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땅을 한눈에 보다
대동여지도의 제작자인 김정호에 대해 알려진 것은 별로 없는데, 김정호가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진 것은 일제에 의해서였다. 그 당시 조선총독부에서 교과서로 제작한 <조선어독본>에 김정호의 전기가 실리면서부터였다. “지금으로부터 백 년 전 일이다. 황해도의 어느 두메의 다 쓰러져 가는 초가집 뜰에 한 소년이 있었다.”로 시작되는 이 글에 의하면 지도에 큰 흥미를 가진 김정호가 우리나라의 군현 단위의 지도와 규장각에 있는 <조선팔도지도>를 살려본 결과 틀린 것이 너무 많았다. 그래서 조선 팔도를 세 번에 걸쳐 돌아다니고, 백두산을 여덟 번이나 오르내리고서 대동여지도를 만들었다. 그러나 대원군의 노여움을 사서 옥에 갇혀 죽었다. 인물을 알아보지 못한 조선 정부 때문에 그의 업적이 진흙 속에 묻혀버리고 말았다는 것을 강조한 것이다. “일로전쟁이 시작되자 대동여지도는 우리 군사에게 지대한 공헌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 후 총독부에서 토지조사사업에 착수할 때에도, 무이無二의 호자료好資料로, 그 상세하고도 정확함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경탄케 하였다 한다.”라고 마무리 하고 있는 김정호의 생애와 업적이 조선후기의 학자인 유재건劉在建이 지은 <이향견문록里鄕見聞錄>에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김정호는 스스로 호를 고산자라고 했다. 본디 재주가 많았고, 지리학에 심취하였다. 그는 두루 찾아보고 널리 수집하여 일찍이 <지구도地球圖>를 제작하고, 또 대동여지도를 만들었는데, 능숙한 그림 솜씨와 조각 솜씨로 만들어 이를 인쇄하여 세상에 펴낸 것이다. 내가 한 질을 구해 보았더니 진실로 보배라 할 만한 것이었다. 또한 <동국여지고東國與地攷> 10권을 편찬하였는데, 탈고하기 전에 세상을 떴으니 진실로 애석할 따름이다.” 그렇다면 김정호는<대동여지도>를 어떤 목적으로 제작했을까? <대동여지도>의 서문에 해당하는 <지도유설地圖類說>을 보자. “나라를 다스리기 위해서는 국방상의 위치를 잘 알아야 하고, 재물과 세금이 나오는 곳과 군사를 모을 수 있는 원천을 잘 알아야 하며, 여행과 왕래를 위해 지리를 잘 알아야 한다.(...) 또한 지도는 세상이 어지러우면 쳐들어오는 적을 막고 사나운 무리들을 제거하며, 시절이 평화스러우면 나라를 경영하고 백성을 다스리는 데 필요한 것이다.”라고 말한 김정호는 <동여도지>의 서문에서 “지도로 천하의 형세를 살필 수 있고 지리지로 역대 왕조의 역사를 알 수 있으니, 이는 실로 나라를 다스리는 큰 틀이다.” 라고 하며 지도와 지리지의 중요성을 언급하였다.
조선 최고의 지도를 만들기 위한 선행물 이전에 편찬된 지도와 구별되는 지도와 지리지를 만들고자 했던 김정호는 1830년대에 이미〈청구도〉와 〈동여도지〉를 제작하였다. 그 뒤 1850년대에〈동여도〉와 〈여도비지〉를 제작한 김정호는 1850년대 말부터 1860년대 초〈대동여지도〉와 〈대동지지〉를 편찬했다. 그 무렵 김정호를 전폭적으로 후원했던 지식인들이 있었다. 조선 후기의 무신이자 외교가인 신헌申櫶과 실학자이자 장서가로 소문이 자자했던 최한기崔漢綺, 그리고 김정호와 함께 <여도비지輿圖備志>를 편찬한 최성환이 그들이다. <동여도>를 제작할 당시의 상황이 신헌의 <금당초고琴堂草稿>, <대동방여도서大東方輿圖序>에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나는 일찍이 우리나라 지도에 뜻을 두고 비변사와 규장각에 소장된 것, 오래된 집안에 좀 먹다 남은 것들을 널리 수집하여 증정證定하고, 여러 본들을 서로 참고하고, 여러 책들에 근거하여 합쳐서 편집하였다. 이리하여 김백원(김정호)군과 그것을 모의하고 완성시키도록 위촉하였다. 증명하고 앞으로 전해주어 수십 년 걸려 비로소 한 부를 만들었는데, 모두 23권이다.” 신헌의 글이나 여러 가지 정황을 보면 김정호는 전국을 답사하며 실측한 것을 토대로 대동여지도를 만든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비변사나 규장각의 지도와 자료, 그리고 여러 후원자들의 지원에 힘입어 대동여지도를 제작할 수 있었다. 