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to be or not to be’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되었다 - 『햄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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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모두 누군가의 자식이다.
나도 한때는 오로지 부모님을 위해서 보란 듯이 떵떵거리며 출세하고 성공한 모습을 보이고 싶은 적이 있었고, 오로지 우리 부모님을 웃게 하기 위해서 새벽 찬 서리를 맡으며 공부해본 적이 있었고, 부모님 눈에 눈물 흘리게 하는 자라면 그 눈에선 피눈물을 뽑아주겠다고 결심한 적이 있었고, 부모를 사랑하는 것 이외에는 다른 인생의 기쁨도 의미도 몰랐던 적이 있었기 때문에, 햄릿에 대한 글을 쓰는 지금 맘이 이제는 연세가 많이 든 부모님이 계시는 고향으로 한없이 달려간다. 올봄엔 체리 나무를 심는다고 했던가? 고향의 은행을 보낼 테니 밤마다 일곱 알씩만 먹으라고 했던가? 의기양양한 부모, 행복에 가득 찬 부모, 나로 인해 긍지를 갖는 부모, 나로 인해 삶도 죽음까지도 헛되지 않은 부모, 만약 내가 그럴 수만 있다면, 할 수만 있다면, 내 존재 따위는 별 상관이 없다는 그 진심은 아직도 여전하지만, 그러나 나는 이제 그 시절들에 대해 형언할 수 없는 그리움과 슬픔을 느낀다. 내가 이제는 어린아이가 아니라는 것, 부모와 내가 각자의 삶을 살아낸다는 것, 아직도 내가 부모의 상처를 아물게 하는 게 아니라 부모가 내 상처를 아물게 하고 있다는 것. 부모에게 돌아가는 길이라 할지라도 그 길이 갈등 없는 일직선은 아니라는 것, 부모에게 일어난 불행이라 할지라도 원인을 있는 그대로 아는 것은 불가능할지도 모른다는 것, 이 모든 것들이 가슴을 찡하게 한다.
북구의 밤하늘에 울려 퍼지는 “누구요?”로 시작하는 『햄릿』의 초반부 매력은 내게는 유령의 존재에 있었다. 나에겐 이런 단편소설 같은 밤이 있었다. ‘격세유전’이란 걸 처음 알게 되었을 때 일인데, 그날 밤 엄마와 마주앉은 나는 이런 식으로 말했던 것 같다.
“모두 다 죽어서 유령이 되는 게 아니라면, 그렇다면 유령도 격세유전이 되는 거야? 엄마 또는 내가 유령이 되는 거야? 그렇다면 엄마가 유령이 되는 게 좋겠어. 우리가 계속 만날 수 있게. 나는 아직은 죽어서도 만나고 싶은 사람이 없거든.”
이 이야기를 할 당시의 나는 아주 어렸는데, 이 말을 마치자마자 내 말에 내가 지레 겁을 집어먹고 하얗게 질려 버렸었다. 왜냐하면 그 말을 마치고 나자 내 눈에 비치는 엄마의 모습은 더 이상 과거의 엄마가 아니라 예전엔 내가 몰랐던 서늘하고 성숙하고 아름다운 여인, 그리고 더 중요하게는 언젠가 죽고 말 아름다운 여인으로 보였고, 나는 그런 엄마의 죽음 앞에 아양을 떠는 철부지가 되어버린 것 같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나는 갑자기 엄마의 인생 전체를 어깨에 멘 기분이 들어버렸다. 누군가의 죽음을, 그것도 사랑하는 누군가의 죽음을 연상한다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책임감과 죄책감을 안겨 주었다. 그런데 나중에 몇 년 후에 처음으로 『햄릿』을 읽었는데 햄릿이 유령을 만나는 장면에서 유령이 되고 말고가 아니라 유령을 만나고 말고가 더 큰 문제란 걸 알게 되었다. 유령을 만난다는 것은 피와 목숨과 충성심을 요구하는 일생일대의 모험에 접어든다는 말이다. 그런데 유령을 만나 진실을 알게 되면 우리는 그 부름에 꼼짝없이 응해야 할까? 알게 된 대로, 혹은 명령받은 대로 행해야 할까? 그렇다면 이럴 경우 인간의 자유는 어디로 갈까?
