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따라 넘어가는 삼각산 우이령
유 순 엽
배산임수의 명당도시이자 대한민국의 수도인 서울에서, 삼각산은 한강과 더불어 과거에는 국가의 요충지였고 현재에는 수도권시민의 오랜 쉼터로 자리 잡았다. 산수(山水)와 가까이할 수 있는 천혜의 환경은, 갑갑한 도시에서 벗어나지 않더라도 “지자요수인자요산”(知者樂水仁者樂山)이라는 공자의 말씀을 충분히 실감하게 도와주었다.
오래전부터 사람들은 커다란 화강암 산봉우리와 수려한 산세를 자랑하는 삼각산을 찾아서 모여들었다. 2003년에는 명승 제10호로 지정되며 명실상부하게 명산의 반열에 오른 삼각산이지만 아쉽게도 오를 수 없는 고개가 하나 있었다. 1968년 이후로 민간인의 출입을 엄격히 통제한 삼각산 우이령, 덕택에 태곳적 생태계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길이 올 7월 처음 개방되었다. 인터넷으로 탐방을 신청하고 예약확인증과 신분증을 지참해야 하는 등, 여느 곳과는 다른 다소 번거로운 과정을 거쳐야 했지만, 수고해 얻을수록 절실함은 큰 법이었다.
아침 일찍 배낭에 쌍안경과 도시락을 챙겨 넣고 우이령으로 떠났다. 지하철을 타고 구파발역에 내려서 버스로 갈아타고 30여분을 이동한 후, 경기도 양주시 장흥면에 있는 교현탐방지원센터에 도착했다. 여기서 부터 서울시 강북구 우이동까지 4.5km남짓 되는 길, 삼각산과 도봉산의 골짜기를 이루는 우이령길의 시작이었다.
우이령(牛耳岺)의 뜻은 소귀고개이다. 특별한 이름에는 유래가 있는 법, 우이령의 건너편 도봉산 자락위에는 소의 귀처럼 생긴 바위가 있어서 오래전부터 그렇게 불렸다고 한다. 우이동이라는 지명도 이 바위로 인해 생겨났다.
가을의 산 공기는 제법 서늘했다. 벌써부터 느껴지는 산기운이 느슨했던 정신을 일깨우고 독려했다. 걸음을 디딜 때마다 발바닥을 타고서 흙길의 질감이 몸으로 전해졌다. 좀처럼 걸어보지 못했던 부드럽게 다져진 오솔길이었다.
계곡사이를 흘러가는 물소리가 귀를 간질였다. 수량(水量)에 따라 촬촬촬, 졸졸졸 단음의 가락을 끊임없이 토해냈다. 듣고 또 들어도 지루하지 않은 자연의 소리였다. 계곡물에 손을 적실 수는 없었지만, 소리만으로도 마음까지 깨끗이 정화됨을 느꼈다.
정연하게 늘어선 오봉(五峰)안에는
자연의 신묘한 조화로움이 숨어있다
올라갈수록 길을 따라 펼쳐지는 절경이 눈앞에 나타나면, 걸음을 멈추고 한참을 바라봤다. 입간판과 이정표로 도배된 평지에서는 찾을 수 없는 풍경을 마주하니, 그동안 나는 무엇을 바라보며 살아왔나 싶었다. 기이한 모양의 오봉(五峰)이 보였다. 거대한 다섯 봉우리에 하나씩 얹힌 바위는, 누군가가 가지런히 정렬해 놓은 것 마냥 규칙적인 배열을 하고 있었다. ‘과연 오봉에는 어떠한 사연이 숨어있을까?’ 이 땅의 선조들은 자연이 만든 오봉을 보고 후세에 이야기를 남겼다. 이 근방 한 고을에 총각 오형제가 살았는데, 원님의 외동딸에 장가들기 위해 통 큰 시합을 벌였다고 한다. 오봉능선을 마주보는 삼각산 상장능선에 있던 다섯 바위를 누가 멀리 던지나 겨뤘다는 것이다. 웃음이 절로 나오는 이야기 속에는 오봉의 탄생의 비밀이 담겨있었다. 화강암으로 이뤄진 회색봉우리는 햇살을 맞으며 하얀빛을 발했고, 나는 눈에서 망원경을 떼지 않고 반짝이는 빛들을 바라봤다. 주위의 단풍과 어우러져 더욱 황홀한 풍취를 자아내는 오봉이었다.