김정호가 평생에 걸친 연구 성과를 집대성한 것으로 알려진 <대동여지도>는 1861년(철종 12)에 완성되었다. 지도를 사용하는 사람의 편리함을 최대한 살린 실용적인 이 지도는 조선 후기에 제작된 전국지도 가운데 규모가 가장 크다. 대동여지도는 우리나라 전체, 즉 함경도 온성에서 제주도에 이르기까지 남북으로 120리 간격으로 22첩으로 구분하였다. 그 뒤 각 첩에 해당하는 지역의 지도를 각각 1권의 책으로 만들었다. 각권의 책은 동서 80리를 기준으로 펴고 접을 수 있도록 제작하여 사람들이 가지고 다니면서 보기에도 편하게 제작했다. 또한 우리나라 전체를 22권의 책에 나누어 수록한 분첩절첩식分帖折疊式으로 각 권의 책을 마치 병풍처럼 펼 수도 있고 접을 수 있도록 하였다. 이렇게 제작된 22권의 책을 모두 펴서 연결하면 동서 약 3.3m 남북은 약 6.7m 에 이르는 조선전도가 된다. 우리나라 고지도 중에서도 가장 자세하고 방대한 지도인 대동여지도에는 백두산에서 비롯되어 지리산으로 이어지는 우리나라의 산줄기를 자세하게 표시되어 있다. 그는 산줄기는 국토의 뼈대가 되고 강줄기는 핏줄이 된다는 우리 민족의 자연관을 그대로 반영하였고, 이전의 지도들은 산을 연속적으로 표시하였는데, 대동여지도는 산맥을 추상화하여 선과 면으로 표시하고 있다. 전국 해안선의 길이와 6대 간선도로의 총길이를 기록하였고, 도로를 직선으로 그렸다. 또한, 만 3천여 개에 달하는 옛 지명을 지도에 일일이 표시함으로써 지도의 내용이 정확해졌다는 점에서 큰 의의를 지니고 있다.
대동여지도의 과학과 대중성
김정호가 만든 대동여지도는 앞서 만들었던 청구도와는 달리 글씨를 가능한 한 줄이는 대신에 현대 지도의 범례에 해당하는 ‘지도표’라는 방법을 고안하여 기재 내용을 기호화하였다. 이 지도에는 산과 산줄기, 하천, 바다와 섬 마을을 비롯하여, 영아營衙, 읍치, 성지, 진보, 역참, 창고, 목소, 봉수, 능침, 방리, 고현古縣, 고산성, 온천, 도로 등 14개 항목 22종의 동일한 정보가 동일한 기호로 표시되어 있다
김정호는 그 기호체계를 두고“자연을 정확하게 객관화하고 이를 유통시킬 수 있는 것이다.” 라고 설명했다. 우리나라 지도의 백미로 꼽히면서 조선시대에 어떤 지도도 따를 수 없는 장점을 가지고 있는 대동여지도는 내용상으로 지지와 조선 후기에 발달하였던 실학적 지리학의 성과를 집대성한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풍부하고 상세한 정보를 수록하였으며, 지도학적으로 조선후기에 꾸준히 이루어졌던 지도발달의 성과를 종합한 지도이다. 이전의 지도들이 필사본이라서 대중적인 이용에 한계가 있었던 데에 반해 목판 인쇄본으로 만들어 대량으로 유포될 수 있었다. 또한 지도의 윤곽과 형태 그리고 내용과 체제 등 모든 면에서 전 시대에 만들어졌던 여러 지도의 장점을 취한 것이었다. 전국지도와 도별지도, 그리고 상세한 군현지도의 장점을 합하여 군현지도 수준의 풍부한 내용을 지니면서도 역사지리적 정보까지도 한눈에 파악할 수 있는 일목요연한 전국 지도를 만든 것이다. 대동여지도의 가장 큰 장점은 무엇보다도 정확한 축척과 도면 수성의 과학성이라고 할 수 있다. 근대 지도에 근접한 방안조직(grid system)을 이용한 전통적인 동양의 지도제작방법을 기본으로 하면서 1: 162,000의 축척으로 그렸다. 특히 십 리마다 눈금을 표시하도록 해서 실제의 거리를 쉽게 추산하도록 설계하였고, 간이측량 및 관측을 통하여 독창성을 지닌 지도를 완성했다. <대동여지도>는 지도학상으로는 물론 민족문화에 길이 빛나는 걸작이며 지도를 통해 부강한 나라를 만들고자 했던 김정호의 연구 결과가 집약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대동여지도의 판목 중 1매가 숭실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고, 목판본 지도는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보물 제850호로 지정되어 있다.
글 / 신정일(문화사학자, 사단법인 우리 땅 걷기 이사장)
사진 / 문화재청, 연합콘텐츠, 엔사이버 포토박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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