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둔미의 상징, 매화를 사랑한 선비들
조선의 화가 단원 김홍도(金弘道, 1745~?)는 어느 해 봄, 암향暗香 그윽한 매화나무 한 그루를 보게 됐다. 끼니를 잇기조차 힘든 형편이었지만, 나무를 집안에 사들이고 싶었다. 애면글면하던 중에 그림이 삼천 냥에 팔렸다. 머뭇거리지 않고 단원은 그 가운데 이천냥으로 눈에 담아두었던 매화나무를 샀다. 매화를 사들인 기쁨을 벗들과 나누기 위해 술잔치를 벌인 건 자유인 단원에게 자연스런 순서였다. 그 잔치에 팔백 냥을 들였다. 매화향을 감상하며 벌이는 술잔치, 이른바 매화음梅花飮이었다. 가족들에게 남긴 건 고작 그림 값 삼천 냥의 십분의 일도 안 되는 이백 냥에 그쳤다. 이른 봄 매화가 피어나면 우리네 옛 선비들은 벗과 함께 매화나무 그늘 아래 모여 앉아, 단원처럼 매화음을 즐겼다. 매화 사랑은 당장의 끼니보다 앞섰다. 자연 속에 묻혀 살며, 나무와 꽃을 사랑했던 선비들이 어찌 단원뿐이겠는가. 매화 사랑이라 하면 퇴계 이황을 빼놓을 수 없다. 퇴계 선생은 죽음에 들기 전에 마지막으로 “저 나무에 물 주거라” 할 정도로 매화나무에 대한 애정이 극진했다.
퇴계 선생이 죽는 순간까지 바라보려 애썼던 매화나무에는 특별한 사연이 담겨있다. 마흔 일곱 살 때, 충북의 단양 군수를 지내는 동안 있었던 일이다. 당시 미모와 기품을 고루 갖춘 관기官妓 두향杜香은 선생의 인품에 감탄해 사랑의 증표가 될 여러 선물을 선생에게 전했지만, 번번이 거절당하기 일쑤였다. 두향의 애절한 마음을 알아챈 주변 사람들은 퇴계 선생이 거절하지 못할 선물이 바로 매화나무라고 일러줬다. 그러자 두향은 잘 골라낸 매화나무 한 그루를 선생에게 보냈고, 그간 어떤 선물 공세에도 꿈쩍하지 않던 선생이었지만 매화나무만큼은 내치지 못했다. 퇴계 선생은 두향의 매화나무를 무척 살갑게 키웠다. 심지어 단양에서의 임기를 마치고 풍기 군수로 떠날 때에는 손수 매화나무를 도산서원으로 옮겨 심고 죽는 순간까지 바라보며 지냈다.
영남에 퇴계가 있다면, 호남에는 퇴계에 맞설 만한 대학자로 남명 조식南冥 曺植, 1501~1572이 있다. 그는 평생 벼슬자리에 나서지 않고 은둔의 철학을 실천한 호남학파의 대학자다. 추구하는 학문의 성질은 달랐지만, 그들에게 공통된 것은 하나같이 자연을 사랑하고, 그 가운데에 특히 나무와 꽃, 그 중에서도 매화나무를 사랑했다는 점이다. 남명 선생은 학문적 업적이 정점에 이르던 예순 한 살 되던 해에 지리산 자락에 글방을 지었다. 경남 산청군 시천면 사리의 산천재山天齋가 그 집이다. 은둔형 선비, 남명 선생은 자신의 뜻대로 글방을 다 짓고 나무를 심었다. 역시 매화나무였다.
지금 우리가 그의 아호를 따서‘남명매南冥梅’라 부르는 나무가 바로 그 나무다. 저자에 나서지 않고 오로지 깊은 산야에 파묻혀 독실한 자세로 학문 탐구에만 열중하겠다는 남명 선생의 선택이 그랬다. 매화는 시끄러운 것보다는 조용한 것을, 살찐 것 보다는 마른 것을, 젊은 것보다는 늙은 것을 더 높이 사는 나무다. 은둔의 아름다움을 갖춘 나무다. 평생 은둔의 삶을 살아온 남명 선생 자신의 삶과 뜻에 꼭 맞는 나무였다. 남명 선생의 매화는 오랜 세월의 풍상을 겪으며 지금까지 살아남았지만, 여전히 늙어서도 기품을 잃지 않고 해마다 이른 봄 청초한 꽃 매화를 피워 올린다.
좌절한 개혁파의 의지로 자라난 동백
우리의 옛 선조들의 나무 사랑은 그저 개인적인 기호에서 그치지 않았다. 때로는 현실 사회의 불편한 진실에 부닥쳐 좌절한 의지와 희망을 나무에 기댄 흔적도 뚜렷이 남아있다. 전남 나주의 한적한 마을, 왕곡면 송죽리 창촌마을의 아늑한 정자, 금사정 뜰에 서있는 동백나무의 내력이 그렇다.
