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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J는 진보였나요?(김대중 자서전을 읽고 나서-최규엽)

이산저산구름 2010. 9. 14. 10:13

DJ는 진보였나요?
- 김대중 자서전을 읽고 나서-


최규엽 새세상연구소 소장

1971년 학교운동장에서 처음 본 DJ
고등학교 1학년 때다. 종료시 담임선생님이 말씀하시기를 “우리 학교 운동장에서 김대중 대통령 후보 연설회가 있는데 절대 가지 말라”고 하셨다. 1970년 박정희의 3선 개헌 파동 때 고등학생들이 데모를 하는 것 보고 그 때부터 정치에 막 관심을 갖기 시작했었고, 사춘기 청개구리 정신도 발동 하고 해서 나는 유세장 맨 앞자리에 앉아서 연설을 경청했다.


당시 김대중후보의 연설 중 대부분은 내가 학교에서 배운 것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운 주장들이었으나 곰곰 생각해 보니 모두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그러나 너무 파격적이어서 지금도 용기가 대단했다고 생각하는 주장은 그의 예비군 폐지 공약이었다. 그는 당시 예비군 폐지 공약을 대단히 중요한 비중으로 강조했다. 예비군을 폐지해도 충분히 북한의 공격을 막아 낼 수 있다는 것이었다. 68년 울진 삼척에 북의 무장공비가 난입, 온 나라가 뒤집어졌던 기억이 생생한데 몇 년도 지나지 않은 상태에서 감히 그런 주장을 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당시 박정희 독재자의 부정선거 만 자행되지 않았더라면 김대중후보가 승리했을 것이라는 분석도 있는 것을 봐서 그가 중요하게 내세웠던 예비군 폐지 주장은 국민들에게 얼마간 설득력을 얻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옳고 그름을 떠나서 나는 우선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눈치 보지 않고 당당하게 주장하는 그의 용기가 존경스러웠다. 진보정당이라고 하는 민주노동당도 2002년부터 예비군 폐지를 주장하고 있지만 문건에 만 있지 사실 지금까지 전혀 중요하게 취급하지 않고 있었던 사안 아니었던가 ?


평화와 통일은 진보의 선차적 과제다.



DJ 가 진보정치를 했는가 안했는가를 판단하려면 우선 한국사회에서 진보란 무엇인가라는 개념정리부터 똑바로 할 필요가 있다. 6,25 전쟁 이후 9번이나 전쟁직전 상황까지 갔던 것에서 보는 것처럼 전쟁 가능성이 항상 엄존하고 있는 세계 유일 분단국가에서 ‘분단의 모순’은 남한의 정치경제사회에 규정적 역할을 하면서 한국사회 발전에 결정적 장애가 되고 있다. 이런 점에서 평화와 통일의 문제는 진보의 으뜸가는 과제이며 우선적으로 해결해야 할 과제임이 분명하다.


통일 없는 평화는 적어도 한국 사회에선 허구다. 평화와 통일은 당면해서 하나의 통일된 과제이다. 통일은 필요 없다는 일부 철부지 같은 자들이 진보적 지식인처럼 행세하고 있다. 말로는 통일을 이야기 하나 초등학교 교과서 수준의 왜곡된 반북의식에 사로잡혀 실제로 통일에는 관심이 없고 통일운동의 ABC도 모르면서 진보를 자처하는 반쪽짜리 지식인들이 상당히 있다. 이들의 특징은 유럽과 러시아 역사는 열심히 공부하면서 특히 1945년 분단전후사에 대한 인식은 유치할 정도다. 북은 실사구시에 입각한 과학적 탐구의 대상이 아니라 비난과 조롱의 대상일 뿐이다.


두 번째로 중요한 진보의 덕목은 이 땅의 대다수 국민을 차지하고 있는 노동자 농민 자영업자 등 민중들을 무한히 사랑하고 신뢰하면서 이들을 중심으로 이들을 주인으로 모시고 정치를 하는 것이다. 민중들의 정치적 권리를 보장하고 이들이 인간다운 생활을 영위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는 것이야말로 진보정치의 핵심이라 할 것이다.


