‘여행자 출입금지, 기도자 출입가능’. 폴란드인들의 깊은 신심은 워낙 유명한 바, 천재라 불리는 조각가 비트스트보슈의 작품인 성당 내부의 승천제단과 두 눈을 황홀하게 만드는 스테인드 글라스를 보니 그 깊음이 어느 정도일지 조금이나마 가늠이 되었다. 성 마리아 성당에는 두 개의 첨탑이 있다. 이 첨탑에는 두 가지의 슬픈 이야기가 전해져 온다.
첫 번째 이야기는 성 마리아 성당의 공사를 맡았던 형제 건축가의 이야기이다. 형과 동생이 각각 탑 하나씩을 세우기로 하였는데, 형보다 빨리 짓는 데에만 급급한 동생이 날림 공사를 하는 바람에 동생의 탑은 높이만 올라갈 뿐 여기저기서 결함이 나타났다. 그러자 동생은 기초가 탄탄한 완벽한 공사를 하는 형을 시기하여 형을 죽여 버렸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온다. 더 높은 첨탑이 성급한 동생의 것, 더 낮은 첨탑이 완벽한 형의 것이라고 한다. 두 번째 이야기는 나팔을 부는 파수병의 이야기이다. 성 마리아 성당의 첨탑에서는 매 시간마다 파수병이 트럼펫을 분다. 13세기에 한 나팔수가 타타르 족이 침입해오는 것을 발견하고 트럼펫을 불었는데 곡이 끝나기 전에 적이 쏜 화살에 맞아죽었다. 그때부터 후세의 사람들은 매시간 그가 죽기 전에 연주했던 부분까지만 트럼펫을 분다고 한다. 허공에 울려퍼지다 뚝 끊기는 헤이나우(짧은 길이의 성가. 트럼펫으로 연주한다)의 선율. 애절하다.
성 마리아 성당을 나와 리넥의 오른편을 바라보면 100m나 되는 길쭉하고 하얀 건물인 직물회관이 한눈에 들어온다. 건물의 길이만큼 길게 뻗은 회랑이 멋있는 르네상스 양식의 이 건물은 직물회관으로, 14세기에 건축되었다고 한다. 2층은 국립박물관이며 1층은 현재 상점으로 이용되고 있는데 다양한 목공예품, 마그넷, 옷, 액세서리 등으로 여행자들을 향해 소리없는 호객 행위를 한다.
500년동안 폴란드 왕의 거주지였던 바벨 성
리넥에서 천천히 걸으면 20분. 500년 동안 폴란드 왕이 거주했다는 바벨 성에 도착한다. 비스와 강이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 자리한 바벨 성은 로마네스크·고딕·르네상스·바로크 등 다양한 양식이 혼합된 건축물로 1000년 경 크라쿠프 주교에 의해 세워졌다. 이곳은 궁전이 있고, 대성당이 있고, 박물관이 있는 일종의 작은 마을이다. 특히 대성당은 왕의 대관식과 장례식을 치렀던 곳으로 역대 폴란드 왕과 왕비, 영웅들이 묻혀있다. 크라쿠프 여행자라면 누구나 바벨 성을 방문한다. 크라쿠프 여행의 하이라이트라고나 할까. 1000년 경에 세워진 고색창연한 건물들이 의연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는 모습은 감동적이기까지 하다. 녹색 잔디가 빼곡하게 깔린 성 안은 누워서 뒹굴고 싶을 정도로 다정하게 느껴진다. 바벨 성 외관을 돌아보는 것은 무료, 내부 관람은 유료다. 여행자들이 가장 많이 찾는 곳은 대성당과 지그문트 탑. 지그문트 탑에는 16세기에 만들어진 폴란드 최대의 크기를 자랑하는 지그문트 종이 있는데 그 중심을 왼손으로 만지면 다시 이곳에 돌아온다는 전설이 있다고 한다. 종을 찾아 끝없이 이어진 나선형 계단을 찬찬히 오른다. 폭이 좁은 계단은 여럿이 달려들면 올라가지도 내려오지도 못하게 생겼다. 사람들은 모두 이곳에 다시 돌아오고 싶은 걸까. 탑을 찾은 사람들 모두 종의 중심을 만지느라 정신이 없다. 다시 돌아오고 싶은 마음은 내게도 있다. 나도 내 차례를 놓칠세라 서둘러 종의 중심으로 다가가 지극한 마음을 담아 잊지 않고 ‘왼손’으로 종의 중심을 쓰다듬었다.
