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상반기 문화유산 답사기 입선 수상작]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쌍암고택을 찾아서
송이룸
쌍암고택(雙巖古宅)의 유래를 알 수 있는 바위. 옆집의 벽이 되어 있으니 자기의 할일을 다하고 있는 셈이지요.
고등학생이 된지도 벌써 3개월이 흘러간다. 빡빡한 고등학교 생활이지만 나는 멋지게 기분전환하는 법을 우리 문화재 가꾸는 활동에서 찾는다. 벌써 오래 된 일이지만 매달 우리 가족은 한 문화재 한 지킴이 활동을 한다.
어김없이 5월 9일 둘째 주 토요일은 금오산에 있는 채미정에 가서 지킴이 활동을 하였다. 채미정을 깨끗이 청소하고 마루에 초칠하고 닦고, 창호지로 문을 바르고 나니 예쁘게 몸단장한 아가씨처럼 채미정의 모습이 황홀하였다. 활동을 끝낸 후 장영도 회장님께서 문화재청 홈페이지에 방문을 해서 중요민속자료로 지정된 문화재를 찾아가 답사를 하고 공모전에 참여해보라는 말씀을 하셨다.
아버지와 어머니를 졸라 5월 17일 일요일, 함께 문화재 지킴이 활동을 하는 민정이네 식구와 문화재를 답사하기로 약속을 하였다. 드디어 5월 17일 아침, 구름이 많이 끼어 잔뜩 찌푸린 하늘을 친구 삼아 두 가족은 구미시 해평면에 있는 쌍암고택을 찾았다. 민정이와 나는 답사기를 쓸 때, 쌍암고택 답사기는 내가 쓰고 민정이네 아버지의 고향인 안동 쪽의 고택 답사기는 민정이가 쓰기로 약속을 하였다.
내가 살고 있는 구미시 형곡동에서 해평면까지는 자가용으로 한 40분 정도 걸렸다. 네비게이션의 훌륭한 안내로 마을에 들어서니 오랜 옛날부터 마을을 지켜준 몇 백 살은 됨직한 아름드리 느티나무가 역사의 흔적을 우리에게 이야기 해주는 듯하였다. 오른 쪽으로 조그만 다리를 지나니 책에서 본 고택이 눈앞에 나타났다. 고택 정문 앞으로 차를 대려고 하니 어제 내린 비로 땅은 질퍽질퍽한데 여러 대의 차가 주차되어 있었다. 차에서 내리니 연세가 드셔서 백발이 성성한 할아버지 몇 분이 어디서 왔는가를 물으셨다.
문화재를 답사하려고 왔다는 이야기를 들으시고는, 마침 오늘이 모임이 있는 날인데 1979년 이 고택이 중요민속자료 105호로 지정될 당시 경주 최씨 문중의 청장년회가 발족되어 20주년이 되는 뜻 깊은 모임이라는 말씀을 해주셨다. 할아버지께서는 조선 말 동학란 때 일본군들이 이 고택에서 주둔하였다는 이야기와 이 마을에 있었던 10채의 고택 중에 겨우 2채 만이 남았다는 말씀을 해 주셨다. 모임 때문에 분주하신 할아버지께 궁금한 것이 많아 자꾸 설명을 부탁드렸더니 바쁘신데도 불구하고 상세하게 설명을 잘 해주셨다.
쌍암고택은 검재(儉齋) 최수지(崔水智)의 후손인 최광익(崔光翊)이 1731년(영조 7)에 아들의 살림집으로 건축했다고 한다. 집 앞의 큰 바위가 2개 있어 쌍암고가(雙岩古家)라고 하였다. 동서로 긴 대지에 앞에서부터 대문채, 사랑채, 중문간채, 안채, 사당을 차례로 배치하였다. 사랑채만 남향이고 나머지는 동향이다.
안채는 비교적 큰 6칸통 대청을 중심으로 하여 그 좌우에 방과 부엌 등이 ㄷ자 형을 이루고 있다. 안방 뒤편에 찬방을 두고 있는데, 이 지역에서 흔히 나타나는 평면구성이다. 사랑채는 좌측에 4칸으로 구분되어 전(田)자를 이룬 온돌방을 두고 3칸 대청과 1칸 제청(祭聽)을 배열한 겹집이다. 사당은 전면에 툇간을 두고 그 뒤편 3칸 모두에 아주 높은 굽널을 들인 장자살문을 달았다. 막돌 초석위에 방주를 세우고 장혀만 수장한 3량가 홑처마 맞배지붕집이다.