남미의 알바 회원국들 끼리의 합의사항 중에 각국의 노동운동, 농민운동, 학생운동 등을 장려하고 지원한다는 항목이 있다. 또한 회원국 사이의 무역의 목표는 자본가들의 이윤추구가 아니라 민중들의 행복한 생활에 기여하는 것이다 라고 하면서 각국의 무상의료, 무상교육을 실현하기 위해서 서로 노력한다고 하고 있다. 이러한 것들이 바로 진보의 정수가 아니겠는가 ?


특히 1990년대 이후 미,영을 중심으로한 신자유주의세계화가 한국사회를 전면적으로 장악하기 시작하면서 외국금융독점자본들과 투기자본들이 증권시장( 재벌들 붙박이 주식 이외에현재 70% 외국 차지), 주요 은행, 기간산업,대기업 등 알짜배기 회사들을 적대적 M&A로 합병하는 등 한국 주요 경제부분을 지배적으로 포섭하기 시작 한다.-그렇다고 한국의 제조업이 모두 완전 장악되었다는 것은 아니다. 자동차, 반도체, 조선, 철강, 석유화학, 전기전자 등의 제조업은 상대적으로 독립성을 갖고 높은 수준에서 발전해왔다. 그러나 재벌이 주도하는 이들 산업이 과연 한국의 민중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 살펴볼 때 이는 주식의 4-50%를 차지하고 있는 외국인 주주를 위한 영락없는 매판재벌 그대로다.- 결국 이 땅에 주주자본주의가 정착되었다. 이리하여 단군이래 처음으로 비정규직이 발생했고, 중소기업은 몰락하고 대기업은 국내 보다는 주로 해외에서 사업(고용)을 확장해나가고 있다. 청년 실업 등 고용 없는 성장이 지속되고 있으며 중산층은 붕괴되면서 빈부격차는 날로 심화되고 있다. 1997년 국가부도 이후 계속 민생이 도탄에 빠지고 있는 것이다.


세 번째로 중요한 진보의 문제의식은 미국에 대한 태도이다. 현대사를 정확히 공부하면 분단의 주범은 미국이다. 소련을 똑같이 거론하는 것은 근거 없는 비겁한 양비론일 뿐이다. 휴전협정을 휴지조각처럼 만든 것도 미국이고 그 후 한반도에서 끊임없이 전쟁위기의 상황을 주도한 것도 대부분 미국이다. 이는 남미의 여러 나라와 베트남에서 최근의 이라크와 아프카니스탄 침공에서도 실감할 수 있는 것이다. 한반도에서 분단을 유지강화 하고 평화를 위협하고 있는 주범은 지금까지 미국이었다.


더욱이 1990년대 초반 미국은 금융독점 자본들이 주도하는 ‘워싱턴 컨센선스’로 무장하고 다른 나라들에 대한 경제침탈과 정치적 개입을 새로운 방식으로 자행하기 시작한다. 신제국주의가 등장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앞에서 서술한 신자유주의세계화의 정체다. 신자유주의세계화의 주범도 미국이라는 것이다.


한국사회에서 분단과 전쟁의 주범이며 신자유주의세계화(신제국주의)의 주도자인 미국에 대해서 굴종하지 않고 올바르게 비타협적으로 실천하는 것이야말로 진보의 또 하나 중요한 덕목일 것이다. 마지막으로 자연과 함께 공생하며 지속가능한 발전을 도모하는 생태환경문제도 21세기 중요한 진보의 덕목일 것이다.


DJ는 진보였나요 ?
김대중은 해방정국에서 여운형 선생 건준에서 일하면서 민족주의적 사상을 습득한 것 같다.


그는 자서전에서 "당시 신탁통치를 조건부로 받아들였다면 분단을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라고 술회하는 것을 보면 해방 전후 정국을 정확히 판단하는 통찰력이 보인다. 또한 그는 평생 김구선생을 극진히 존경하는 모습을 보였는데 김구선생이 왜 평양에 갔고, 왜 죽음을 당해야 했는가를 고민하면서 민족주의적 경향을 더욱 강하게 갖게 되었던 것 같다.


