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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초당(茶山草堂), 나의 자부심인 한국전통문화학교의 2학기 전남지역 답사 중 6번째 행선지였다. 어릴 때부터 부모님과 함께 전국 각지의 명소를 다닌 덕분에 이번 답사의 행선지의 대부분이 가 본 곳이었는데 다산초당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다산초당은 조선 중기의 문신이며 실학의 대가인 茶山 정약용이 11년 동안이나 적거(謫居)하는 동안에 실학을 집성한 곳이다. 이를 총 정리한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는 세계적인 학술적 연구 자료로 인정받고 있는 만큼 그 발상지인 다산초당은 문화재적으로 아주 큰 의미를 지닌다. 동기들이 정성들여 만든 자료집에서 알 수 있었던 흥미로운 사실은, '다산초당'이 '초당(草堂)'이 아닌 '와당(瓦堂)'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어떤 모습일까? 두근거리는 마음을 안고 산행로를 따라 가볍게 다산초당으로 향했다.
동기들과 좁은 산행로를 걸으며 얘기를 나누다 보니 반갑게도 천일각(天一閣)이 보였다. 다산 선생이 유배될 당시에는 없던 건물이지만, 저 멀리 강진을 바라보며 가족에 대한 그리움을 달랬던 선생의 마음을 기리기 위해 1975년 설립한 누각이다. 다산 선생의 가족에 대한 그리움을 느껴보고자 천일각에 올라 강진만을 바라보는 순간, 짧은 산행동안의 땀이 다 씻겨 내려가는 듯 했다. 약간의 땀을 흘리며 올라와서 본 아찔하면서도 멋진 그 풍경..! 그렇지만 시원함은 잠시 날려버리기로 하고 다산 선생의 상황, 가족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생각하며 강진만을 다시 쳐다보았더니 느낌이 전혀 달랐다. 타지생활을 하며 느낀 가족에 대한 그리움이란.. 내가 간접적으로 느낀 감정은, 가슴 한 구석에서 밀려오는 아련함에 절경에 서있으면서도 웃음 지을 수 없는 그런 안타까움이었다.
천일각에서 동암으로 향하기 전에 잠시 이제껏 올라왔던 길을 뒤돌아 보았다. 그저 도착지만을 생각하는 마음에 눈앞에 놓인 길과 발밑밖에 볼 수 없었던 산행과는 달리 높은 소나무길 사이로 따사로운 햇볕이 들어오는 풍경이 보였다. 그대로 그 길을 지나쳐 버렸다면 두고두고 후회하지는 않았을까... 앞만 보고 나아가다 잠깐의 여유를 가지고 걸어온 길을 돌아본 덕에 아름다운 풍경을 볼 수 있었음을 감사하며 동암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동암은 초당의 동쪽에 있는 건물로 다산 선생이 유배생활동안 거처하였던 건물이며 목민심서 등의 저술 작업이 이루어진 곳이다. 원래 허물어져 없어진 것을 1976년 강진군에서 복원했고 솔바람이 불어오는 암자라 하여, 송풍암 이라고도 불린다. 동암에 걸린 보정산방(寶丁山房)의 현판 글씨는 추사 김정희가 직접 쓴 것을 동암이 복원될 때 확대 모각한 것으로 추사체의 아름다운 조형미를 엿볼 수 있다.
동암을 지나 드디어 다산초당으로 향하는데 아담한 크기의 연지석가산(蓮池石假山)이 보였다. 연지석가산은 연못과 연못 가운데에 있는 작은 섬을 말한다. 1808년 봄, 다산은 초당으로 이주 후 연못을 넓히고 탐진 강가에서 직접 돌을 주워 가운데에 산처럼 봉(峰)을 쌓아 '석가산'이라 하고, 만덕산 기슭에서 대나무로 홈통을 만들어 흐르는 물이 연못으로 들어가도록 하였으며 이를 비류폭포라 이름 지었다고 한다. 보통의 연못보다 아담한 크기였지만 어딘가 기품이 느껴졌다. 다산이 살던 시절의 백일홍과 대나무, 철철 흐르는 비류폭포 그리고 자유롭게 노니는 잉어들을 생각하니 웃음이 절로 났지만, 현재는 그 아름다웠을 풍경을 오로지 상상으로밖에 볼 수 없는 것이 안타깝다 생각하며 다산초당으로 향했다.