나무로 빽빽이 둘러싸인 우이령길에서, 사고와 인식은 점점 자연을 닮아갔다. 일상처럼 시간에 쫓겨 빨리 걷지 않아도 되었다. 느리게 걷는 것만으로 평화로웠다. 산의 소리와 향기에 익숙해질수록 몸도 마음도 가벼워졌다. 초록의 생명을 하나하나 관찰하면서 그렇게 나는 산의 일부분이 되었고, 산은 미동도 없이 나를 품에 안았다. 이렇게 산길을 걸으며, 잠시나마 은자(隱者)의 기분에 취했다. 삼각산이 그려낸 산수화를 감상하고, 길옆으로 핀 야생화를 바라보며 걷는 길은 아름답게 이어졌다.
그런데 차량은물론 자전거의 출입도 금지된 우이령길에, 허가받은 차량이 유유히 지나갔다. 인적 드문 산속의 적막을 깨며 군용차는 위로 사라져갔다. 우이령의 북쪽인 교현리에는 군부대가 경계를 하고 있고, 남쪽인 우이동에는 전경부대가 일몰 후 출입을 감시하고 있다. 우이령길의 시작과 끝을 군인과 경찰이 나눠지키고 있다. 우이령길은 최단시간에 양주와 서울을 통하는 길이다. 빠른 만큼 군사적인 중요도가 높기 때문에 지금도 이곳엔 유격장, 사격장등의 시설이 있었다.
그러나 우이령길이 지난 41년간 금단(禁斷)의 길이었던 이유는 비단 지리적인 요인만은 아니었다. 1968년 1월21일 밤, 북한의 군인들이 넘어와 청와대습격을 시도했다. 다행히 미수로 막을 내리기까지 군경과 민간인에 많은 사상자를 남겼다. 우이령은 그들의 침투로로 이용되었고, 그 때문에 개방되기까지 줄곧 역사의 뒤안길로 남았다. 
고개꼭대기에 세워진 대전차장애물에는
세월이 흘러 검버섯이 피어있다
소귀고개를 산바람이 훑고 지나갔다. 정겹고 정다운 이름을 가진 고개위에는 군에서 설치한 대전차장애물(對戰車障?物)이 세워져있었다. 콘크리트로 만들어진 인공물은 유사시 무너뜨려 적 탱크의 진격을 막기 위해 세워졌다. 그것은 암울한 분위기를 자아냈고 분단의 상처를 짊어진 듯 무거워보였다.
오르막길은 끝나고, 남은 것은 내리막길이었다. 올라오느라 허기진 배를 채우기 위해 자리를 잡고앉아서 집에서 싸온 도시락을 꺼냈다. 집에서 간단히 만들어온 주먹밥이 입으로 술술 잘도 넘어갔다. 기름진 음식이 아닐지라도, 산에서는 물도 달게 느껴질 만큼 모든 것이 맛있었다. 산중진미(山中眞味)를 끝내고 소화도 시킬 겸해서 좀 더 앉아 천연색단풍을 구경했다. 수풀사이로 재잘재잘 지저귀는 산새울음이 들려왔다. 제집 안방처럼 재잘거리는 녀석들이 즐거워 보였다. 우이동 방향에서 탐방객들이 올라오고 있었다. 사람들의 얼굴마다 기쁨이 가득했다. 산은 품안의 생명체 모두를 흥겹게 해주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땅은 하늘로 솟구쳐 오르고 내리기를 거듭하며 삼각산자락과 우이령을 만들었다. 그리고 봉우리마다 이름들을 가질 만큼, 사람들은 이곳을 무수히 넘어갔다. 조선시대 함경도의 선비들은 과거급제를 꿈꾸며 이 길을 걸었고, 6.25전쟁 때는 파주와 양주사람들의 피난길이었다. 그래서 우이령길은 자연과 인간이 함께 닦은 길이었다. 처음 와본 삼각산 우이령이 낯설지 않았던 것은 이곳에 얽힌 삶의 흔적이 곳곳에 뿌리를 내렸기 때문이었다. 나는 우이령의 과거를 더듬으며 길을 걸었다.
등줄기를 따라 흐르는 땀방울이 내의를 적시고 마르기를 반복했다. 이미 얼굴은 세수를 한 듯 변했지만 상쾌하고도 개운하였다. 삼각산에서 한나절동안 머물며, 나는 온몸으로 산에서 뿜어져 나오는 초록색 파장과 산속 모든 생물의 숨결을 맞았다. 마치 온몸을 치유한 것처럼, 가슴 가득히 깊은 행복이 차올랐다.
교현리에서 출발한 우이령길이 끝나고 있었다. 우이동에 가까워질수록, 뒤돌아보며 지금까지의 감상을 하나씩 되새겼다. 내려오는 길가에 소담히 자리한 야생화가 이리저리 몸을 흔들고 서있었다. 갸우뚱갸우뚱 거리며 끝없이 움직이는 앙증맞은 몸짓은, 바람결에 나에게 건네는 작별인사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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