6.25 전쟁시에는 중소자본가로서 북쪽 인민군에 의해서 죽음의 직전상황까지 가게 되었다. 당시 그는 전투적인 민족주의자는 아닌 것 같았다. 그는 60 년대 노동운동에 관한 글을 쓰는 등 노동운동에 관심이 많았으나 그가 노동자 등 민중을 중심으로 세상을 바라보거나 그들을 중심으로 정치를 할 생각은 처음부터 그리고 운명할 때까지 없었던 것 같다. 다만 노동운동과 농민운동에 민주주의 수호 입장에서 또한 중소자본가 입장에서 우호적인 입장을 가진 정치인 이었던 것은 분명한 것 같다.


4.19 이후 장면 정권의 핵심이었던 그는 그의 자서전에서 “ 5,16 군사쿠테타를 당시 장면씨가 제대로 대처했으면 저지할 수 있다”고 하는 주장을 한다. 순진할리 없는 김대중의 이런 주장은 미국에 대한 그의 태도를 다시 엿볼 수 있다. 자선전 전체에서 대통령 당선 후 방미시 부시가 무례했다는 지적이 나온 것 이외엔 미국을 비판한 것은 없다.


김대중의 위대한 업적은 아무래도 박정희-전두환 독재정권과의 목숨을 건 비타협적이고 전투적인 민주화 투쟁일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재미있는 것은 독재를 생산하고 지원했던 미국이 김대중의 목숨을 구했다는 것이다. 차후 김대중 선생의 미국에 대한 태도를 이해하기 위해서도 눈여겨 볼 대목이다. 어쨌든 파쇼와 독재에 반대하고 민주주의를 사랑하는 것은 진보의 기본적인 요건이다. 독재시대에 민주주의를 위해 싸우는 정치인은 진보의 전부는 아니지만 진보의 한 부분을 분명 차지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 옳다. 진보는 일정 조건(Condition)속에서 상대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독재시대에 반파쇼연합이 진보진영의 당면과제로 중대하게 설정되는 이유다.


김대중은 1992년 대통령 선거에 실패하면서 급격히 보수화 되어간다. 전국연합과의 정책연합에 실패하면서 -전국연합이 선거에 오히려 역기능을 했다고 주장한다- 진보진영과 거리를 두고, 김종필 등 보수세력 쪽으로 급격히 경도되어간다. 진보진영과의 연대를 거부하기 시작한다. 1997년 권영길 후보의 존재이유가 여기에 또 있었던 것이다.


IMF와 김대중
그는 IMF의 요구를 그대로 받아들였다. 땅을 치고 통곡할 비정규직 제도가 도입되었다. 정리해고를 입법화하고 파견법을 통과시켰다. 노동조합운동의 근저를 뒤흔드는 폭거였고, 노동자 민중들의 생활을 도탄에 빠뜨리는 만행이었다. 노조의 정치활동을 일부 보장하고 교원노조를 합법화하고 공무원직장 협의회도 설치하는 등 노동기본권을 확대한 측면도 일부 있었으나 이는 앞의 탄압에 비하면 새발의 피였다.


브라질 룰라도 국가부도 상태에서 대통령이 되어 의석수 소수 정당이라는 불리한 조건에서 자본유치를 위해 일정하게 외래 금융독점자본및 보수세력과 타협을 했지만 결코 민중들의 생활을 도탄에 빠뜨리진 않았다. 그의 재임 중에 오히려 서민들의 생활은 날로 향상되어 갔고 결국 재선되었으며, 현재 브라질 국민들 80% 이상의 지지를 받으면서 브라질노동자당의 정권재창출을 눈앞에 두고 있다.


1997년 한국의 국가부도 사태와 미국의 연관성에 대해서 누구 보다고 잘 알고 있을 김대중은 미국이 주도하는 국제통화기금 지시에 충실히 따랐다. ‘고용 없는 성장’ ‘외국금융자본의 한국경제 장악’ ‘빈부격차 강화’ 등 신자유주의세계화를 한국 땅에 깊히 심어 놓은 것이다.