문화재의 가치를 설명하는 어려운 말들을 다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차차 관심을 가지고 공부하기로 마음먹고, 나는 사랑채 앞에서 오랫동안 건물을 살펴보았다. 외갓집 성주 월항에 있는 아흔아홉 칸짜리 한주종택을 찾아갔을 때 집의 규모와 예쁘게 꾸며진 정원을 보고 놀랐는데, 이 고택은 사랑채를 버티고 있는 기둥들이 모두 둥근 통나무로 지탱이 되고 있었다.
일반적인 옛집들은 기둥들이 각이 져 있었는데 이 집은 특별하게 기둥들이 둥글게 되어 있었다. 사랑채는 주로 바깥주인이 거처하면서 외부의 손님들을 접대하는 생활공간이기 때문에 그 집안의 가풍이나 자랑거리가 하나쯤은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마루 위의 벽면에 걸려 있는 현판을 유심히 보니 효사와(孝思窩)라고 쓰여 있었다.
뜻대로 풀이하면 ´효도를 생각하는 집′이다. 궁금증이 일어 정신없이 손님들을 맞고 계신 주인께 여쭈어 보니 중국의 어느 고사에서 따온 말인데 ″자손들이 부모님께 효도함을 한시라도 잊어서는 안 된다″는 문구라고 들려 주셨다.
바깥주인이 이 곳을 찾는 사람들을 접대할 때 마다 이 글의 뜻을 새기며 서로 효도에 대해 끊임없이 주고받았을 이야기들을 생각하니 지금의 우리들도 부모님께 효도해야 함을 다시 한번 새길 수 있었다.
그런데 지붕 모양을 유심히 살펴보다가 이상한 것을 발견하였다. 다른 곳에서는 본적이 없는 특이한 것이었다. 지붕을 받치고 있는 작은 기둥 끝에 문고리가 달려 있는 것이 아닌가? 문고리가 지붕을 받치고 있는 작은 기둥에 마루로 올라가는 돌계단과 수직이 되도록 양쪽으로 2개가 달려 있었다. 멀리 계신 주인께 얼른 여쭈어 보았다. 주인께서는 바로 효사와를 실천했던 증거물이라 하셨다. 손님들 중에는 연세가 많은 분들도 계신데 마루 앞의 돌계단을 올라오기가 불편하여 다칠 수도 있기 때문에 지붕위에 달려 있는 문고리에 줄을 달아 늘어뜨려 몸이 불편하거나 연로하신 분들이 줄에 의지하여 편안하게 계단을 오르게 하는 특수 장치였다는 것이다. 효도를 실천하며 웃어른을 공경했던 조상들의 지혜를 다시 한번 실감했다.
사랑채에서 안채 쪽으로 발을 옮기니 안채 문 앞에 집 벽이 탁 가로 막고 서서 안채는 밖에서는 볼 수 없도록 되어 있었다. 주부는 집안의 안주인으로서 주거의 중심이며 내부에 위치하여 외부로부터 격리 보호되어야 했기 때문이라는 설명을 듣고 집의 구조를 이해할 수 있었다.
안채의 옆을 돌아 밖으로 나와 보니 제일 뒤쪽에 사당이 자리 잡고 있었다. 사당은 조상의 신주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곳인데 집주인의 이야기로는 이 집이 중요민속자료로 지정되는 바람에 후손으로서 자랑스러움도 있지만 제사를 지내고 하는 일은 여간 불편하지 않다는 이야기를 하셨다. 편리하게 집을 개조할 수 없어서 많이 불편하다는 이야기였다.
집 전체를 둘러보니 규모가 대단하였다. 길게 동서로 자리 잡은 이 곳은 원래 대문이 남쪽에 있었다는 이야기와 대문 앞에 커다란 바위 두 개가 있어서 쌍암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하였는데 바위가 보이질 않았다. 나는 바위가 어디 있는지 궁금하였다. 지금의 집 담 밖에 두 개의 바위 중 한개는 없어졌다고 한다. 나는 바위를 찾아 나섰다. 지금의 동쪽 입구를 나와 남쪽 옆으로 돌아보니 옆집의 골목 사이에 옆집담장의 일부분이 되어 시멘트에 묻혀 있는 바위 한 개를 발견하였다. 아하! 원래 이쪽이 쌍암고택의 대문이 있던 곳이었구나! 나는 위대한 발견이라도 한 것처럼 커다란 목소리로 아버지와 어머니를 불렀다. 두 개의 바위를 다 보지는 못했지만 이 고택의 유래를 찾을 수 있는 바위를 보았다는 기쁨에 콧노래가 절로 나왔다.
문화재에 대한 기본상식이 많이 부족한 탓에 올바른 답사를 하지 못한 것 같아 아쉬움이 많이 남았지만, 차를 타고 두 번째 코스인 안동의 고택 답사로 향하면서, 나는 시간 나는 대로 열심히 문화재 공부를 해야겠다고 결심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