나무를 심은 것은 조선 중종 때의 개혁파 조광조를 따르던 선비들이었다. 당시 조광조가 추진한 급진적 개혁은 훈구파의 반대에 밀려 좌절하여 기묘사화라는 피바람을 일으켰다. 조광조는 임금의 사약을 받고 삶을 마쳤지만, 살벌했던 피바람을 간신히 피한 나주 출신의 개혁파 선비들은 이곳 창촌마을 금사정에 모였다. 나일손, 임붕, 정문손, 김두, 진이손, 김안복 등 열한 명의 선비들이었다. 당장에 자신들이 추진하던 개혁은 이룰 수 없게 됐지만, 끝내 세상을 더 올바르게 꾸려가자는 이상까지 버릴 수는 없었다. 그들은 언젠가 다시 세상을 바로잡을 수 있는 기회가 오리라는 믿음을 버리지 않고, 그때까지는 조금도 뜻을 굽히지 말자고 비장하게 맹세했다. 금강십일인계를 조직한 그들은 바로 이 금사정에서 정기적으로 모임을 갖고 시류時流를 논하면서 자신들의 이상을 실현할 날을 도모하자고 굳게 약속했다. 굳은 맹세와 약속의 상징으로 열한 명의 선비들은 나무 한 그루를 심기로 했다. 나무는 시절이 하 수상하여도 변치 않을 그들의 절개를 상징해야 했고, 피맺힌 그들의 맹세를 상징할 수 있는 비장함을 갖춘 나무여야 했다. 심사숙고 끝에 그들은 사철 푸른 잎을 떨구지 않고 눈 속에서도 비장한 붉은 꽃을 피우는 동백나무를 선택했다.
영원히 피워 올라야 할 민족향의 상징 향나무
비장한 마음으로 애지중지 나무를 키운 건 식민지 시대에도 이어졌다. 절창 ‘그날이 오면’이라는 시의 시인 ‘심훈’이 그다. 식민지 치하의 시인 심훈은 신문기자 생활을 하며 민족의 염원인 조국광복을 희구하는 시집 ‘그날이 오면’을 내려 했으나 일제의 검열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는 마침내 도시 생활을 청산하고 1932년, 충남 당진의 부곡리로 잦아들었다. 고향에 은둔하며 작품 창작에 전념할 수 있는 오두막 한 채를 지었다. 밭을 갈면서 글을 쓰겠다는 뜻으로 오두막의 이름을 필경사筆耕舍로 지었다. 집 앞에 그는 한 그루의 나무를 심었다. 조국을 향한 충정, 민족 해방을 향한 희망을 상징할 수 있는 나무, 향나무를 골라 심었다. 세월이 하 수상하여도 변함없이 민족정신을 잃지 않을 수 있는 사철 푸르른 잎을 가진 나무였다. 또 해방의 그날을 향한 우리의 희망과 기원이 하늘에까지 닿을 수 있는 짙은 향을 가진 나무였다. 아침이면 오두막 서재에서 몸을 털고 일어난 심훈은 물 한 바가지 떠서 들고는 나무에 물을 주며 정성을 들였다. 상록수처럼 우리 민족의 기상이 영원히 푸르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그는 작은 나무에 혼을 바쳤다. 아예 새로 착수한 소설의 제목을 그 나무의 이름처럼 ‘상록수’라 붙였다. 나무에 기울인 그의 정성은 조국 해방의 그날을 그린 염원의 표현이었고, 나무에 대한 애정은 그렇게 소설의 제목으로 나타난 것이다. 나무도 알았을 것이다. 치욕의 세월을 견뎌내고, 더 푸르고 더 향기롭게 자라는 것이 이 땅에 뿌리 내린 한 가지 이유임을. 심훈의 뜻을 따라 나무는 아직 작지만 옹골차게 잘 자랐다.
마음까지 경건해지는 옛 사람들의 나무 사랑
나무와 꽃은 단순히 유희나 애정의 대상에 그치지 않았음을 여실히 보여주는 나무들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자신의 집 앞마당에 은행나무를 심고 가꾸며 그 나무 그늘에서 후학들을 가르친 조선시대의 청백리 맹사성이나 말년에 지은 서당 남간정사 마당에 배롱나무를 심고 가꾸며 말년을 보낸 우암 송시열, 생가의 모정茅亭 앞 탱자나무를 바라보며, 억세게 우리말과 글에 담긴 민족 얼을 지키려 애쓴 가람 이병기 선생 등 선조들의 나무 사랑은 끝이 없다. 월북 작가 김용준은 ‘근원수필’에서 “구름같이 핀 매화 앞에 단정히 앉아 행여나 풍겨오는 암향이 다칠세라 호흡도 가다듬어 쉬면서 격동하는 심장을 가라앉히기에 힘을 쓴다.” 면서 매화를 대하면 마음이 경건해진다고 썼다. 나무 한 그루 앞에서 마음까지 경건해질 정도다. 그게 바로 우리 옛 선비들의 나무 사랑, 자연 사랑의 큰 뜻이었다.
글.사진ㅣ고규홍 한림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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