단정한 다산초당의 자태! '아, 바로 이곳에서 다산의 그 위대한 업적들이 이루어졌구나..' 다산초당 앞에 서는 순간 잔잔한 전율이 느껴졌지만 한편으론 소나무가 지나치게 높고 울창한 탓인지 마치 다산초당이 현실과 동떨어진 감옥처럼 느껴졌다. 마침 다산초당으로 그늘이 드리워진 때라 그 느낌은 더했다. 또 유배지가 산 중 '와당(瓦當)'이기 때문에 복원 당시에 원래 초당(草堂)이었던 것을 '와당(瓦當)'으로 복원했다는 사실을 모르는 일반 여행객들에게는 다산이 유배생활을 한 것이 아니라 산 속 아름다운 풍경에서 호사스러운 신선놀음을 했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 같아 안타까웠다. 어려운 발걸음을 해 놓고서는 안타깝게도 진짜 다산초당에서 봐야 할 것을 못 보고 가는 것이다. 만약, 모순적이게도 화려한 와당이 아니라 초당이었다면 산과 함께 녹아드는 초당의 풍광을 통해 소박한 민중들의 삶을 떠올리고 가족에 대한 그리움을 연상하며 다산의 마음에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백성을 진심으로 위하는 책을 썼던 다산의 따뜻한 마음과 그리운 가족에 대한 마음이 초당의 소박함으로부터 와 닿지 않았을까?
 | 또 복원사업을 위해 초당 앞 발굴이 한창이라 군데군데 땅을 파 놓았기 때문에 온전한 자연과 초당의 모습을 볼 수는 없었던 것이 아쉬웠다. 특히 다산이 돌을 부뚜막 삼아 솔방울로 불을 지펴 약천(藥泉)의 물로 차를 끓여 마셨다던 다조(茶?)는 발굴 때문에 온전히 땅에 있는 모습이 아니었는데 나는 그런 다조(茶?) 때문인지, 그늘진 다산초당 때문인지 왠지 모르게 우울해졌다. 그렇지만 지도교수님께서 관계자 분께 협조를 요청해주신 덕분에 발굴 의의와 진행에 대해 설명 해주시는 것을 듣고 한결 기분이 가벼워졌다. 관계자 분께서는 현재 다조(茶?)의 위치가 다산이 살던 시절의 위치와 다른 것 같다고, 언젠가 현재의 위치로 옮겨 온 것 같다는 말씀과 부식된 나뭇잎이 깔린 진흙층이 나온 것으로 보아 연지석가산(蓮池石假山) 외에 연못이 하나 더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는 말씀을 하셨다. 나는 다조를 보며 지금은 비록 발굴 때문에 주변 땅이 온전하지 못해 다소 초라한 모습이지만 훗날 다시 왔을 때 제 자리를 찾아 있다면 더 좋지 않겠느냐고, 그 때 다시 보자 마음속으로 말하며 발걸음을 떼었다.
늦은 소개이지만 다산초당에는 다산 선생의 유배생활과 관련된 다산사경(茶山四景)이 있다. 서암 앞의 약천(藥泉), 차를 끓이던 다조(茶?), 초당 옆의 연못인 연지석가산(蓮池石假山), 마지막으로 다산선생이 해배를 앞두고 발자취를 남기는 뜻에서 정석(丁石)이라는 글을 직접 새긴 바위 이렇게 4가지를 두고 하는 말이다. 나는 다산의 제자들이 거처하던 서암을 지나 다산 선생께서 직접 만드신 약천에 들러 살짝 목례를 하곤 마지막으로 정석 앞에 섰다. 마지막 발자취를 남기고 간다는 다산의 마음으로 정석 앞에 서니 꼭 다산 선생과 함께 존재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대로 서서 "나도 왔다 갑니다." 마음속으로 한번 읊조리고는 아쉬움을 뒤로 하고 버스로 향했다.
다산초당은 조선시대의 실학자, 다산 정약용이라는 중요한 인물에 대해 말할 때 빠질 수 없는 문화재이다. 재복원은 '초당(草堂)'이라는 이름과는 상관없이 '와당(瓦堂)'으로 이루어진 건물에서 느끼는 이질감을 없애기 위해 마땅히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혹시나 복원하는 과정에서 현재 상태로 남겨 두는 것만 못한 결과를 내지 않을까 우려가 된다. 다산초당에서 읽어야 할 것은 첫 번째, 세계적인 학술적 자료로 인정받는 여유당전서 발상지로서의 의미, 두 번째 가족에 대한 그리움과 민중을 생각하는 마음 그리고 세 번째 자연에 녹아들어 차와 함께 생활하는 다산의 모습, 마지막으로 깨끗하게 새겨져 있는 정석에서 읽을 수 있는 다산의 강직함과 바른 성품이다. 복원 후, 다산초당에 들르는 모든 이들의 마음속에 이 아름다움이 새겨지기를 바란다.
학교 수업을 들을 때, 그리고 각지의 박물관과 문화재 답사를 다닐 때 사람들이 주변의 가까운 문화를 누리고 있으면서 스스로 인식하지 못하는 것을 보면 참 안타깝다. 나는 문화재가 사람들에게 보다 쉽고 친근하게 기억됐으면, 좀 더 많은 사람들이 우리 문화재에 대해 사랑을 가지고 문화 속에서 살아가는 날이 오길 바라기에 문화재인력으로서 할 일이 너무나도 많다. 다조에 끓인 차의 향이 코끝으로 스치는 것을 느끼며 먼 듯 가까이 있는 석가산을 한 번 바라보고는, 슬며시 미소 짓는 다산의 모습을 떠올리며 머지않아 다가올 그 날을 기대해본다. | |