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하반기 문화유산 답사기 은상 수상작]
고고한 어르신, 천자암 쌍향수를 뵙다
송 영 대
800세의 고고한 고고한 어르신, 천자암 쌍향수를 뵙다
<천자암 쌍향수. 보조국사와 담당국사의 전설이 깃들어 있는 곱향나무로 800년의 세월을 버텨왔다>
삼보사찰 중 하나인 순천의 송광사엔 늘 사람들이 북적인다. 훌륭한 스님들이 배출된 사찰이면서 천년을 이어온 대찰이기도하고, 또한 조계산을 등산하는 이들의 중요한 코스 중 하나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순천엔 송광사와 선암사라는 두 대찰이 조계산을 사이에 두고 자리 잡고 있기에, 등산객들은 산의 훌륭한 정취와 두 고찰의 고아함에 마음을 적시고 싶기에 먼 발걸음을 하는 것이리라.
순천 송광사로 들어가기 전 다들 누구나 한번씩 안내문과 안내도를 훑어본다. 답사객들의 눈길은 아득한 면모를 가진 송광사의 전경을 살펴본다. 하지만 이내 눈길은 오른쪽 윗부분에 자그마하게 그려진 나무로 옮긴다. 그 나무는 쌍향수라고 하는데, 배배 꼬인 생김새가 참 독특한 나무다. 이렇게 안내도에는 분명 쌍향수가 그려져 있지만, 아쉽게도 송광사 경내에선 어디에서도 쌍향수를 찾아볼 수 없다.
가을의 끄트머리에서 동장군이 고개를 까딱거리는 어느 날, 왠지 쌍향수를 찾아가고 싶어서 발걸음을 옮기었다. 쌍향수는 천자암에 있다. 천자암은 송광사에 딸린 자그마한 암자로 송광사와는 꽤 떨어져있다. 게다가 생각보다 천자암으로 가는 건 만만찮다. 송광사와 달리 대중교통편이 없기 때문에, 갈 수 있는 방법은 2가지뿐이다.
그 중 하나는 송광사에서 조계산을 등반할 때, 잠시 천자암을 들렸다 가는 것이다. 그러나 등산에 여념이 없고, 구태여 먼 길을 돌아가고 싶지 않은 이들은 가급적 이 코스로 발걸음을 옮기지 않는다. 또 다른 길은 별도로 천자암으로 가는 길을 따라 올라가는 것이다. 송광사로 가기 전 이읍리라는 작은 동네가 있는데, 이곳에서 천자암으로 올라가는 길이 있다.
마을이 있고 암자가 있어 길을 포장해 놓았지만 생각보다 가파른 오르막길이다. 그래도 이 좁은 길을 따라 쭈욱 올라가면 자그마한 주차장이 하나 보인다. 주차장이랄 것도 없이 작게 구색을 갖춘 정도이지만, 이 정도라도 답사객에게는 반갑기 그지없다. 하지만 주차장에서도 천자암까지는 걸어 올라가야한다. 하긴 뭐, 800세를 자신 어르신을 뵈러 가는데 오르막길이 얼마나 대수겠는가?
가파른 오르막을 오르긴 쉽지 않다. 하지만 바람에 쓸린 단풍들과 줄에 걸려 흔들거리는 연등을 보면 힘든 것도 서서히 잊힌다. 그렇게 열심히 오르면 암자가 올려다 보인다. 그리고 암자에 도착하면 나무아미타불이라 생겨진 비석이 먼저 답사객을 맞아준다. 나무아미타불. 합장을 하고 다시 올라가면 종루가 보인다. 종루 왼편의 나무엔 작은 감 같은 열매가 주렁주렁 달려있다. 고욤인가 싶은데, 팔을 아무리 뻗어도 잡아 따기엔 무리다. 문득 가지에 걸린 고욤들이 흡사 구름 몇 개 띄워놓고 실실 웃고 있는 가을하늘처럼 느껴진다.
법왕루의 아래쪽 자그마한 누문을 지나면 천자암이라는 편액이 걸린 법당이 보인다. 천자암은 작은 암자이기 때문에 여기에서 절의 경내가 다 보인다. 종무소와 요사채, 나한전과 멀찌감치 산신각이 보인다. 법당 뒤편에는 그토록 보고 싶던 쌍향수가 있지만, 이는 천천히 살펴보기로 한다. 그리고 주위를 둘러보며 상쾌한 공기를 마시며 속을 비워 채운다.
천자암의 오른편 끝 쪽엔 노란 화장실이 하나 있고, 그와 조금 떨어진 곳에 작은 케이블카가 하나 설치되어 있다. 케이블카는 아래에서 올라오는 물건을 받기 위해 설치한 것으로 보이며 내부에는 리어카도 비치되어 있다. 문명과 떨어진 듯 산속에 있는 작은 암자이지만, 생활을 영위하기 위하여 세상과의 물꼬는 한쪽에 터놓았다. 케이블카가 설치되기 이전, 스님들을 위해 그리고 부처님께 공양하기 위하여 양식을 짊어지고 올라오는 이들의 땀방울을 상상해본다.
경내를 천천히 둘러보고 난 뒤 이윽고 시선은 쌍향수로 향한다. 쌍향수가 고고한 자태로 답사객을 맞는다. 흡사 터줏대감 어르신의 모습인데, 이곳에 찾는 이들은 일단 쌍향수 앞에선 합장으로 인사를 올린다. 나 또한 합장을 올리며 잠시 고개를 숙여 인사를 올린다. 이윽고 천천히 고개를 들면서 쌍향수를 올려다본다.