6.15와 김대중
나는 김대중의 가장 위대한 업적은 북을 방문해서 6.15 공동선언을 만들어 낸 것이라고 생각한다. 6,15 공동선언은 7천만 민족의 행복을 위해서 우리 모두가 소중하게 붙들어 잡고 나아갈 결정적인 푯대이기 때문이다. 풍부한 지식으로 세계를 항상 명증하게 인식하고 있었으며, 민족주의적 경향을 체내에 간직하고 있었고, 국내외 정세에 대해서 혜안과 통찰력이 번득였던 그가 겹겹이 쌓여가는 국내외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서 돌파구로 선택했던 것이 6,15 공동선언 이었던 것 같다.


북의 주요 해군 부대가 있었던 금강산이 열렸고, 마찬가지로 북의 핵심 군대가 있었던 개성공단이 설립되었으며 남북 교류와 협력이 본격화 전면화 되었다. 국민들의 열화같은 지지가 뒤따랐다. 그러나 그는 6,15 공동선언을 민중을 주인으로 해서 민중과함께 하는 평화통일 운동으로 발전시켜 내지 못했다. 남북이 합의한 통일방안을 이해하는 국민들은 많지 않았다. 한나라당의 퍼주기론에 국민들은 흔들렸다. 결정적으로 그는 부시의 방해와 간섭을 막아내지 못했다. 자선전에서 유일하게 미국을 비판한 대목이 2001년 방미시 부시가 무례했다는 부분이다.


“기자회견장에서 부시는 입장을 완전히 바꿨고, 내 답변을 가로챘으며, 심지어 나를 디스 맨(This man)이라 호칭하기도 했다.......그가 아들뻘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리고 부시정부와의 관계가 앞으로 순탄치 않을 것 같았다. 불길했다” -자서전, 416쪽-


“대통령선거에서 고어민주당 후보가 당선되었다면 ...... 한반도에 전혀 새로운 역사가 펼쳐졌을 것이다” - 자서전, 381쪽-


부시는 북을 악의 축으로 규정했고, 북과 핵 전쟁을 불사하는 전쟁계획을 수립해 나갔다. 북은 미국에게 불가침 조약을 맺자고 주장했고 미국이 이를 계속 거부하자 결국은 핵실험을 강행한다. 한나라당 사람들은 햇볕정책이 북의 핵실험을 촉발시켰다고 하는데 이는 거짓말이다. 부시의 대북 붕괴전략과 햇볕정책 무산 정책이 북의 핵실험을 불러온 것이었다.


머리는 진보에 가까웠으나 결국 보수로 마감한 DJ
그는 자서전에서 87년 김영삼과의 단일화를 위해서 자신이 양보했어야 했는데 그것을 하지 못한 것을 후회하고 있다. 본인의 잘못을 인정한 것이다. 당시 두 김씨가 단일화 했다면 아마 우리 역사는 지금쯤 모든 면에서 대단히 전진하고 있을 것이다. 그는 또한 70년대 대중경제론에서 ‘노동 3권의 중요성과 민족경제’ 대해서 설파하고 있었다.


국민승리 21 집행위원장을 하고 있을 때다. 김대중 대통령이 “독일식 정당명부제를 해야 한다” 고 주장하고 있지 않은가? 즉각적으로 환영 논평을 낸 기억이 난다. 그러나 말 뿐이었다. 그 이상은 없었다. 이 이외에 그가 평생 한 말들과 주장들을 분석해 보면 그의 머릿속에는 진보의 덕목들이 분명 존재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의 재임 기간 중 절차적 민주주의는 한결 전진했고, ‘생산적 복지’라는 한계 속에서 나마 복지의 기초 틀을 마련하려 애썼고, 무엇보다도 2002년 월드컵 시 ‘붉은 악마’의 출현에서 보듯이 반공반북이데올로기를 완화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그러나 결국 그는 진보를 실천하지 못했고, 거역했으며 포기했다. 마지막 몸부림이었던 6.15 공동선언조차도 제대로 이행하지 못했다.


한국 땅에서 미국의 지배와 간섭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자가 진보를 실천하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 했을 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