덴마크의 왕자 햄릿은 아버지가 죽고 어머니가 숙부와 결혼해 버리자 (그 속도가 어찌나 빨랐던지 햄릿의 표현을 따르면 겨우 두 달, 아니 한 달도 못 되어. 눈물의 소금기가 마르기도 전에……. 그러니 약한 자여 그대 이름은 여자로다!) 깊은 슬픔에 빠져 버린다. 그는 어마마마에게, 자신에게는 검은 외투나 상복 같은 눈에 보이는 겉모습 이상의 그 무엇이 있다고 말한다. 소설 초반부에서 햄릿의 진정한 속마음은 독백 속에서나 나온다. 어쩌면 햄릿은 타인 앞에서는 연기를 하고 속마음은 혼자 있을 때나 내비치는, 세계 문학사상 최초의 주인공일지도 모르겠다. 햄릿이 세상은 역겨운 것이라고, 숙부는 짐승이나 다름없다고, 엄마와 숙부는 상피붙었다고 속으로 생각하고 있을 때, 친구 호레이쇼가 나타나 유령의 존재에 대해 말해준다. 모두 다 유령이 되는 것은 아니지만 햄릿의 아버지, 덴마크의 왕은 유령이 되었던 것이다. 모두 다 유령이 되는 게 아니라면 죽은 왕은 왜 평온하게 레테의 강을 건너가지 않은 걸까?
햄릿은 유령이 뭔가 원하는 게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마침내 유령을 만난 햄릿은 “진실을 알려주면 사랑의 상념처럼 빠른 날개로 복수에 돌입할 것입니다”라고 유령에게 맹세한다. 그러자 유령은 어느 평화로운 오후 자신의 정원에서 누구의 손에, 어떻게 쥐도 새도 모르게 살해당했는지를 햄릿에게 일러준다. 그 말을 들은 햄릿은 ‘인간의 철학으론 꿈도 꾸지 못할 일이 천지간엔 많다’고 개탄하며 자신은 바로 뒤틀린 것을 바로 잡으려고 태어났다고 생각한다. 여기까지는 햄릿의 운명은 고대의 비극적 영웅들과 큰 차이가 없어 보인다. 햄릿은 신화 속 영웅들처럼 단숨에 칼을 뽑아들면 된다.
그런데 그 대신에 잠깐! 우리 햄릿은 유령의 말이 맞는지 확인하고 싶어 한다. 우리는 ‘이 왕자는 보통 영웅 왕자랑은 좀 다른 것 아닐까!’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세상에 진실을 확인할 궁리를 하는 영웅이 어디 있단 말인가? 궁리만 하다가 우유부단해지는 영웅이 어디 있단 말인가? 게다가 세상은 관점에 따라 좋기도 하고 나쁘기도 하다고 말하는 영웅이 어디 있단 말인가? (햄릿은 덴마크를 감옥으로 생각하고 그 자체로 좋거나 나쁜 것은 없고 모든 것은 생각하기 나름일 뿐이라 말한다, 그리고 ‘호두알 속에 갇혀있다 해도 자신을 무한 공간의 왕’이라 생각할 수 있지만 지금은 악몽 때문에 그것이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그는 그러니까 관점에 대해 말하는 최초의 왕자이기도 하다.)
그는 미친 척 연기하기 시작했고 연인 오필리어와의 사랑도 깨트려 버린다. 햄릿은 책을 읽으며 무대에 등장한다. 그렇다면 과연 그때 그가 무슨 책을 읽었을까? 그리스 로마 신화의 아가멤논과 그의 아들 오르스테스(아가멤논의 아내와 정부는 트로이에서 돌아온 아가멤논을 살해하는데 아가멤논의 아들 오르스테스는 다시 자신의 어머니와 어머니의 정부를 살해한다) 이야기 같은 게 아니었을 건 분명하다. 현대의 햄릿이라면 내 생각엔 까뮈나 베른하르트를 읽을 수도 있을 것 같다. 어찌 되었건 그는 덴마크에 들른 극단의 연기를 잠깐 본다. 그는 배우들을 보내고 나서 혼자 남자 이런 생각을 한다.
