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짓기

문門, 시대의 정신이 되다

이산저산구름 2010. 10. 12. 12:53

문門,  시대의 정신이 되다


    

한 시대의 문화와 정신이 반영된 문

고대 이래 우리 전통 문의 한 축은 불교의 정신세계를 상징했다. 통일신라 건축물인 경주 불국사에서도 우리 고대 문의 시대적·정신적 흔적을 만날 수 있다. 삼국통일 직후 8세기 통일신라는 불교국가로서 불국토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한 의지로 충만해 있었다. 통일 신라인들은 절을 짓고 탑을 세우고 불상을 만들어 그들의 불심을 표현하고자 했다. 국보 제23호 청운교 백운교의 돌계단 다리를 지나 위로 오르면 자하문紫霞門이 나온다. 다시 자하문을 지나면 불국사의 대웅전으로 들어가게 된다. 눈앞에 펼쳐지는 다보탑과 석가탑. 자하문은 속세의 세계에서 부처의 세계로 들어가는 통로를 상징한다. 그건 새로운 정신세계와의 만남이다. 그 옆의 안양문安養門도 마찬가지다. 연화교 칠보교를 지나 안양문을 거쳐 극락전으로 이른다. 이들 문은 모두 불국토로 이르는 길로, 신라인들은 문을 지나며 불심을 노래하며 불국토를 꿈꾸었다. 우리가 흔히 만나는 불교 사찰의 문은 모두 이러하다.

시대적 분위기와 사상을 보여주는 것은 비단 사찰의 문만이 아니다. 1392년 조선이 개국하자 수도 한양(서울)엔 위풍당당한 성곽과 문들이 들어섰다. 한양을 빙 둘러싼 성곽엔 사람들이 드나들 수 있는 크고 작은 문이 모두 8개 있었다. 4대문과 4소문이다. 4대문은 동대문인 흥인지문興仁之門, 서대문인 돈의문敦義門, 남대문인 숭례문崇禮門, 북대문인 숙정문肅靖門. 4소문은 북동쪽에 위치한 동소문인 홍화문弘化門, 일명 혜화문惠化門, 남서쪽에 위치한 서소문인 소덕문小德門, 남동쪽에 위치한 광희문光熙門, 북서쪽에 위치한 창의문彰義門, 일명 자하문紫霞門이다. 이들 문은 한양의 상징이었다, 그 상징성은 지금도 여전하다. 숭례문이 국보 1호, 흥인지문이 보물 1호인 것도 이런 맥락이다. 특히 숭례문은 그 당당함이 돋보인다. 숭례문은 현존 도성 건축물 중 가장 오래되었다. 숭례문은 장중한 규모에 절제와 균형의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숭례문의 이 같은 미학은 조선왕조 초기의 당당하고 자신감 넘치는 사회적 문화적 분위기를 반영한 것이다.



르네상스의 소망과 근대의 꿈

18세기 정조는 수원 땅에 화성華城을 축조하고 그곳을 문화르네상스의 거점으로 삼고자 했다. 정조는 여기에 다양한 정치적 포석을 깔았다. 한양 남쪽을 방위하는 새로운 성곽을 만들어 친위부대를 주둔시키고 한양에 잠복해있는 개혁 반대세력을 제압하겠다는 의지를 담았다. 정조는 화성을 과학적이면서도 아름답게 쌓았다. 화성에 정치적, 문화적 의미를 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화성은 팔달산 정상에서 내려와 낮은 구릉지대를 따라가면서 도시를 포근하게 감싸는 멋진 성이다. 화성을 구성하고 있는 팔달문, 장안문, 화서문, 창룡문 이들 문은 다른 시설물들과 함께 화성을 더욱 장엄하고 세련되게 만들어준다. 옹성甕城 등 부속시설로 인해 더욱 실용적이면서 화려하고 디자인이 모두 달라 보는 이를 매료시킨다. 화성과 문들은 완성됐지만 정조는 문화르네상스의 꿈을 이루지 못했다. 화성이 정조의 소망을 담은 문이라면 독립문은 근대를 향한 조선 국민의 꿈을 담은 문이라 할 수 있다. 1897년 서울 돈의문(서대문) 인근에 낯선 모습의 문이 들어섰다. 독립협회의 주도로 자주독립의 의지를 다짐하기 위해 프랑스 파리의 개선문을 본떠 만든 독립문이다. 이 문은 국민적인 모금운동을 통해 세운 문으로 독립협회는 모화관慕華館의 영은문迎恩門을 헐고 그 자리에 독립문을 세웠다. 모화관은 중국 사진을 영접하고 환송하는 곳이었고 영은문은 모화관의 정문이었다. 독립협회 사람들은 중국에 종속되지 않고 중국과 대등한 독립을 얻어야 한다는 뜻에서 영은문을 헐고 독립문을 지었던 것이다. 독립문의 무지개 모양 홍예문 이맛돌에는 대한제국을 상징하는 오얏꽃무늬를 새겼다. 맨 위에는 앞뒤로 독립문이라는 글씨와 태극기를 새겨 놓았다. 하지만 조선 국민의 열망에도 불구하고 나라의 국운은 점점 더 기울었다. 독립문 앞에 놓여있는 영은문의 주춧돌 두 개가 보는 이를 쓸쓸하게 한다.  