<쌍향수 아랫부분의 모습>
천자암의 쌍향수는 과연 듣던 대로 모습이 기이하면서도 신비롭다. 도공이 물레를 돌리며 토기를 빚어 올릴 때 걸쭉하게 위로 뽑아 올리는 모양처럼 회오리치듯이 줄기가 감아 올라가는 것 같다. 도공의 손길이 굵은 통나무 같은 흙덩이를 옹기로 빚으려는 듯 손가락을 담아 엿가락처럼 쑤욱 빼놓고선 이내 멈춰놓은 듯하다. 단단하고도 강한 상태로 굳은 것 같으면서도 유연하고 섬세하게 뻗은 가지는 강약의 조화가 잘 어우러졌다.
<쌍향수 윗부분의 모습>
쌍향수는 천연기념물 88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곱향나무다. 곱향나무는 향나무의 일종으로 예로부터 목재를 주로 향을 만드는데 사용하였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곱향나무를 보기가 힘들다고 하는데 북한의 경우 함경북도 명천군 사리에 곱향나무 군락이 있다고 전하며, 이는 북한 천연기념물 319호로 지정되어 있다고 한다.
쌍향수의 수령은 800여년으로 추정하고 있다. 800세나 드신 어르신이라 하겠는데, 그것도 두 그루가 같이 그렇게 서 있다는 점이 신기하다. 금슬 좋은 어르신 두 분이 서로 할멈, 할아범이라 부르면서 세월을 세어 나가는 듯하다. 다른 나무의 나이는 나이테로 새겨진다면, 이 쌍향수는 한올 한올 올라가는 주름으로 연배를 그려놓았다.
이 쌍향수는 삽목전설이 하나 있다. 전설에 의하면 이 두 곱향나무는 본디 고려시대의 유명한 스님이었던 보조국사 지눌과, 중국의 왕자이자 그의 제자인 담당국사의 지팡이었다고 한다. 두 선사께서 중국에 다녀오시면서 가져온 지팡이를 천자암 뒤편에 꽂아 놓았는데, 이게 뿌리를 내리고 자라서 지금의 쌍향수가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일까 몰라도 두 노목의 모습은 할멈과 할아범 같기도 하지만 사제지간으로 보이기도 한다. 마치 서로가 맞절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하는데 마치 경건함의 발로 같다. 왠지 삽목전설에서 지팡이가 뿌리 내렸다는 게 헛말로 느껴지지 않는다. 둘의 모습이 지난 세월을 같이하면서 함께 하였기에 서로의 지팡이로서 기능하였기 때문이리라.
또한 자세히 보면 두 노목은 서로의 공간을 침해하지 않고 일정공간을 띄워놓고 있다. 이는 서로가 서로를 양보하고 배려하는 것처럼 보인다. 혹자는 생장을 위한 어쩔 수 없는 것이라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 시선엔 그러한 여유와 넉넉함이 나무에 배어 있기에 오랜 세월 함께 지내올 수 있던 게 아닌가 싶다.
사실 쌍향수의 키는 12미터이다. 800년의 수령인데 다른 나무에 비해서는 그렇게 큰 편은 아니다. 하지만 일반적인 곱향나무의 크기가 8미터라는 점을 미루어 본다면 좀 더 큰 편이다. 하자만 천자암에 부는 매서운 산바람에 움츠러들기 일쑤였기 때문에 생각처럼 큰 거목으로 자라진 않은 것으로 보인다. 그런 세찬 바람을 계속 맞았기에 주름이 깊고 많이 배어진 것일까? 하지만 추위에 오들거리는 조급함보단 넉넉함에서 피어오른 여유가 나무 뒤에 숨겨지지 않았나 싶다.
쌍향수에 얽힌 또 다른 전설은 이 나무를 한 번씩 흔들어 보면 극락세계에 갈 수 있다는 것이다. 그 때문에 많은 답사객들과 불자들이 이곳을 찾아 쌍향수를 흔들어 보았고, 기도를 올렸을 것이다. 하지만 쌍향수를 흔든다고 해서 기도를 이뤄주는 것은 아닐게다. 아마 이 천자암까지 올라온다는 게 그 당시에는 매우 큰일이었고, 또한 정성과 노력이 가득 들기 때문에 감응한 것이리라. 부처님의 염화미소는 쌍향수의 흔들림보다, 땀에 젖은 손길을 바라보고 띄운 게 아닐까?
가을바람이 쌍향수를 쓰다듬고 지나가면 나뭇잎이 사삭거리는 소리와 함께 경내에는 풍경소리가 번져나간다. 제법 매서운 바람이 분다 싶어도 쌍향수의 굵은 줄기는 미동도 않는다. 오랜 세월, 이 자리를 지켜오면서 제법 여러 바람들을 만났을테다. 그러나 늘 굳건하고 강건한 한결같은 모습으로 유지하였기에 이처럼 곧은 뿌리를 내려 800년을 버텨온 것이리라.
우리나라에는 수많은 천연기념물들이 있지만, 그 중에서도 쌍향수는 깊은 내력과 사연을 가지고, 민중들에게 기복신앙의 대상이었다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 800년동안 신비로운 자태를 자랑하며 깊은 산중에 있고, 오기 힘든 곳임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불자들과 묵객들의 발걸음이 오고 가는 발걸음이 끊이질 않았다는 게 이러한 사실들을 방증한다.
쌍향수가 오래도록 이 자리를 유지할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다. 그 이유는 쌍향수는 하나가 아닌 둘이기에, 또한 이들 스스로가 진정 서로를 아끼기에, 그리고 오랜 세월 믿음으로 쌍향수를 지켜온 스님들과 불자들이 있기 때문이다. 오늘도 쌍향수는 하늘에 적시어 우두커니 서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