아, 나는 얼마나 못돼먹고 천박한 놈인가? 이 배우는 단지 이야기 속에서, 비탄이란 꿈속에서, 영혼에게 상상을 강제로 주입시킨 결과, 얼굴은 온통 핼쑥 눈물은 글썽, 산란한 시선에 목소리는 잠기고 모든 정신작용에 제 맘대로 형상을 부여함은 놀랄 일이 아닌가? 또 이 모두가 있지도 않은 것 때문에! 헤쿠바 때문에! (*헤쿠바: 살해당한 남편을 둔 과부) 그에게 헤쿠바, 그녀에게 그가 뭐기에 그녀 때문에 그가 울어? 그는 어떡할까? 그가 만약 내가 지닌 격정의 동기와 계기를 지녔다면? 그는 무대를 눈물로 가득 채우고, 끔찍한 대사로 관객들의 귀를 찢어놓으며, 죄인은 미치게 무죄인은 섬뜩하게 만들고, 무식꾼을 혼동시키며 눈과 귀의 기능을 정말 혼란시키리라 그런데 난 무디고 멍청한 놈으로 기둥서방처럼 의기소침하여, 내 명분에는 무심한 채 한마디도 못 한다, 못 해. 그의 왕국과 가장 귀한 생명이 흉측스레 파멸당한 그런 왕을 위해서도. 나는 겁쟁이인가?
그는 자신은 연극배우보다도 못한 놈이라고 생각하는데 이어서 누가 자신을 겁쟁이 또는 악한 이라 욕하며 모욕해도 마땅히 감수해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왜냐면 자신은 쓸개가 빠진 놈, 못난이. 고귀한 부친이 살해당했는데도 말로만 가슴을 비우는 역겨운 놈이기 때문이다. 그는 수치심에 사로잡히고 깊은 자기 경멸에 빠져 버린다. 한시바삐 복수의 의무, 사명을 수행해야 할 그가 경멸에 빠져 버린 것이다. 그래서 햄릿은 이럴 게 아니라 머리를 굴려보자고 생각한다. 어떻게?
배우들에게 아버님의 살해와 엇비슷한 연극을 삼촌 앞에서 시켜야지. 표정을 살피고 아픈 데를 찔러봐서, 만약에 움찔하면 내 할 일은 알고 있다. 내가 본 혼령은 악만지도 모른다. 그리고 악마는 제 모습을 보기 좋게 위장할 힘이 있지. 맞아, 또 허약함과 우울증을 빌미 삼아 심기가 그럴 땐 악귀가 큰 힘을 쓰니까 나를 속여 파멸시킬 수도 있어. 좀 더 설득력 있는 증거를 잡으리라. 연극이 왕의 야심 사로잡을 바로 그런 수단이다.
유령이 존재하든 말든, 유령이 나를 속이든 말든 나는 생각한다, 나는 도모한다, 라고도 읽히는 이 장면은 내게 묘하게도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데카르트의 말을 생각나게 한다. 그런데 유령의 말이 참인가 거짓인가를 따져보고자 머릴 굴린 뒤에 햄릿이 내뱉는 말이 바로 저 유명한 ‘to be or not to be’이다. ‘to be or not to be’는 도대체 무슨 말일까? 이 무게를 지고 사느니 이것저것 다 잊어버리고 자살해 버리면 속이 후련할 텐데, 라는 바로 그런 뜻일까? 아니면 죽지 못해서 산다는 말일까? 아니면 더한 자포자기와 절망감의 표현인가? 그 뒤에 바로 이어지는 말들은 바로 이런 대사다.