문의 수난, 역사의 수난

경복궁의 정문은 광화문光化門이고, 창덕궁은 돈화문敦化門, 창경궁은 홍화문弘化門, 경희궁은 흥화문興化門이다. 궁궐 정문 이름엔 모두 가운데에 ‘화化’자가 들어 있다. 그런데 덕수궁의 정문인 대한문大漢門은 그렇지 않다. 여기엔 수난의 역사가 배어 있다. 대한문은 원래 덕수궁의 정문이 아니었다. 동쪽 문이었다. 덕수궁의 정문은 남쪽에 있던 인화문仁化門이었다. 1900년대 초 일제가 도로를 만들면서 인화문을 철거해 이후 대한문을 정문으로 사용해온 것이다. 특히 대한문 앞으로 큰 도로가 나면서 대한문 앞으로 사람들이 많이 지나다니게 되었고 이런 연유로 해서 자연스럽게 정문의 구실을 떠맡게 된 것이다. 서울 성곽의 문인 숭례문, 돈의문, 흥인지문도 마찬가지였다. 개화의 물결이 몰아닥치고 서구 열강과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이 가속화하면서 문은 수난의 역사로 접어들었다. 1899년 서울시내에 전차 노선을 설치하면서 돈의문 흥인지문 주변의 도성을 헐어냈다. 주변 성곽이 헐림으로써 ‘성곽의 문’으로서의 존재가치를 잃어버렸다. 국권을 사실상 상실한 20세기에 들어서자 성곽의 파괴는 더욱 심해졌다. 1907년 일본 왕자 요시히토가 서울을 방문했을 때였다. 요시히토는 숭례문을 통과해 서울 도성 안으로 들어가지 않겠다고 했다. ‘일본의 왕자가 힘없는 나라 조선의 도성 정문을 열고 들어간다는 것은 일본 제국의 수치’라고 생각했으니, 우리로서는 참으로 안타깝고 처참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결국 일본은 숭례문 좌우의 성벽을 무참히 헐어냈다. 국권을 강제로 침탈해간 일본은 급기야 1915년, 도로를 확장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돈의문을 흔적도 없이 파괴해 버렸다. 1926년 일제는 조선총독부 청사를 신축하면서 광화문이 총독부 건물의 시야를 가린다는 이유로 경복궁 건춘문 북쪽(현재 국립민속박물관) 자리로 옮겼다. 이어 한국전쟁 때 육축 위의 목조 누각이 소실됐다. 1968년 제자리로 옮겨 복원했으나 원래 위치에서 북쪽으로 약 13m, 동쪽으로 약 11m 밀려났으며 그 방향도 경복궁 중심축에서 뒤틀리게 배치됐다.


21세기 문의 부활

시대의 정신과 삶의 애환이 고스란히 배어있는 우리의 전통 문. 그 문들은 이제 시련의 시대를 마감하고 하나 둘 새로운 모습으로 다시 태어나고 있다. 이런 저런 수난을 겪고 국보 1위의 지위에 오른 숭례문은 그마저도 1960년대 주변으로 차도가 생기면서 사람들이 숭례문 옆으로 다가갈 수 없게 되었다. 고층빌딩 숲 한가운데 절해고도絶海孤島처럼 외롭게 서 있는 숭례문은 무척이나 외로운 존재였다. 사람과 문화재를 무시한 서울의 도시 개발 탓이었다. 그러던 차에 최근 들어 조금씩 숨통이 트이고 있다. 2005년 숭례문 앞에 광장이 만들어져 사람들이 가깝게 다가갈 수 있게 되었고 2006년 3월엔 석축 가운데의 홍예문으로 사람들이 지나 다닐 수 있게 되었다. 비록 2008년 방화로 인해 숭례문 상부 누각의 2층부가 불에 타버리는 참화를 겪어야 했지만 숭례문 개방은 잘한 일이었다. 지금 숭례문 현장에서는 복원공사가 한창이다. 광화문도 수난의 역사를 마감하고 올해 광복절인 8월 15일 원래 위치에 원래 모습으로 복원됐다. 육중하고 당당한 화강암 석축(육축), 경쾌한 처마선을 자랑하는 목조 누각, 화려한 오색단청. 복원된 광화문엔 조선 건축의 전통과 21세기의 정신이 담겨 있는 셈이다.   

글·이광표  동아일보 문화재 전문기자  
사진·연합콘텐츠, 엔싸이버 포토박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