걸출한 인재를 배출해 낸 야기엘론스키 대학
크라쿠프에는 체코의 카를 대학에 이어 중동부 유럽에서 두 번째로 오래된 대학인 야기엘론스키 대학이 있다. 폴란드인들의 정신적 중심이 종교에 있다면, 학문적 중심지가 되는 곳은 바로 야기엘론스키 대학이다. 카지미에슈 왕이 1364년에 세운 크라쿠프 아카데미가 야기엘론스키 대학의 전신인데, 1400년에 야드비가 왕비가 보석을 팔아 현재의 야기엘론스키 대학을 세웠다고 한다. 폴란드의 혁명적 위인인 코페르니쿠스와 정신적 지주인 요한 바오로 2세가 바로 야기엘론스키 대학 출신이다. 가장 오래된 건물은 리넥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콜레기움 마이우스인데, 코페르니쿠스가 공부했던 곳이라는 이유로 지금은 여행자들의 순례코스가 되었다. 콜레기움 마이우스 마당에 앉아 있으면 머리 위로 쏟아지는 햇살과 어느 틈새인가로 들어오는 바람이 참 살갑게 느껴진다. 폴란드를 건재하게 하고, 폴란드인들을 강건하게 한 힘이 무엇인지 알 것만 같다.
노년이 행복한 곳
과거와 현대가 사이좋게 공존하는 도시, 크라쿠프. 그러한 도시의 특성 때문일까. 노년과 청년이 사이좋게 어울리는 곳이 바로 크라쿠프다. 청년들의 활기차고 발랄한 걸음걸이와 노년들의 느릿느릿 여유 있는 걸음걸이가 아름다운 무늬를 그려낸다. 내가 특히 놀랐던 것은 유럽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거리의 악사’가 크라쿠프에서는 바로 어르신들이라는 점이었다. 이른 아침부터 할아버지들은 알록달록한 폴란드 전통 의상을 챙겨 입고 연주를 한다. 몸에 걸친 옷만큼이나 알록달록한 화음을 넣은 연주로 여행자를 유혹한다. 하지만, 할아버지들의 연주는 할머니들을 위한 것. 아무리 내가 호응을 해도 본 체 만 체. 동전통에 음악감상비를 넣어도 본 체 만 체. 그런데, 저 멀리서부터 할머니 한 분이 다가오자 할아버지들의 눈빛이 달라졌다. 앉아서 아코디언을 연주하던 할아버지는 일어서기까지 하였다. 아름다운 노년. 흥에 겨운 할머니와 할아버지를 보며 나도 저렇게 곱게 늙고 싶다는 소망 한 자락, 가슴 속에 스며들었다. 크라쿠프 곳곳에서 할머니와 할아버지로 구성된 ‘거리의 악사’팀을 만날 수 있었고, 전통 의상을 입고 상점을 운영하시는 할머니도 만날 수 있었다. 늙어서도 할 일이 있고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은 너무나도 매력적이다. 크라쿠프는 그래서 내게 더 깊은 인상을 안겨주었다.
경이로운 폴란드인의 국민성
크라쿠프는 전쟁의 폭격을 피해간 ‘운 좋은’ 도시다. 하지만, 폭격을 당해 도시의 많은 부분이 파괴되었어도 아마 크라쿠프는 과거의 모습 그대로 재건되었을 것이라 예상된다. 그것은 바르샤바의 예를 통해 짐작해 볼 수 있는 일이다. 바르샤바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폴란드의 수도였는데, 독일군의 폭격으로 도시의 85%가 완파되었다. 하지만 폴란드인들은 수도를 옮기지 않는 대신 바르샤바를 재건해 냈다. 성금을 걷고 팔을 걷어 거의 완벽하게 과거의 모습을 재현해 낸 그들의 의지, 도시에 대한 그들의 애정, 나라를 향한 그들의 애국심은 경이롭다. 우리나라는 어떤가. ‘개발’이라는 미명 하에 우리의 옛 유적과 흔적들이 소리도 없이 사라지는 경우를 자주 목격한다. 개발만이 능사인가. 보존하고 관리하는 노력을 기울이는 것 또한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크라쿠프는 비록 전쟁 당시 피해 입은 도시는 아니지만, 과거로부터 이어져 온 유산을 부수거나 현대식 건축물로 탈바꿈하지 않고, 끊임없이 관리하고 보수한다. 그래서 지금도 여전히 크라쿠프는 500년 고도의 위엄을 잃지 않고 위풍당당한 모습으로 크라쿠프 시민들을, 폴란드 국민들을, 이방인 여행자들을 감싸 안는 것이다. 시간의 위대함은 그 오래된 도시의 품 안에 안겨본 사람들만이 느낄 수 있는 선물이다.
글 | 사진 · 변혜정 여행작가, <선율이 번지는 곳, 폴란드> 저자 일러스트레이터 · 정윤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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