어느 게 더 고귀한가, 난폭한 운명의 돌팔매와 화살을 맞는 건가? 아니면 무기 들고 고해와 대항하여 싸우다가 끝장을 내는 건가, 죽는 건 자는 것뿐일지니, 잠 한번에 육신이 물려받은 가슴앓이와 수천 가지 타고난 갈등이 끝난다 말하면, 그건 간절히 바라야 할 결말이다. 죽는 건, 자는 것, 자는 건 꿈꾸는 것일지도. 아 그게 걸림돌이다. 왜냐면 죽음의 잠 속에서 무슨 꿈이 우리가 이 삶의 뒤엉킴을 떨쳤을 때 찾아올지 생각하면 우리 멈출 수밖에. 그게 바로 불행이 오래오래 살아남는 이유로다. 왜냐면 누가 이 세상의 채찍과 비웃음 압제자의 잘못, 잘난 자의 불손, 경멸받는 사람의 고통, 법률의 늑장 관리들의 무례함, 참을성 있는 양반들이 쓸모없는 자들에게 당하는 발길질을 견딜 건가? 단 한 자루 단검이면 자신을 청산할 수 있을 진데 누가 짐을 지고 지겨운 한 세상을 투덜대며 땀 흘릴까?
아버지의 복수란 장엄한 주제 앞에서 왜 햄릿은 ‘죽을까 말까?’라고 생각했을까? 아마 우리 시대의 햄릿이면 ‘아버지의 복수를 하는 것이 선인가? 악인가? 어느 게 더 윤리적인가, 정의로운가?’라고 물을지도 모르겠다. 혹은 법 시스템 안에서 복수를 행할 것인가? 청부 살해업자를 고용해 사적으로 복수를 행할 것인가? 고민했을지도 모르겠다. 선악 대신에 사느냐 죽느냐를 묻는 햄릿은 유령의 명령을 더 자신의 문제로 받아들였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 시절의 햄릿의 방황은 내게 선악의 문제가 아니라, 어떤 무력감 앞에서도 죽어버리지 않을 용기, 절망하고는 있지만 그렇기는 하지만 또 한편 절망하지 않을 방법은 없을까 생각하는 바로 그런 성찰, 더 궁극적으로는 자유의 문제를 생각하게 한다. 자유의 관점에서 보자면 어쩌면 우유부단한 사람, 결국에는 의무를 거부하는 비겁한 사람이 되는 게 더 많은 것을 이야기해줄 수도 있다. 밤낮으로 머릿속으로 그려는 보지만 결코 발생시키지 않을 사건들을 우리 모두 한 가지씩은 가지고 있다. 내가 눈을 감고 생각하길 멈출 때 일어날 수 있는 일들을 우리는 짐작도 할 수 없다. 삶도, 복수도, 죽음도 진정으로 자유로운 경우엔 아무런 가치가 없을 수도 있다. 우리가 존재와 무 사이를 끝없이 떠도는 것처럼 뭔가를 끝없이 유보시키는 것은 한 가지 생각을 하는 동안에 동시에 다른 생각을 하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한 가지 일이 일어나는 동안 동시에 다른 일이 일어나는 세상사처럼.
그런데 햄릿의 생각 중 삶과 죽음에 대한 생각은 많은 생각거리를 던져둔다. 햄릿에게 두려운 것은 죽음이 아니었다. 햄릿에게 두려운 것은 삶이었다. 햄릿에게 삶은 죽음 뒤에 그 꿈속에서 나올까 두려울 정도로, 그게 두려워 죽지 못할 정도로 어두운 것들의 총합이다. 그런 것이 죽음의 꿈이라면 죽음은 우리가 익히 희망하는 그대로 지고의 평화로운 순간이 될 수 없다. 그래서 우리도 살아남을 수밖에 없다. 햄릿의 생각은 이렇게 정리할 수도 있지 않을까?
불행이 (행복보다) 오래오래 살아남는 이유? 행복이 아니라 불행이 죽음을 꿈꾸길 멈추게 하기 때문에.
우리가 모욕당해 마땅한 비겁한 자인 이유? 자유를 꿈꾸기 때문에. 생각하길 멈추지 않기 때문에.
그런데 그가 받은 모욕들, 불행한 일들은 (압제자의 잘못, 잘난 자의 불손, 경멸받는 사람의 고통, 쓸모없는 자들에게 당하는 발길질) 우리에겐 너무나 친숙하다. 햄릿과 이유가 같든 같지 않든 까뮈의 말대로 매순간 우리에게도 삶을 끝장내도 좋을 (혹은 무방한) 이유는 있다. 그런데 살아가지 않아도 되지만 죽지 않고 살아 있는 순간부터 우리는 숭고한 것과 마찬가지로 우스꽝스러운 것 또한 존중하지 않으면 안 된다.
베른하르트의 단편집 『모자』 중 「야우레크」에 나오는 남자 주인공의 어머니는 자살을 했다. 어머니의 자살은 외삼촌과 관계가 있다. 외삼촌은 야우레크 탄광의 운영자인데 주인공 남자는 그 탄광에서 회계사로 일하게 된다. 그는 외삼촌을 증오하고 자신의 어머니를 파멸시킨 외삼촌을 똑같이 파멸시키고 싶어 한다. 외삼촌에게 대항할 온갖 수단을 찾는 것이 아니라면 무엇 때문에 그의 탄광에서 일해야만 하는가? 하지만 사실은 그가 하는 일이란 고작, 일어나야만 하는 일이 언젠가는 과연 일어나게 될까 거의 매일 밤낮으로 자문만 하고 있단 것이다. 그는 하루는 카드 놀이를 하고 하루는 이발소에 가고 매일 저녁 근무 시간이 끝나면 자신을 절망하지 않게 하는 어떤 일이 생기곤 하는 것에 안심한다.
나는 절망해야만 하고 사실 절망하고 있는데도 그리고 실제로 퇴근 후에 늘 내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릴 수 있는 일이 있기 때문에, 나를 기쁘게 만드는 일은 아니더라도 적어도 관심을 돌릴 수 있는 일이 있음을 알면서도 근무 시간이 끝날 무렵이면 늘 불안하다. 언젠가는 나를 기쁘게 하거나 단지 관심을 돌릴 수도 있는 어떤 일이 더 이상 생기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자신의 삶은 실제로 절망적인 삶이라는 사실에 대한 역겨움을 견뎌낼 수 있는 어떤 일을 기대하는 것, 절망하고 있지만 절망해서는 안 된다고 자신에게 말하는 것, 그러기 위해 늘 기분 전환이나 관심을 돌릴 만한 일을 준비하는 게 그의 일상이다.
지난 금요일엔 책을 한 권 샀고, 지난 화요일엔 영양가 있고 맛있는 음식을 사 먹었다. 편지를 쓰기도 하고 자연과학 공부를 하기도 한다. 곱셈과 나눗셈을 하기도 하고 심령술이나 지구 물리학 공부를 하면서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릴 수 있다. 독백을 하기도 한다.
그 결과 이 남자 주인공의 비극의 성격은 점차로 변해간다. 복수하지 못하는 게 비극이 아니라 야우레크 채석장 사람들과 잘 지내기 위해, 그저 그들을 웃길 궁리나 해야 하는 것이 비극이 된다.
그들은 내가 어떤 사람인지, 내가 왜 이렇고 왜 저렇지 않은지, 특히 내가 왜 여기 있는지에 대해 늘 나를 비난하는 것 같다. 하지만 사실 여기에서는 모든 사람이 모든 것에 대해 모두를 비난한다.
결국엔 복수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사람들을 웃길까를 더 고민하게 되는 주인공 모습. 그리고 숙부의 가슴에 칼을 꽂기 전에 ‘to be or not to be’를 고민하는 햄릿의 상황은 내게 까뮈의 이런 문장을 생각나게 한다.
우리의 삶에 대한 한 가지 흥미를 또 다른 가능성 쪽으로 옮기고 그리고 또 이 가능성에서 저 가능성으로 끊임없이 옮겨간다. 그칠 줄 모르는 믿음의 필요. 자신을 끊임없이 전방으로 투척하는 것, 이런 필요 불가결한 코미디를 우리는 오랫동안 쉬지 않고 연출할 것이다.
죽지 않고 살아있는 순간, 삶의 비장함은 더할 나위 없이 우리의 마음을 끈다. 절망적인 상황이지만 절망하지 않으려 애쓰는 사람 또한 우리의 마음을 끈다(그 방법이 우스꽝스러워도). 그래서 이 세계에서 햄릿은 신화를 깨부순 사람이자 우유부단함의 가치를 알려준 사람. 부여된 진실을 의무적으로 따르기보단 감당해 낼 수 있는 자기 역할을 구태여 찾으려 했던 착한 사람. 산 자와 죽은 자의 관계를 의심해 볼 필요가 있던 것을 알려준 사람, 자기 자신은 불완전하고 강력한 조건에 귀속되어 있다 하더라도 자기의 운명을 만들려 했던 연약한 사람으로 남는다. 그리고 그런 연약함이 마음을 끈다. 사소함과 아침에 눈을 떴을 때의 떨림, 막연한 고뇌, 막연한 예감들, 몸에서 떼놓을 수 없는 책 혹은 결코 만난 적 없는 연인처럼 마음을 끈다. 그래서 죽느냐 사느냐, 존재하느냐 마느냐의 ‘to be or not to be’는 내게는 삶과 강하게 연결되어 버린다. 죽음과 삶이 한 짝이 되어서 (불완전과 완전이 한 짝이 된 순간처럼) 결국은 더 나은 해결법, 더 나은 삶, 더 나은 나를 동경하게 만든다.
우리 도시의 한구석에선 매일 밤 누군가 자기만의 ‘to be or not to be’를 노래한다. 나 역시 즐겁게 우스꽝스럽게 ‘to be or not to be’를 노래한다.
우리를 난처하게 하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 앞에서 to be or not to be 치명적인 대가를 치러야 얻을 수 있는 가치 앞에서 to be or not to be 차라리 몰랐으면 좋았을, 숨 막히게 하는 진실 앞에서 to be or not to be 성급하게 결론을 내리고 싶지 않을 때도 to be or not to be 이런저런 할 일과 새로운 관심사를 찾아 헤맬 때도 to be or not to be 어두운 가슴 앞에서, 강렬한 긴장감 앞에서도 to be or not to be 결코 실현시키지 않을 야망 앞에서도 to be or not to be 불가능속의 가능을 생각할 때도 to be or not to be 고통과 고뇌들이 나를 만든다는 것을 어렴풋이 아는 밤에도 to be or not to be 나보다 더 나은 나를 동경할 때도 to be or not to be 아직은 살아 있는 내가 살아 있는 동안 변해야만 한다고 생각될 때도 to be or not to be
삶의 한쪽에 노래가 있을 때, 그 노래가 아무리 어울리지 않는 노래라 할지라도, 우리는 절망하지 않으려 애쓰는 중일 것이다. 덧없음 위에 드리워진 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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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좋아하는 사람이랑 수다떨기, 책에 나오는 남자주인공 사랑하기, 책에 나오는 여자주인공 따라하기, 책에 나오는 음료와 음식 먹어보기, 책에 나오는 음악 찾아듣기, 책이 알려주는 장소에 가보기, 읽었으면 행동하기 등 자칭 “책 행동학”(?)의 창시자이고 싶어한다.
“마치 사랑이 그렇게 하듯 인생의 우여곡절들을 무의미하게 만들고 덧없음이 착각인 것처럼 만들어주면서 내 속을 귀중한 실체로 채워주었다.” 프로스트가 『스완네 집 쪽으로』에서 말했던 이 문장의 주어는 사랑이 아니라면 책과 여행뿐이다. 신년엔 달빛 크로와상같이 부풀어오른 아름다운 다리를 보러가고 싶다. 신년엔 “자신을 돌보지 않는 아름다운 소녀가 바람속에 서있는 것 같은” 그런 도시들을 보고 싶다. 나 자신, 자신을 돌보지 않는 아름다운 소녀가 되어서 돌아오고 싶다.
채널예스에 연재했던 칼럼을 모아 ‘지상에서 가장 관능적인 독서기’ 『침대와 책』, ‘정혜윤이 만난 매혹적인 독서가들’ 『그들은 한 권의 책에서 시작되었다』를 펴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